망자의 길동무 ‘꼭두’ 2만여 점, 동숭아트센터 꼭두박물관
망자의 길동무 ‘꼭두’ 2만여 점, 동숭아트센터 꼭두박물관
  • 김세원
  • 승인 201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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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김세원] 북을 치고 있는 악공(樂工),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광대, 오방색 무늬가 알록달록한 호랑이, 콧수염을 기른 호위무사... 한때 망자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했던 나무인형들은 소박하면서도 익살스럽다. 엄지손가락만한 인물상부터 사찰 명부전에 놓였던 큼지막한 동자상까지 크기도 모습도 제각각이다.

서울 대학로의 터줏대감이랄 수 있는 동숭아트센터에 꼭두박물관이 들어섰다. 동숭아트센터의 설립자인 김옥랑 대표(58)가 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수집해 온 꼭두 2만 여점을 바탕으로 센터 안 2층에 만든 전시관이다.

지난 4월29일 저녁 동숭아트센터는 모처럼 꼭두박물관 개관식 행사에 참석하러 온 250여 명의 하객들로 북적였다. 홍라희 리움박물관장, 도올 김용옥 교수, 이기웅 도서출판 열화당 대표,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 김의광 목인박물관장, 김홍남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대표,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전보삼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재즈가수 김준, 배우 이정길씨... 초청 인사들을 맞는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58)의 눈빛에는 설레임과 긴장감이 담겨있었다. 2007년 학력위조 파문으로 그동안 대외활동을 접고 지냈던 그에게 이번 행사는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오랜만의 외출’이자 그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꼭두’들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꼭두는 망자를 묘지까지 운구하는데 사용한 상여를 장식하던 나무 인형이에요. 이름 없는 장인들이 제작해 평민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으니 꼭두야말로 민중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죠. 이승과 저승, 현실과 꿈 사이를 넘나드는 존재로 여겨졌기에 옛날 사람들은 꼭두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저승으로 떠나는 망자와 동행하면서 망자를 위로하고 지켜준다고 믿었어요.”




김대표는 벼슬아치보다는 평민의 상여에 꼭두가 더 많이 쓰였다고 했다. 신분 때문에 살아서는 누리지 못한 호사와 대접을 저승길에서나마 마음껏 누리라는 배려에서다. 무사, 악사, 재주꾼, 동자, 시종 등의 인간 군상과 용, 호랑이, 봉황, 소나무, 연꽃 등의 갖은 동식물들을 투박하게 재현한 ‘꼭두’는 망자의 저승길 길동무이자 영혼을 잡귀로부터 지켜주는 지킴이였다. 특정한 양식이 없어 만듦새가 들쭉날쭉하지만 꼭두는 기능에 따라 대체로 네 가지로 나뉜다. 용이나 봉황, 닭을 타고 있는 꼭두는 안내자로 망자에게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조선시대 무관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방망이 등 무기를 들고 있는 꼭두는 망자를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호위무사의 역할을 한다. 세 번째 꼭두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공이나 춤을 추고 물구나무를 서는 광대 그룹으로 가족과 영원한 이별을 한 망자의 슬픔이나 저승길에 대한 불안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얌전한 처녀의 모습을 한 꼭두는 망자의 시중을 들어주는 역할이다.

망자에 대한 산 자의 애틋한 배려와 애착을 표상화한 꼭두는 그러나 상여가 종이로 만든 꽃상여로 바뀌고, 다시 운구차가 상여를 대신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갔다. 현재 남아있는 꼭두는 주로 조선후기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람들이 기피하는 상여장식을 모았을까? 김대표는 서른 살의 나이차를 뛰어넘는 결혼으로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겪던 젊은 날, 청계천 5가의 고물상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한 꼭두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사업을 하시던 친정아버지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고로 돌아가시면서 모든 게 흔들렸어요. 그리고는 대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만난 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한 거죠. 전처와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여섯이나 딸린 사업가였죠. 모두들 미쳤다고 했어요. 그 무렵 고물상에서 구석에 버려진 채 있는 조그만 여자꼭두를 봤어요. 녹의홍상을 입고 오른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더군요. 곱게 차려입었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홀로 버려져 있는 것이 꼭 제 모습 같았어요. 남편은 잦은 해외출장으로 바빴고, 주변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었기에 친정식구나 친구를 만나기도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남편과 관련된 다른 사업가의 사모님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죠.”



겉보기에는 팔자 좋은 재벌 사모님이었지만 전처의 소생들보다도 나이어린 새색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서른 살 넘는 나이차가 부담스러워 1952년생인 나이를 일곱 살이나 올렸다. 학력 위조 파문의 배경에는 이런 개인사가 숨어 있었다.

김대표는 그때부터 꼭두를 하나 둘 모으기 시작했다. 꼭두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70년 대 초반만 해도 꼭두는 잡동사니거나 불쏘시개 취급을 받아 그냥 얻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김대표는 “나중에는 꼭두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라고 했다.

꼭두를 수집하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꼭두극’에 뛰어들었다. 꼭두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었다. 인형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말이어서 ‘꼭두극’이라고 했다. 1984년 꼭두 극단 ‘낭랑’을 창단하고 1986년부터 3년동안 계간지 ‘꼭두극’을 발간했다.

꼭두에서 시작된, 무형의 가치를 유형화하는 작업에 대한 열정은 공연전반으로 확장되었다. 1989년 대학로에 복합공연장 동숭아트센터를 설립하면서 문화계의 유력인사로 부상한 김대표는 1991년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을 기치로 내건 옥랑문화재단을, 1994년에는 예술영화 전용관인 동숭시네마텍을 설립했다.

그 사이 꼭두는 미술사적으로 재조명되어 조선후기 민중문화의 대표장르로서 자리매김했다. 어떤 꼭두는 경매에서 3천7백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2007년 여름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선으로 대성황을 이뤘던 꼭두의 미국 순회전시는 김대표로 하여금, 꼭두의 문화적 가치에 대해 새삼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됐다.


“경제적 풍요는 달성했지만 정신적 빈곤에서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죽음에 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꼭두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봄으로써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김대표가 수집한 2만 여점의 꼭두는 900㎡ 면적에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교육실, 아트숍, 어린이 놀이터 ‘꼭두야 놀자’ 등으로 구성된 꼭두박물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만날 예정이다. 박물관측은 19~20세기 꼭두 수장품들을 간추려 두 가지 전시를 하고 있다. 꼭두 인형·상여 앞뒷머리 용수판 장식 등으로 채운 ‘조선후기 꼭두’ 상설전과 김대표가 꼭두를 만난 후 겪은 인생의 변화를 꼭두 대표작과 함께 설명한 기획전 ‘나의 꼭두 인생 30년’(5월31일까지)이다. 관람객이 꼭두를 체험할 수 있는 ‘유치원 어린이를 위한 주중 프로그램’,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주말 프로그램’ 등도 준비했다.

어른 5000원, 어린이 3000원. 02-766-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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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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