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32)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32)
  • 임정진
  • 승인 200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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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32. 이젠 이별이야



양호 선생은 상담실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며 올라갔다.

「어머, 너 미선이 아니니?」

「안녕하세요? 선생님.」

상담실에는 미선이가 앉아 있다가 강 선생을 밝게 반겼다.

「그동안 왜 한 번도 얼굴을 볼 수 없었지? 얼굴이 좋아졌구나?」

미선이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웃고만 있었다.

「최 선생님, 미선이 예뻐진 것 같죠?」

「그래요? 미인 눈에는 미인만 보이는 모양입니다. 전 모르겠어요. 하하.」

최 선생은 강 선생에게 홍차 한 잔을 내주며 말했다.

「미선이가 아버지한테 간답니다. 그래서 인사하러 왔대요.」

「어머 미국으로? 섭섭하구나.」

미선은 강 선생이 손을 잡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최 선생은 못 본 체하며 농담조로 얘기했다.

「강 선생님, 우린 이제 세계 속의 교사가 된 겁니다. 미국에도 제자가 턱 버티고 살게 됐으니 말이에요.」

강 선생은 미선의 볼에 흐른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부드럽고 고운 볼이었다.

「어머니가 섭섭하시겠구나. 아버지 곁에서 살게 되어 기분이 어떠니? 그동안 넌 혼자 외롭게 너무 오래 지냈어. 이제 아버지와 재미있게 지내겠구나. 잘된 일이네. 그렇죠? 최 선생님.」

「그럼요. 남의 일에 안됐다고 할 수 있나요?」

「최 선생님은 샘 나세요? 왜 그래요?」

「샘이라기보다 난 해외라고는 제주도밖에 못 가봤거든요. 그래서 지금 미선이가 큰 가방 들고 가면 그 속에 들어가서 미국 좀 구경하고 올까 생각중이에요.」

「후후 선생님두. 미선아, 그래 언제 떠나니?」

「내일 아침 9시 비행기예요. 그래서 오늘 인사드리려고...」

미선은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최 선생은 창밖을 내다보고 강 선생은 미선을 살짝 끌어안아 기대고 울도록 했다. 이 여리고 어린 애가 낯 선 곳에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팠다. 미선은 울면서 간신히 말을 이어 갔다.

「전 여기서... 실패하고... 떠나는 거예요. 잘하고 떠나는 거면... 이렇게까지 슬프진 않을 텐데... 미국에 가도... 여기가 그리울 거예요. 선생님들도 보고 싶을 거고...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강 선생도 그만 눈물이 눈가에 번졌다. 미선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어딜 가든 사람 사는 건 다 마찬가지일 거야. 네 자신을 꿋꿋이 세우고 있으려면 네 자신의 용기가 필요할 뿐이지. 잘해 내리라 믿어.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는 건 바보야. 잘 할 수 있지?」

미선은 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상자를 강 선생에게 내밀었다.

「선생님께 뭔가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없어도...」

강 선생은 우는 미선에게서 선물을 받아 들고 미선이만 바라봤다. 그때 최 선생이 다가왔다.

「어서 열어 보세요. 나한테 한 선물보다 더 좋은 건지, 아닌지 보게.」

그제서야 강 선생은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를 열었다. 작은 진주가 박힌 귀걸이였다.

「어머, 너무 예쁘구나. 이렇게 예쁜 걸 받아서 어쩌니. 난 너에게 줄 게 없는데...」

「강 선생님, 어디 귀에 매달아 보세요. 미선이 어머니가 주신 거랍니다. 미선이가 꼭 선물하고 싶은 선생님이 있다고 하니까 그걸 주셨대요.」

「고맙다, 미선아. 내가 결혼하게 되면 결혼식 때 이 귀걸이를 할게.」

미선이는 일어섰다. 강 선생도 따라 일어섰다.

「그만 가봐야지? 어머니랑도 얘기 많이 해야 하고 준비할 것도 많겠구나. 잘 가라. 건강하고, 밝게 웃고 지내.」

최 선생도 미선이와 짧게 악수를 했다.

「미국에 가면 공부도 열심히 해라. 여기서 못 한 거 다 보충해야지. 남자 친구 생기면 아버지께 인사시키고. 알았지?」

「네. 선생님 고마웠어요. 안녕히 계세요.」

간신히 말을 마친 미선은 울면서 상담실을 뛰쳐나갔다. 강 선생도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최 선생은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저 녀석, 미국 가는 거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라지만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남이나 진배없을 테고 새어머니가 얼마나 잘해 줄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맘이 너무 약해서 새 환경에 잘 적응할지도 걱정되고... 제깐에는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싶은 욕망에 용기를 낸 모양이에요. 여기서보다 전혀 새로운 곳에 가서 시작하는 게 제 과거를 떨쳐버리는 데 좋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거긴들 유혹이 없겠어요? 거기서 한번 비뚤어지기 시작하면 붙잡아 줄 사람도 없을 텐데... 저 녀석은 너무 정이 헤퍼서 탈이에요.」

강 선생은 눈물을 닦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혹시 미선이가 가는 걸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미선인 보이지 않고 노을이 지는 하늘을 이고 앉아 성적표를 꺼내 보는 아이들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강 선생님이 병원에 같이 가줘서 미선인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나한테 와서 몇 번이나 그 말을 하며 울더군요. 내가 찾아가서 인사를 하지 그러냐고 했더니 창피해서 못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야 인사를 한 거예요. 비자 나온 지가 꽤 됐는데 기특하게 학기말 고사 보고 간다고 여태 미루고 있었어요. 오늘 성적표 나오니까 그거 보고 간다고.」

강 선생은 미선이가 주고 간 선물을 만져 보았다. 작고 매끈한 진주알이 수줍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 보니 그것은 미선이의 눈물방울이었다.



봉구는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들고 동네에 있는 전자 대리점으로 달려갔다. 은주의 생활기록부에서 본 은주 생일은 이번 토요일이었지만 당장 선물을 사두고 싶었다. 돈을 그냥 가지고 있다간 천재 자장면을 사주고 오락실 가고 어쩌고 하다 다 써버릴까 두려웠다. 대리점은 여느 날보다 더 환하게 불을 켜고 있었다.

「워크맨 좀 보여 주세요.」

봉구는 서너 가지의 워크맨을 자세히 보고 성능에 대해 꼬치꼬치 묻다가 핑크색의 워크맨을 골랐다.

「이걸로 주세요. 저, 선물할 거니까 예쁘게 포장해 주세요.」

「여자 친구한테 선물할 건가 보지?」

「히히, 어떻게 아셨어요?」

「색도 예쁜 걸로 고르고 연신 싱글벙글 웃으니까 뻔하지, 뭐.」

「히히, 그래요?」

봉구는 미니 카세트를 들고 다시 레코드 가게로 갔다. 은주가 소연이한테 카세트를 빌려서 듣는다는 얘기가 생각나서였다. 남은 돈으로 이문세와 변진섭의 카세트 테이프를 샀다. 은주에게 선물을 줄 생각을 하니 절로 노래가 나왔다. 봉구는 중얼중얼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왔다.


은주는 집에 가서 차마 성적표를 꺼내 놓지 못하고 어머니의 눈치만 보았다. 아버지가 귀가하자 더 이상 숨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저녁때 아버지 도장을 받아 놔야 내일 학교에 가져 갈 수 있으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저... 성적표 나왔어요.」

「그래.」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더니 말없이 테이블에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옆에 있는 어머니가 성적표를 보는 동안 은주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은주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아버지 눈치를 보다 시선을 성적표에 고정한 채 꼿꼿이 앉아 있었다. 은주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쳐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담배를 절반쯤 피우다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 성적표 옆에 놓더니 담배를 끄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보며 속으로 자존심이 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자기 닮았으면 이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 거야. 아들은 자기 닮아서 박사 됐는데 딸만 나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어휴, 속상해.)

은주 어머니의 관자놀이엔 핏줄이 섰다. 그러나 은주에게 그런 내색을 할 수가 없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내 주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은주는 더 이상 거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현관을 소리나지 않게 열고 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답답해 숨이 막혔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다. 은주는 비상문을 간신히 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마치 무인도 같았고 은주는 난파선에 파도에 떠밀려 온 표류인 같았다. 옥상은 마치 이름 없는 혹성 같았고 은주는 고장난 우주선 때문에 혹성에 내려앉은 외계인 같았다. 은주는 괴로웠다. 봉구가 보고 싶었다.

은주는 옥상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이 잔뜩 껴서 별도 보이지 않았다. 은주는 하늘을 쳐다보다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내어 울 용기도 없어 소리를 죽여 가며 울었다. 하지만 울어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의 싸늘한 눈초리와 아버지의 냉담한 표정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은주 어머니는 주스를 가지고 은주 방에 들어갔다가 비로소 은주가 없음을 깨달았다. 화장실에도 은주는 없었다. 은주가 없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뭘 사러 잠깐 나갔겠지 생각했다.

은주는 울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창수, 봉구, 소연이, 엄마, 시험, 성적표, 하늘, 별, 담임선생님, 소풍, 벤치, 체육 시간, 도서관, 한약, 콘서트, 대학, 꿈, 경쟁, 사랑...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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