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엘리트 고질라, 마츠이 히데키
[MLB] 엘리트 고질라, 마츠이 히데키
  • 소혁조
  • 승인 200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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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를 해부한다 / 소혁조


[인터뷰365 소혁조] 心が変われば行動が変わる / 行動が変われば習慣が変わる / 習慣が変われば人格が変わる / 人格が変われば運命が変わる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마츠이의 고교 은사인 세이료 고등학교의 야마시타 감독의 말이다. 마츠이는 이 말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늘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의 결실이 오늘의 마츠이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야구팬들에게 일본 야구선수 중 가장 친숙한 선수를 한 명만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 아마 고질라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강타자 마츠이 히데키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츠이는 일본의 국민타자이다. 일본에서 그의 인기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대성공을 거둔 이치로를 능가한다. 한 가지 예로 이치로가 2001년에 일본을 떠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한 시즌 내내 돌풍을 일으키며 MVP와 신인왕을 석권했지만 그에게 보인 일본언론의 관심은 같은 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여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신조 츠요시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마츠이는 일본에서도 국민타자였기에 그가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을 당시에 보여준 일본언론의 24시간 실시간 감시카메라와 같은 편집증적 관심은 해도 너무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마츠이는 그 정도로 일본 국민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선수이다.

엘리트 고질라의 탄생

마츠이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하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마츠이는 명문 세이료 고교에 입학하여 괴물타자로 성장하게 된다. 마츠이를 전국적인 스타로 만들게 된 첫 번째 계기는 그가 3학년 때였던 1992년 고시엔 결승이었다. 당시 준결승전에서 만난 메이도쿠 고교는 괴물타자 마츠이를 만나 무려 5타석 연속 경원의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결국 메이도쿠는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고교생 마츠이는 이 게임에서 패배의 눈물을 떨구었으나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고 그가 얼마나 무서운 소년인지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메이도쿠 고교의 감독인 고시엔 대회 이후 경질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


1993년에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마츠이는 훗날 요미우리를 이끌어갈 재목 중의 재목으로 일찌감치 인정 받게 된다. 이후 1993년부터 꾸준한 성적을 올리며 요미우리의 확고부동한 중심타자, 팀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94년엔 팀의 우승에 큰 몫을 하였고 1996년엔 리그 MVP를 수상하였다. 이후 요미우리에선 아직은 젊어서 비교적 싼 가격에 장기계약을 할 수 있는 마츠이에게 이 때부터 장기계약을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마츠이는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토네이도 돌풍을 일으키며 미국 전역을 휩쓴 노모 히데오를 보며 메이저리그의 진출에 꿈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보여준 마츠이의 전성기는 대략 2000~2002년까지를 보고 있다. 이 당시 마츠이의 성적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2000년 타율 0.316 홈런 42 타점 108 출루율0.438장타율 0.654 시즌 MVP와 일본시리즈 우승, 일본시리즈 MVP. 데뷔 이후 처음으로 골든글러브 수상. 2001년 타율 0.333 홈런 36 타점 104 출루율 0.463 장타율 0.617. 2002년 타율 0.334 홈런 50 타점 107 출루율 0.461장타율 0.692 시즌 MVP. 일본시리즈 우승


3년간의 기록을 보면 경악, 충격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이 정도의 성적을 거둔 선수야 꽤 있겠지만 이 정도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마츠이 만큼의 전 국민적 사랑을 받은 선수는 결코 흔치 않다. 마츠이의 최 전성기였던 이 3년의 기간 동안 요미우리 구단은 팀의 상징인 마츠이를 붙잡고자 장기계약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심지어 백지수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츠이는 더 큰 꿈이 있었기에 거절했다. 그리고 2002년에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그는 낯선 미국 땅으로 떠나게 된다.


당시 대규모의 기자회견장에서 마츠이는 자신을 아껴준 수많은 팬들에게 차마 미안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의 인터뷰 장면이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裏切り物(배신자)’라는 표현을 쓰며 ‘여러분들이 절 배신자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꿈이 있고 여러분들의 사랑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기자회견을 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여기에서 잠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일본선수 중 왜 마츠이가 그토록 화제를 일으켰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95년 노모의 성공 이후 수많은 일본의 프로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마츠이 만큼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입단한 선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트레이드를 반대하는 팬들은 시위를 열기도 할 정도였다.


마츠이는 노모 이후에 진출한 일본야구 선수 중 그 누구보다 많은 인기를 얻었던 국민적 스타였다. 마츠이 이전에 진출한 노모, 하세가와, 이라부, 사사키, 이치로 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 이유는 마츠이가 거둔 훌륭한 성적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츠이가 거둔 성적뿐만 아니라 일본야구 팬의 7할을 차지한다는 교진(巨人,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핵심선수였고 팬들과 언론을 상대하는 예의 바른 모습들이 모두 합쳐진 결과이다. 이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바른 사나이의 전형이며 어릴 적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프로팀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모든 야구선수들이 가장 선망하는 팀에서 상징적인 선수로 뛰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MLB에 진출하게 된 팀도 미국의 최고 엘리트가 모여있는 뉴욕 양키스이다. 즉, 마츠이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엘리트, 진골 귀족, 모범 야구선수의 전형을 제시하였고 이에 일본인들은 그를 가장 좋아하는 야구선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거듭되는 변신. 양키스의 일원으로

2003년 새해가 시작되며 마츠이는 온 국민의 열화와도 같은 성원을 한 몸에 안고 MLB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뉴욕 양키스의 화려한 멤버들을 살펴보면 투수엔 살아있는 화석, 전설인 로저 클레멘스, 뮤스 마이크 무시나와 최고 좌완 엔디 페티트, 퍼펙트의 사나이 데이비드 웰스와 쿠바 특급 호세 콘트라레스, 역사상 최고의 클로저로 불리는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 등이 최강 중의 최강의 마운드 구성하고 있었다. 공격진을 살펴보면 뉴욕의 연인 데릭 지터, 최고의 공격형 포수 호르헤 포사다, 버니 윌리엄스, 제이슨 지암비, 알폰소 소리아노 등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최고의 선수들, 올스타급 선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다른 팀에 가면 중심타선에 있어도 충분할 정도의 타격 솜씨를 갖고 있다. 이렇게 화려한 멤버로 구성된 양키스는 21세기 들어 상상을 초월한 어마어마한 금전공세로 올스타급 선수들을 모조리 끌어 모아 악의 제국이란 달갑지 않은 별명까지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지구상 최고의 야구선수들이 모인 것 같은 팀에서 과연 마츠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일본에서 날고 기었던 화려한 전적을 갖고 있었다 한들 말처럼 쉬울까? 하는 걱정과 우려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마츠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신과 걱정을 깨끗하게 불식시키는 맹활약을 펼쳤고 미국에 진출한 첫해에 월드시리즈에까지 오르는 크나큰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MLB 역사상 동양인 선수가 데뷔 첫해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것은 마츠이가 처음이었다.


2003년에 기록한 마츠이의 성적은 163경기 출장에 타율 0.278, 홈런 16, 타점106, 안타 179, 출루율 0.353, 장타율 0.435이다. 영어도 잘 못하는 한 일본 청년이 데뷔 첫해에 마이너리그도 거치지 않고 바로 빅 리그에 데뷔하여 거둔 것이라고 보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의 홈런은 16개에 머문 것에 비해 타점이 무려 106이란 점과 안타가 179개를 기록했다는 것인데 위의 데이터는 두 가지 의미를 둘 수 있다.


1.데뷔 첫해에 장타에 욕심을 내지 않고 철저히 맞추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것.

2.찬스상황에선 결코 놓치지 않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타점을 올렸다는 것


마츠이는 데뷔 첫해에 적은 홈런을 기록하여 호쾌한 장타를 기다렸던 수많은 미국 팬들에게 과연 장타를 칠 수 있는 선수인가라는 의구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높은 타점을 기록했고 일본을 떠나 낯선 땅에서의 첫해에 적응기를 거친 것을 생각하면 그가 개인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팀을 위한 작전야구를 제대로 구사하고 있는 선수임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마츠이는 첫 시즌 내내 마이너로 강등되지 않고 악의 제국 양키스의 중심타선에서 200% 이상 자기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큰 스윙에 욕심을 내서 어이없는 삼진을 당했더라면 그토록 선수층이 두터운 양키스에서 살아남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마츠이가 루키 시즌에서 보여준 활약은 정규시즌뿐만 아니라 포스트시즌에서도 거침없이 이어졌다. MLB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포스트 시즌 중 하나로 꼽히는 2003 ALCS. 온갖 몸싸움과 욕설이 난무해서 전투를 넘어 전쟁이란 표현까지 서슴없이 나왔던 그 재미있던 2003 ALCS에서도 마츠이의 활약은 대단했다. 3차전에선 외계인, 양키스의 공공의 적인 페드로 마르티네스에게서 결정타를 뽑아내기도 하였고 마지막 7차전의 8회에서도 역시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큼지막한 2루타를 뽑아내 페드로를 강판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7차전 연장 11회에 터진 애런 분의 기적 같은 홈런으로 천신만고 끝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양키스. 마츠이의 활약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월드시리즈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2차전에선 큼지막한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였고 공격과 수비 모든 면에서 팀의 일원으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으나 양키스는 2승 4패로 예상치 못했던 복병 플로리다 말린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리고 2003년을 마지막으로 양키스와 마츠이는 더 이상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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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이의 야구. 꾸준함과 성실함

많은 이들은 마츠이가 타고난 체격과 재능을 갖춘 천부적인 야구천재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마츠이는 뛰어난 재능을 갖춘 훌륭한 선수임과 동시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성실함이 뒷받침되어 있다. 한 가지 예로 마츠이는 2003년 양키스에 입단하면서 개막전부터 단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출전하여 2006년 7월까지 무려 518경기를 연속으로 출장한 적이 있다. 2006년 7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홈경기에서 수비도중 손목을 크게 다쳐 아깝게도 연속출장의 기록이 518 게임에서 중지되었지만 예기치 못했던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과연 518이란 숫자에서 얼마나 더 보내졌을지 쉽게 가늠하기 힘들다. 뿐만 아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던 시절엔 무려 1300경기 연속출장이란 엄청난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주위의 온갖 부담스러운 기대와 걱정, 불신을 타고난 재능과 함께 멈추지 않은 성실함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츠이는 일본을 떠나 낯선 땅 미국에 정착하면서 그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시도하였다. 하위타선에서 뛰기도 하였고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는(비록 부상에 의한 것이었지만) 경험도 겪었다. 일본에 있을 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츠이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그것도 지구상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양키스 타선에서 당당하게 한 축을 맡고 있다. 데뷔 후 3년 만에 3할 타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고 2005 시즌이 끝난 후 FA 자격을 취득하였을 때 양키스는 그가 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는 것을 십분 인정하여 4년 5200만 달러의 엄청난 계약을 안겨주었다.


어릴 적부터 승승장구 팀의 중심에서 엘리트 코스만을 밟았던 그에겐 이런 변화가 결코 쉽지 않았겠지만 그는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위한 선수가 아닌 팀을 위한 선수가 되어 철저히 팀을 위한 야구를 구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자신을 변화시키며 팀의 일원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마츠이. 그건 바로 그의 은사이자 정신적 지주인 야마시타 감독의 격언, 마음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연쇄작용의 진리를 늘 가슴에 품고 실천하기 때문은 아닐까? 일반적인 엘리트 코스만을 거치며 자존심이 강한 이른바 ‘자뻑증’에 빠진 이들에겐 마츠이가 보여주는 야구가 인생의 좋은 모범답안이 될 것이다.



보너스. 마츠이의 여인들

마츠이는 주변의 여인들과의 이야깃거리로도 뉴스를 장식한다. 마츠이가 사귀었던 여인, 마츠이가 이상형이라고 밝힌 여인, 혹은 사귄다고 소문이 난 여인들이 모두 톱뉴스 감으로 장식이 된다. 마츠이의 기사라면 그토록 호들갑을 떠는 일본의 언론 때문에 뉴스에 오른 여인들도 무척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메인뉴스를 장식한 여인들을 한 번 살펴본다.


1. 아사카와 란 아사카와 란은 일본 AV의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포르노 배우이다. 이 여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18세 이상에 한함) 호기심 삼아 인터넷을 뒤져보시기 바란다. 일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온갖 민망한 포즈의 사진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사진처럼 옷을 입고 있는 정상적인 사진을 구하기가 더 힘들다.


마츠이는 이 여인을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고 아사카와 란은 마츠이의 생일선물로 자신의 누드사진을 보내준 적도 있다. 참고로 마츠이는 AV 광으로 유명한데 동계훈련 때 AV 테잎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닌다고 한다. 2년 전엔 스프링 캠프에 AV 테잎을 들고 오지 않자 일본언론에선 마츠이가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좋아하는 AV도 끊고 오로지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한 적도 있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상상하기 힘든 웃지 못할 기사일 것 같지만 일본 언론에서 마츠이를 대하는 태도는 무척 진지하기만 하다.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2. 토다 나호 토다 나호는 2001년부터 마츠이와 공식적으로 열애 중인 사이인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인기 탤런트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들의 교제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나호 본인은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둘이 프랑스 여행도 함께 하였고 나호가 마츠이의 부친도 만났다고 시인했었다.


3. 사카이 미키 우리나라의 영화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여배우 사카이 미키이다. 이와이 순지 감독, 나카야마 미호 주연의 너무도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에서 나카야마 미호의 어린 시절 역을 맡았던 청순가련형의 여배우이다. 한때 마츠이가 사카이 미키와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흐지부지 되었던 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을 당시 마츠이 아버지는 두 사람의 교제사실을 부인한 적이 있다.


위의 세 여인을 보면 아사카와 란 같은 천박한 섹시함이 철철 흘러 넘치는 스타일부터 사카이 미키처럼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여인에 이르기까지 마츠이가 좋아하는 여성상의 스펙트럼이 참으로 다양하고도 특이한 점을 알 수 있다.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소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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