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1)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21)
  • 임정진
  • 승인 2009.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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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21. 창수의 고단한 꿈



창수는 꿈을 꾸었다. 5년 전에 가난이 지긋하다며 집을 나간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누난 다락방이라도 좋으니 자기 방을 갖는 게 소원이었다. 누나는 창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창수야, 넌 아직 어려서 모르지만 나만한 여자애는 자기방을 가져야 하는 거야. 물론 일곱 식구가 방 한켠에서 사는 집도 우리 동네에 많은 거 나도 알아. 하지만 그건 정상이 아냐. 내가 더 신경질이 나는 건 딸에게 방 한칸 마련 못해주는 우리 부모님이 너무나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이야. 일요일에도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언제나 일하시잖아. 우린 낭비하지도 않아. 근데 왜 이렇게 가난하니?」

창수는 누나가 왜 그렇게 방 타령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이젠 누나의 심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누나를 이해하겠다고 말해 주고 싶어도 누나는 창수 곁에 더 이상 없었다. 집을 나간 후 한번도 연락이 없는 누나를 창수는 가끔 꿈에서 만났다.

어떤 날에는 누나가 가뿐한 청바지 차림에 책을 한 아름 안고 대학교에 다니는 꿈을 꾸었다. 누나는 <창수야, 누난 공부해. 대학 못 나오면 사람대접을 못 받거든.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 등록금은 내가 댈게.> 하고 말했다.

어떤 꿈에는 누나가 손을 붕대로 싸매고 울고 있었다. 공장에서 미싱에 손을 다쳤다며 자꾸만 울었다. 그런 누나가 불쌍해 창수도 울다 잠이 깬 적이 있었다.

어떤 날에는 누나가 한복을 입고 꿈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창수를 업어 주며 말했다.

<창수야, 넌 커서 술 마시지 말아라. 사람들이 술만 마시면 이상하게 되더라. 술 좀 안 마시고 살면 좋겠다. 술이 지겨워, 지겨워 죽겠다.>

학교 뒷동산 벤치에 누워서 자는 창수의 쑴에 나타난 누나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창수가 <누나> 하며 다가가자 누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옷이 갑자기 화려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흑인 한 사람의 손을 잡아끌어 창수 앞에 데려왔다. 누나는 웃으며 말했다.

「인사해. 네 매형이야. 너 영어 공부 열심히 했니?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지? 허니, 히 이즈 마이 브라더.」

창수는 잠에서 깨었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렸다. 창수는 힘없이 교실로 갔다. 아직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느라 교실로 돌아오지 않아 주번 혼자 자다 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달중과 촉새가 여자 탈의실을 들여다보는 사치를 누리고 있음이 소문났다. 봉구네 반 남자 아이들 절반이 달중과 촉새 뒤를 따라 발걸음도 가볍게 견학을 간다고 나섰다.

「우와, 민자 쟨 <애마부인> 해도 되겠다.」

「임마, 나도 좀 보자.」

「짜샤, 잠깐만 기다려.」

「조용히 해. 조용히. 감상하는데 지장 있어.」

이십여 명의 남학생들이 사다리에 서로 기어오르느라 수선을 피는데 뒤늦게 정보를 입수한 천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아니, 나를 빼놓고...」

천재가 아이들을 밀치며 사다리에 오르자 다들 안 떨어지려고 매달리던 아이들에 천재의 몸무게까지 합해져 사다리가 그만 우지끈 부러져 버렸다.

「아-악」

우르르 쏟아져 내린 남학생들은 서로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고는 엉금엉금 기어서 그곳을 벗어났다. 체육 시간이야 다음주에 또 있는 거고 사다리야 다시 만들면 되지만 떠들다 여자애들한테 들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수 없을지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교실로 우르르 들어온 아이들은 체육복을 챙겨 넣고 물을 마시는 둥 부산했다. 그러던 중 민자가 갑자기 울상을 짓고 옷과 가방을 허둥대며 뒤지기 시작했다. 민자의 짝인 순영이가 놀라 민자가 쳐다보았다.

「왜 그래? 민자야. 뭐 없어졌어?」

「지갑이 없어.」

민자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뭐야? 아니 언제?」

「체육 시간 전에도 내가 확인했어. 오늘 레슨 가는 날이라서 레슨비랑 용돈, 회수권 다 들어 있는데...」

준식이 민자에게로 달려왔다.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나 반장은 피곤했다.

「민자야, 찬찬히 찾아봐.」

준식이는 민자를 진정시키고 같이 책상 주위 등을 살펴보았다. 아무데도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준식은 웅성거리며 민자 주위에 모여든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자기 자리에 앉자. 내가 담임 모셔올 때까지 아무도 교실 밖으로 나가지 마. 알았지?」

민자는 준식이가 교실을 나가는 것을 보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순영은 민자에게 조그맣게 물었다. 다들 조용히 있어 큰소리를 내기가 뭣했다.

「얼마나 되는데? 민자야.」

「레슨비 5만 원에. 용돈 만 원, 회수권은 세 장인지 네 장인지 그래.」

「월말도 아닌데 웬 레슨비니?」

「갈 때마다 내는 거란 말야. 아휴 어떡해.」

순영은 민자의 찡그린 모습을 보며 속으로는 딴생각을 했다.

(어휴, 일주일에 두 번 레슨 간다면서 갈 때마다 5만원? 그럼 한 달에 얼마야? 40만원이잖아. 게다가 선생님한테 또 레슨 받는다고 했으니 그럼 도대체 모두 얼마야. 와, 음대 두 번만 갔다간... 아무리 대학 강사한테 레슨 받는 거라지만 되게 비싸네. 휴-)

곧 경직된 얼굴을 한 담임과 반장이 달려왔다. 아이들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 교실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다.

「눈 감아.」

담임의 차가운 목소리에 다들 눈을 감았다.

「이런 불미스런 사건이 일어나다니 우리 반 전체의 수치다. 돈을 가져 간 사람은 눈을 떠라. 지금 밝혀지면 가볍게 넘어가겠다. 3분만 시간을 준다.」

3분은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도 눈을 뜨지 않았다. 담임은 다음 수업에 더 이상 지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수학 선생이 복도에 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눈을 뜨는 사람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양심의 고통은 점점 커질 것이다. 더 이상 한 사람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모두 눈을 떠.」

아이들은 조용히 눈을 뜨고 서로 옆사람을 쳐다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모두가 서로를 의심하게 되어 기분이 나빴다.

「우선 수업을 받아라. 그러나 여기서 이 불미스러운 일을 덮어두겠다는 건 아니다. 이 시간 마치고 종례 시간까지 기다려 보겠다. 나한테 와서 얘기를 하든지 쪽지를 남기든지 해라. 만약 그때까지도 고백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수업 끝나고 밤을 새워서라도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난 이런 일을 어영부영 넘어가는 성격이 아니다. 더 이상 친구들에게 고통을 주는 죄를 짓지 않기를 빈다. 책들 펴.」

담임은 나가 버렸다.

수학 시간이 끝나자마자 문도는 교무실로 달려갔다. 마침 담임은 화장실에서 나와 교무실로 들어가려던 참이라 문도는 복도에서 담임에게 도난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종섭이 복도 끝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문도와 담임의 표정이 심각해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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