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5)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5)
  • 임정진
  • 승인 200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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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5. 미홍의 고백



미홍이는 상담실을 찾아갔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이들이 지나가다가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더 이상 문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어 용기를 내어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상담실 최 선생은 편지 같은 것을 읽고 있다가 미홍이가 들어오자 편지를 치웠다.

「어서 와라. 앉거라.」

미홍이는 엉거주춤 소파에 살짝 걸터앉았다.

「엉덩이에 종기 났니?」

잔뜩 긴장했던 미홍은 최 선생의 느닷없는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미홍은 다시 소파에 깊숙이 앉았다.

「그래, 그렇게 앉으니까 훨씬 숙녀같다. 차 한잔 마시려던 참인데 넌 커피 좋아하니, 홍차 좋아하니?」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난 그런 대답하는 사람 싫더라. 내가 타주는 건 어차피 맛이 없으니 대강대강 넘어가자는 것 같아서 말야.」

「그런 게 아니구요... 그럼 커피 주세요.」

「그러자.」

최 선생은 커피 두 잔을 케이블에 놓았다.

「그래, 넌 이름이 뭐지? 난 최상준이다.」

「미홍이에요. 이미홍.」

「미홍아, 무슨 일로 왔는지 이제 말해 봐라. 난 들을 준비가 다 됐어.」

간신히 긴장이 풀렸던 미홍은 다시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미홍이 잠자코 있자 최 선생은 우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상담실까지 찾아오는 데도 미홍이에겐 많은 용기가 필요했었다는 걸 알고 있는 최 선생은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봇물이 터지면 자기의 고민을 다 털어놓게 되지만 봇물이 터지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자 그럼 우리 사지선다형으로 상담할까? 요샌 그래야 이해가 빠르거든. 일번, 이성 문제. 이번, 건강 문제. 삼번, 성적 문제. 사번, 교우 관계 문제. 몇 번이지?」

미홍은 조그만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사번요.」

「그래? 그중 제일 수월한 항목을 택했군. 계속 정답을 맞추면 보너스도 있지. 자 그럼 두 번째 문제. 일번, 따돌림. 이번, 오해. 삼번...」

「선생님.」

「그래.」

그러고도 미홍이는 입이 안 떨어져 좀더 망설였다. 최 선생은 끈기있게 기다렸다. 상담역을 맡은 후 제일 먼저 터득한 지혜가 기다림이었다. 문제를 안고 온 아이는 기다리면 문제를 풀어 내 보였고, 또 기다리면 스스로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해결은 문제 속에 숨어 있기 마련이었고 언제나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최 선생은 다만 기다려 주고 들어 주고 격려해 줄 뿐이었다. 문제는 언제나 스스로 풀어 나가게끔 되어 있었다.

「제가 돈을 훔쳤어요.」

「그랬구나. 돈이 어디에 필요했지?」

「백화점에 갔다가 좋은 운동화를 봤어요.」

「그게 사고 싶어서 돈이 필요했구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우연히 그 지갑이 눈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길래 순간적으로...」

「나도 좋은 일은 한번 하려면 벼르고 별러야 하는데 실수는 결단성 있게 하지. 그래 그 돈을 어떻게 했지? 운동화 사는 데 써버렸니?」

「돌려주었어요. 몰래.」

「돌려주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을 거다. 장하다.」

「아녜요, 선생님.」

미홍은 그만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돈은 돌려주었지만 전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어요. 저 대신 다른 애가 누명을 쓰고...」

최 선생은 그제야 미홍이가 창수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다. 미홍이가 한참 울도록 내버려두고 최 선생은 어항의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었다. 먹이를 다 주고 나니 미홍이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싶었다.

「누명을 쓴 애는 무척 억울했을 거다. 네가 그 애에게 몹쓸 짓을 한 셈이구나. 피해가 엉뚱한 애에게 갔으니 너도 놀랐을 거구.」

「정말 그렇게까지 될지는 몰랐어요, 선생님. 그 애는 누명을 벗었지만 자기를 의심한 다른 애를 때렸기 때문에 퇴학 당할지도 몰라요. 학교도 안 와요. 흑흑-」

「자, 한 번에 한 가지만 해결해 보자. 우선 네가 돈을 훔친 건 분명히 잘못이지? 그렇지?」

「다시는... 그런 짓 안 할 거예요.」

「남의 것을 훔치게 되면 주머니는 들어차지만 가슴이 비어 가지. 살아도 왜 사는지 모르게 되는 거야. 돈을 돌려주었지만 네 가슴에 있는 멍은 지울 수가 없지. 돈의 임자에게 사과하면 어떨까?」

「어떻게 해요? 선생님. 그러면 전 학교 못 다녀요. 다들 날 도둑년이라고 쳐다보는 속에서 어떻게 학교를 다녀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너 대신 누명을 쓴 애는 얼마나 속이 상했겠니?」

「죽고 싶었을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미홍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최 선생도 난감했다. 이제사 미홍이가 자기가 저지른 짓이라고 밝혀도 창수의 사태에 보탬이 될 것은 없었다. 이미 창수의 누명은 벗겨졌고 폭력에 관한 것만이 문제가 된 상태에서 미홍이가 괜히 나서서 미홍이만 눈총받는 것도 어리석은 짓인 것 같았다.

「선생님, 창수가 퇴학당하면 전 어떡해요?」

「창수는 아마 퇴학당하지 않을 거다. 학교에 다시 나오면 문도에게 사과하고 며칠간 정학 처분 정도로 끝날 것 같다. 선생님들도 창수가 그렇게 화가 난 이유를 이해하시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은 말아라.」

「정말 창수는 괜찮을까요?」

미홍이는 다소 안심이 된 표정이었다. 최 선생은 미홍에게 차근차근 말했다.

「미홍아, 내가 무슨 만병통치 처방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란다. 알고 있지? 우선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겠다고 너 자신과 약속을 하는 거야.」

「네.」

「그리고 창수가 학교에 오면 네가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네 순간적인 욕심으로 창수는 너무 큰 피해를 입었어. 내 방에서 둘을 만나게 해줄 테니 용서를 빌어라. 아마 창수는 비밀을 지켜 줄 거다. 내가 장담하지.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인 것 같다. 네 생각은 어떠니?」

미홍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섰다.

「그래, 그만 가봐라. 창수가 얼른 학교로 오길 기원해라. 알았지?」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셔요.」

미홍이 상담실 문을 열고 나가자 최 선생은 <휴> 하고 한숨이 나왔다. 상담은 늘 어려웠다.



봉구 어머니는 진수의 진학 상담 문제로 학교에 가게 되자 그 전날 밤부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여보, 내일 나 진수 학교 가야 되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가면 되지? 뭐, 또 옷타령 하려구?」

「아니 지금 내가 옷타령 할 형편이에요? 진수 레슨비 대려면 입던 옷도 팔아야 할 지경인데... 저기, 담임선생님에게 얼마나 드려야 할까?」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이 알아서 해.」

「이이는, 지금 누구 딸 얘기하는 건데 발뺌을 하려고 해요? 당신 딸 진수, 진수 담임.」

「아- 글쎄, 당신이 알아서 적당히 해. 그런 거 안 하면 애 학교 못 다니는 거야? 신문 보니까 어느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촌지 안 받기 양심선언하고 학부모님들도 촌지 안주기 결의했다던데 그래?」

「그러면 좋게요? 진수네 학교는 그런 거 안 합디다. 주면 받는다 그 소리지 뭐. 또 어떻게 빈손으로 가요. 자식 맡겨 놓고 일 년에 한두 번 찾아가는 걸.」

「그럼 다른 사람들만큼 가지고 가면 되잖소.」

「다른 엄마들이 얼마 가져가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돈 많은 사람은 십만 원도 가져간답니다.」

「십만 원? 그 집은 월수입이 2백만 원쯤 되나 보지?」

「돈 만원 달랑 가지고 가기도 그렇고... 한 5만 원은 넣어 가야 그래도...」

「5만 원? 60명이 5만 원씩 가져 오면 3백만 원이네. 월급보다 그 돈이 많겠어.」

「어휴, 누가 다달이 5만 원씩 드려요? 8학군에서는 온라인으로 다달이 부친다긴 하지만 여기야 수준이 그렇게는 안되잖아요.」

「에이, 그냥 가. 가서 절이나 크게 하고 와. 고맙습니다 하고.」

「이이는 지금 농담해요? 그럼 당신이 절하고 오시구야. 아버지가 학교 가면 세금내요?」

「아니 회사 가서 돈 벌어야지, 언제 학교 가서 선생님 만날 시간이 있어?」

「그럼 돈이나 많이 벌어 오든지. 선생님한테 드릴 거 걱정 없게.」

「당신 말 다 했어?」

「관둬요. 애 잘 가르치자고 지금 의논하는거지, 우리 싸워 봐요. 애들한테 부모 꼴이 뭐가 돼요. 담임한테 줄 봉투 가지고 싸운다면 애들 교육상 안 좋아요. 아구 답답해.」

어머니는 마루로 나왔다. 봉구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봉구가 늦도록 시험 부 하는 것을 보자 어머니는 흐뭇해졌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것을 있는 대로 다 챙겼다.

「아니, 엊그제 2만 원어치 장봤는데 냉장고가 또 통통 비었네. 내일 또 장봐야겠네. 봉구 간식거리도 좀 사놓고... 돈 들어오는 건 빤한데 왜 나가는 구멍은 이렇게 많지...」

어머니는 혼잣말을 하고 봉구 방에 먹을 것을 들여다 주었다. 봉구는 먹을 것은 손도 대지 않고 열심히 연습장에 무언가를 써댔다.


사랑하는 은주에게,

난 네가 절말 좋다. 눈에 넣어도...


그리고는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 볼펜만 빙글빙글 돌렸다.

(이래서 작문 시간이 있어야 한다니까. 국어 선생님이 맨날 은유체, 건조체 가르치면 뭐 해. 나 봐, 편지가 두 줄을 못 넘어. 가만있자. 눈에 넣어도, 눈에 넣어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아냐 이건 너무 과격해. 눈에 넣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을... 이건 너무 평범해. 어휴, 뭐라고 써야 은주의 심금을 울리지? 나는 너의 수호천사가 되고 싶다? 이건 또 너무 유치하네.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그래 이거야. 왜 노랫말은 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써가지고 내가 할말이 없게 하는 거야. 젠장.)

봉구는 중얼중얼거리면서 계속 연습장에 이런 표현, 저런 표현을 썼다. 그러나 맘에 드는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다. 별수없이 진수 방으로 갔다.

「진수야 자니?」

「아냐 오빠, 들어와.」

봉구는 진수 방으로 들어가 책꽂이를 휘휘 살폈다.

「오빠 뭐 찾어? 무슨 책?」

「으응, 저기- 너 시집 가진 거 없냐?」

「시집? 나 아직 시집가려면 멀었어.」

「이게 농담하고 있어. 좀 나긋나긋한 시, 그런 거 찾는데...」

「왜? 오빠와 시집. 너무너무 안 어울리는데?」

「야, 없으면 관둬. 무슨 기집애가 시집 한 권 없어.」

「있어. 김소월하고 이육사. 빌려 줄까?」

「그런거말구 요즘 새로 나온 시 없냐?」

「요즘 시는 시험에 안 나오잖아.」

「관둬. 이런 쑥맥하고 한집에 사는 내가 잘못이지.」

봉구는 애꿎은 진수에게 화를 벌컥 내고 다시 자기 방으로 와 끙끙 앓으며 은주에게 편지를 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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