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게 아름답던 영국장미, 린 뒤 프레
슬프게 아름답던 영국장미, 린 뒤 프레
  • 소혁조
  • 승인 200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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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혁조의 인터미션


[인터뷰365 소혁조] 재클린 뒤 프레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여류 첼리스트였다. 뒤 프레 이전과 이후를 살펴봤을 때 그 누구도 그녀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여류 첼리스트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여느 예술가들처럼 자신의 훌륭한 재능을 맘껏 뽐내며 영광의 세월만을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과 환호를 받았던 영광의 시간만큼 불치병에 걸려 외로움과 고통 속에 신음했던 세월도 길었다. 영광과 좌절, 사랑과 배신이 교차하는 눈물 나는 삶을 살았던 그녀. 재클린 뒤 프레. 언제 들어도 가슴 찡한 그녀의 드라마틱한 삶을 살펴본다.


뒤 프레의 처절했던 삶은 음악 애호가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또 그녀의 언니인 힐러리 뒤 프레가 쓴 회고록 ‘A Genius in the Family’라는 책과 이 책을 원작으로 제작한 ‘힐러리와 재키’라는 영화도 있다.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책과 영화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첼로를 좋아한 어린 소녀

뒤 프레는 매우 유복하고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옥스포드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영국 사회의 피라미드에서 최정점에 위치하는 인텔리 집안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꽤 극성스러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언니 힐러리는 어릴 적부터 플룻을 배웠고 재클린은 언니보다 더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첼로를 시작하였다.


재클린이 첼로를 좋아하게 된 사연이 또 흥미롭다. 어린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던 그녀는 웅웅거리는 저음을 내는 악기를 연주하고 싶다며 부모님에게 졸랐고 부모님은 그녀의 키보다 더 큰 어린이용 첼로를 사주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재클린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직접 악보를 그려 교재를 만들어 주었고 다른 자녀들보다는 재클린에게 더욱 더 열성적이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다섯 살. 20세기 최고의 여류 첼리스트의 인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재클린이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이 첫 번째 행운이었고 최고 상류층의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두 번째 행운이었다면 세계 최고의 스승들을 만나 첼로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 세 번째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첼로의 신(神)이라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를 비롯하여 토르틀리에, 로스트로포비치 등의 명인들을 사사하였다.


1961년에 런던에서 화려한 데뷔를 하였고 1965년에 뉴욕에서 데뷔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약관의 어린 나이에 그녀는 명실공히 영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첼로의 스타가 되었다. 당시 영국에선 19세기에 활약한 국민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이후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클래식 음악의 스타가 없었던 차에 빼어난 재능을 가진 젊고 아름다운 여성, 그것도 첼로를 연주하는 희소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었으니 재클린이 스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재클린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여류 첼리스트로 각광받을 수 있었다.

사랑과 성공을 모두 거머쥔 꿈 같은 세월

재클린이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한 때는 그녀의 나이 1965년,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때부터였다. 고국인 영국을 넘어 세계적인 첼로의 스타가 되어 승승장구하던 그녀는 23세에 또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결혼이었다.


바렌보임은 유태인이다. 음악적 재능이 무척 뛰어난 장래가 촉망되는 피아니스트였던 바렌보임은 성공을 위한 불 같은 열정, 그리고 야심만만한 젊은이였다. 이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 재클린은 유태교로 개종하였고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서 결혼식까지 서둘러 해치웠을 정도였으니 두 사람이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애당초 재클린과 바렌보임은 잘 어울릴 수 없는 사이었다.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하였고 천재 소리를 들으며 20도 채 안된 나이에 세계적인 스타로 등극한 재클린. 재능은 뛰어나지만 배경도 별 볼 일 없었고 유태인 출신인 바렌보임의 결혼은 재클린의 집안에서는 물론 극구 반대하였고 모두들 재클린이 아깝다고 한 결혼이었다. 외모도 차이가 많이 났다. 큰 키에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재클린과 달리 바렌보임은 아주 작은 키에 꾀죄죄한 외모였다. 재클린이 바렌보임을 처음 집으로 데려와 인사시킨 날을 언니 힐러리는 마치 막내동생이 누나의 손을 붙잡고 온 것 같았다고 기억한다.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이 두 사람. 이들의 앞날엔 화창한 봄날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물론 처음은 좋았다. 둘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연주여행을 다녔고 이들의 공연은 성공하지 않는 법이 없었다. 재클린은 그녀 자신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더해 바렌보임에게도 많은 영감을 얻으며 음악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고 바렌보임은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된 재클린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거침없이 성공가도를 달렸다.

환상의 커플처럼 보이는 이 둘은 정녕 행복하기만 했을까? 결코 그렇진 않았다. 언니 힐러리의 회고에 따르면 바렌보임의 성공을 향한 끝없는 야망과 음악적 열정은 재클린을 무척 힘들게 하였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우울증까지 걸려 상습적으로 약을 복용하기도 했고 바렌보임은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해서 재클린은 힐러리에게 울며 살려달라고 전화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시련과 불행이 재클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중경화증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병마가 그녀를 엄습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난 어른이 되면 전신마비에 걸릴 것 같아’

재클린 뒤 프레는 42년을 살았다. 짧다면 짧은 42년의 시간을 약 14년씩 3등분 할 수 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시간이 3분의 1, 그리고 어린 시절에 데뷔하여 사랑과 성공을 모두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의 시간이 또 3분의 1이라면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희귀한 병에 걸려 죽음을 향해 달려간 불행한 시간이 또 3분의 1이다.


재클린은 1971년부터 다중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신음하기 시작하였고 1972년가을부터 병상에 누워지내야 했다. 다중경화증. 온 몸이 천천히 마비되어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이 무서운 병은 섬세함을 생명으로 하는 연주가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금새 회복될 것이라 믿었던 이 무서운 병은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27세. 성공을 향해 한창 앞을 달려야만 하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고통속에서 신음했던 그녀.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좌절과 절망뿐이 아니었다.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그녀 곁을 떠난 처절한 외로움과의 싸움,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잊혀져 간다는 두려움이었다. 이제 그녀를 간호하며 옆에서 지키는 사람은 오로지 그녀의 가족뿐. 그토록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 바렌보임은 열심히 출세가도를 달리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딴 살림까지 차리고 있었다.

재클린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항상 병상에 누워서 지내야 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모두를 잃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자신은 연주를 할 수 없었지만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78년 솔포드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전신마비의 증상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기구를 이용하여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야 했고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침대 위에서 숨만 쉬는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


1987년 가을. 그녀가 병마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산지 어언 15년이 지난 해였다. 가을의 찬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재클린은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10월 19일에 재클린은 의식을 잃었고 더 이상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녀가 의식을 잃게 되자 언니 힐러리는 바렌보임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파리에서 피아니스트와 딴 살림을 차리고 있던 바렌보임은 황급히 달려왔고 재클린은 바렌보임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나이 42세. 영국을 넘어 전 세계 음악팬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여류 첼리스트의 삶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잠깐 다니엘 바렌보임이란 사람에 대해 알아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렌보임은 유태인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재능과 열정을 타고났으며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 같은 야심찬 남자였다. 자신이 갖고 있는 음악적 재능과 열정에 국민적 스타인 재클린과 결혼하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아내의 덕을 톡톡히 보며 살았던 이 야심만만한 남자는 훗날 아내가 병상에 드러눕게 되자 다른 여자와 살림까지 차리게 되었다. 또한 유태인이면서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하여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다. 바렌보임은 재클린이 사망한 후 단 한 번도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의 무덤도 찾아가지 않는다면서. 그게 자랑인가? 바로 이런 점에서 출세지향적인 바렌보임의 도덕성 결함이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뛰어난 음악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체는 환영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 남자를 과연 어떻게 봐야 좋을까?


하지만 이는 액면 그대로만 보았을 경우이다. 언니 힐러리는 회고록에서 자신도 다니엘을 무척 증오했지만 재클린이 사망한 후 보여주었던 그의 태도에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고 했다. 결국 다니엘과 재클린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고 각자 너무 다른 성격을 갖고 있어서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재클린은 어린 시절에 이미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예로 언니 힐러리는 어린 시절 재클린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언니. 비밀 하나 말해줄까?]

[비밀? 뭔데?]

[난…어른이 되면 전신마비에 걸릴 것 같아. 그럴 것 같아. 이거 엄마한테는 말하지마]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천재적 재능과 그 재능으로 인한 성공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이란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보면 참 오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뒤 프레가 남긴 음악

재클린 뒤 프레의 연주활동은 약 6년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 다양한 곡을 연주하며 많은 음반을 남겼다. 우선 하이든, 보케리니, 슈만, 생상스, 드보르작, 엘가 등의 굵직한 첼로 협주곡은 모두 녹음하였다. 특히 첼로 협주곡의 왕이라 불리는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은 바렌보임과 함께 녹음한 것과 첼리비다케와 함께 한 것도 있는데 둘 다 명연 중의 명연으로 꼽힌다.


음악사적으로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발굴, 연주한 것이다.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과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이 곡은 뒤 프레가 등장하기 전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곡이었으나 같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인 엘가의 곡을 무척 사랑한 뒤 프레 덕분에 세상에 알려져 명실공히 최고의 첼로 협주곡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좋아하는 이들은 뒤 프레의 음반을 0순위로 선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뒤 프레가 남긴 음반은 협주곡만이 아니다. 실내악, 독주곡 쪽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다니엘 바렌보임이 피아노 반주를 맡은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랄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도 좋은 평가를 받는 명반들이다.

뒤 프레의 연주는 항상 힘이 넘치고 강렬했다. 언제나 현이 끊어질 듯한 강렬한 연주를 선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공연무대는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과 정열이 넘쳤다고 한다. 그녀가 연주하는 모습을 영상자료로 보고 있으면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힘차게 활을 긋는 신들린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머리를 단정하게 묶지 않고 생머리를 휘날리는 야성적인 모습이 때론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배워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음악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여자.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고 그 남자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아야 했던 비운의 첼리스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희귀병에 걸려 인생의 3분의 1을 병상에 누워 신음하며 처절한 고독과 싸워야 했던 그녀 재클린 뒤 프레. 그녀가 떠난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녀를 기억한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처절한 심정으로 작곡했다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의 그 슬픈 선율이 흐를 때마다 그녀를 기억한다. 비록 그녀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떠났지만 그녀는 20세기의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운명을 간직한 영국의 장미였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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