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3)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3)
  • 임정진
  • 승인 200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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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3. “반 안에 스파이가 있어”



<선미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 4반 학급 문집 글매듭>

「아구, 벌써 표지 디자인하냐?」

황 선생은 손재주가 좋은 향옥이가 디자인하고 있는 표지를 보고 학급 문집 이름이 <글매듭>임을 알았다. 그때 교감이 뒷문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니 이 반은 왜 집에들 안가? 무슨 사고 있어요?」

황 선생은 싱글벙글하면서 교실을 나왔다. 그러나 교감은 교실을 휘휘 둘러보며 서 있었다.

다음날 아침, 직원 조회가 끝나고 교감은 황 선생을 불렀다. 그리고는 함께 교장실로 가자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 교장실로 들어가자 교장은 잔뜩 화난 얼굴로 황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인데도 날씨가 꽤 더워 벌써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었다.

「황 선생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황 선생은 교장이 왜 화를 내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원래 별별것을 다 가지고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트집을 잡는 사람이었다. 대신 교감이 황 선생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거 보시오.」


공동 창작시 <주판알마다 맺힌 설움> (5분단 13명)


이웃 아주머니가 물었다.

너 몇 학년이니?

고3이에요.

그래? 시험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난 입 속으로만 조그맣게 말했다.

여상 3학년이에요.

난 대학에 안가요.

왜 아줌마는 고3이 한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할까?

왜 난 큰소리로 말하지 못했을까.


엄마는 남동생에게 말했다.

대학엔 꼭 가야 한다.

집을 팔아서라도 보내 주마.

대학 안 나오면 사람 구실 못 해.

엄마는 내게 그랬다.

대학 가야 데모나 하고 사람만 버린다.

여자는 시집 잘 가면 되지.

네가 돈 벌어서 시집가라.

엄마, 딸은 사람 구실하면 안되나요.


졸업한 언니가 말했다.

난 입사 6년에 아직도 미스 박

이리 와봐, 타이프 빨리 쳐줘.

지난달에 입사한 대졸 여사원.

김선희 씨, 바쁩니까? 잠깐 봅시다.

월급날엔 화가 나서 소주 마셨지,

미스 박은 26만원. 김선희 씨는 32만원.

과장은 나더러 시집 안 가냐고 노처녀 되겠다고,

김선희 씨더러는 결혼 빨리 하면 뭐하냐고

커리어 우먼이 되라고 하더라.

주판알을 튕길 때마다

나는 설움을 튕긴다.


황 선생은 시를 읽고 눈물이 핑 돌았다. 교감은 그런 황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다음 장을 보라고 손짓을 했다.


공동 창작시 <종친회> (2분단 14명)


우리 학교는요.

아침마다 조회가 열려요.

족보 공부 하려면 직원 회의 견학 가죠.

이사장의 처삼촌, 조카사위

교장의 처남, 사촌, 친구 아들

서무과장은 이사장 막내동생

얼키고설켰어도 금방 알 수 있어요.

고개 들고 있는 사람은 종친회원.

고개 숙인 사람은 비회원.

수학여행비 뚝 떼어서

교장 여행 보내 줍시다.

종친회에서 짝짝짝 만장일치.

부교재는 우리 매형 서점에서

일괄 구입합시다. 짝짝짝.

교실 페인트 칠 그만두고

이사장실 소파 바꿉시다. 짝짝짝.

교사들이 자진해서 낸 채용 기부금으로

동해안에 땅 좀 삽시다. 짝짝짝.

빽없고 줄없는 선생님, 학생들

쭈그리고 앉아서

한숨만 쉬어요.

먹고 살아야지. 졸업만 하면 돼.

그래서 맨날 종친회가 열리는 학교가 된 거지요.


황 선생은 잠자코 교장의 넥타이를 쳐다보았다. 차마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가서 더욱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황 선생님,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건 애들 뜻에 동조한다는 얘기 아니오?」

「교장 선생님. 졸업 기념으로 학급 문집을 만든다며 저더런 참견하지 말라고 해서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의 역할이 뭐요? 학생들이 비뚜루 나가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는 것이 담임의 할 일 아니오?」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문집을 꾸며 보는 일이 교육적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황 선생 그렇게 안 봤어요.」

교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나가 버렸다. 교감더러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말도 하기 싫다는 뜻이기도 했다. 교감은 이미 얼굴이 벌겋게 되었고 말소리도 점점 커졌다.

「교지가 있지 않습니까? 뭐 하러 번거롭게 학급 문집을 따로 냅니까? 글 솜씨 있는 학생들은 교지에 원고 내면 되잖아요? 아이들한테 그렇게 말하세요. 그리고 만일 계속 이 일이 진행된다면 황 선생 반 학생들에게는 취업 추천이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걔들이 지금 한가하게 시나 지을 때예요? 요즘 기업체마다 노사분규 때문에 신입사원 안 뽑는 데가 많아서 취직시키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우리 학교는 지난 졸업생도 97프로 취업시켰어요. 이게 어디 보통일입니까. 학교는 저희들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그따위 불손한 시나 짓고 앉아 있으니 말이 돼요? 더 이상 일이 확대되기 전에 황 선생이 책임지고 마무리하세요. 황 선생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심받기전에요.」

황 선생은 교감의 흥분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진땀이 다 났다. 에어컨에서 찬 공기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도 후텁지근하게 느껴졌다. 황 선생은 우선 알겠다고 대답한 후 교장실을 나왔다. 송 선생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금방 다가왔다.

「교장이 뭐래요?」

「문집 만드는 거 그만두랍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원래 뒤가 구린 사람들은 겁도 많아요. 3년 전에도 왜 어느 반에서 학급 신문 만든다니까 지레 겁을 먹고 못 하게 하느라 난리를 피웠잖아요. 그땐 애들이 순진해서 의식 있는 글, 쓸 생각도 안했었는데...」

「애들한테 어떻게 말하죠?」

황 선생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송 선생을 쳐다보았다. 송 선생도 난감했다. 이런 일로 교사의 나약함을 학생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만 했다. 학생들이 보고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런데 높은 사람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꿈, 웃음과 고민이 들어 있는 문집을 만들지 못하다니...

황 선생은 일단 교실로 들어갔다. 조례 사항을 일러주고는 아이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담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례가 끝난 줄 알고 반장이 일어섰다.

「차렷-」

「아니 잠깐만. 반장 앉아라.」

황 선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교감 선생님이 나 나간 다음에 무슨 말씀 하셨지?」

「아뇨?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둘러보고 나가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나도 못 본 걸 교장 선생님이 가지고 계시니? 너희들이 쓴 시 말야.」

「네?」

아이들은 다소 놀랐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가 작게 말했다.

「우리 반에 스파이가 있어.」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이 웅성대기 시작해 반 전체가 <스파이>란 말을 중얼거리게 되었다. 황 선생은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이러다 단합이 되기는커녕 서로 의심만 하고 미워하게만 될 것 같았다.

「그만들 두자. 나도 이런 말 하게 되어 너무 미안하다. 문집은 만들지 말자. 이유는 너희들이 짐작하는 대로다.」

반장이 벌떡 일어섰다.

「선생님, 저희가 학교 밖에서 몰래 만들겠습니다. 절대 교장 선생님 모르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졸업식 날 전교생에게 나눠 주겠어요.」

황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소문은 어떻게든 날 꺼다. 지금도 어떻게 교장 선생님이 시를 입수했는지 모르잖니? 그러면 우리 반 전원이 취업을 못한다. 학교 추천서 없이 너희 혼자 힘으로 취직하느라 뛰어다니게 할 순 없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좋은 직장에 취업시키는 것뿐이다. 알았지, 내 말?」

황 선생은 그냥 교실에서 나와 버렸다. 더 이상 아이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교사라는 자리가 이렇게 창피하기는 처음이었다. 반장이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다들 따라 울어 교실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교감은 교장실 안에 설치된 방송 기재를 이용해 황 선생반의 조례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나자 헤드폰을 내려놓고 스위치를 껐다.



연락을 받고 치과로 달려온 문도 어머니는 문도를 붙잡고 울었다.

「아이구, 내 아들을 누가 이랬어. 이게 웬 봉변이야. 아이구. 문도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아침에 곱게 간 애가 이게 웬일이야.」

문도는 어머니가 우는 것을 보며 잠자코 있었다.

「문도야, 엄마한테 말해. 누가 그랬어?」

「엄마, 철봉에서 놀다 떨어졌어. 이젠 괜찮아」

그런데 옆에 있던 촉새가 톡 끼어들었다.

「문도 어머니, 창수란 애가 문도를 개 패듯 때렸어요.」

「뭐? 창수? 니네 반 애야? 내가 이놈을...」

문도 어머니가 화를 내며 펄펄 뛰자 문도는 촉새를 노려봤다.

(저 새낀 자존심이 뭔지도 모르는 새끼야. 입만 가벼워가지구...)


문도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 일찍 학교에 나타났다. 담임은 만나지도 않고 직접 교장실로 들어갔다.


그날 오후 봉구네 학교에서는 상담실 옆 회의실에서 선도위원회 회의가 열렸다. 교감 선생님이 말문을 열었다.

「2학년 5반에서 벌어졌던 폭력 사태 때문에 위원회가 소집된 것입니다. 사태 내용은 아까 회람으로 들린 바와 같습니다. 가해자인 창수는 오늘 무단결석 했고 피해자인 문도는 부상이 심해 나오지 못했습니다. 본인들의 발언을 들을 수는 없지만 목격자가 많으므로 사건의 진상은 언제든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문도 군은 일 주일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찰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럼 창수 군의 처벌에 관한 소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오전 내내 문도는 자기 방에 앉아서 어머니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엄마, 나 학교 갈 수 있어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학교를 못 가게 해요?」

「이 녀석아, 내가 아침에 학교 가서 너 못 온다고 얘기했다니까 그래. 의사가 전치 1주 진단서도 끊어 줬어. 내일부터 학교 가도 일 주일은 보충수업하지 말고 그냥 오란 말야, 알았어?」

「뭐 하러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몰라서 물어? 그래야 그 창수란 놈을 혼내지. 우리 귀한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혼쭐이 나야 돼.」


창수 때문에 선도 위원회가 열린다는 정보가 들자 민자의 돈을 훔쳐 갔던 미홍이는 예상외로 일이 커진 것을 알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체육 시간 중간에 교실에 와봤을 때만 해도 민자의 돈을 훔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생리대를 가져가려고 교실에 들어오니 주번은 엎드려 자고 있어 미홍이가 들어 온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미홍은 순간적으로 항상 돈이 많은 앞자리의 민자 지갑을 책상 서랍 안에서 꺼냈다. 며칠 전 백화점에 아이 쇼핑 하러 갔다가 본 운동화를 살 수 있는 돈이 들어 있기만 바랬다. <나이키>면 제일 비싼 줄 알았더니 더 멋있는 운동화가 나와 있었다. 수입한 운동화라는데 다른 것보다 만 원은 더 비쌌다. 그런데 막상 돈이 들어 있어 당황했다. 미홍이는 1,2만 원쯤 있을 줄 예상했는데 6만 원이나 들어 있어 민자가 대충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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