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
  • 임정진
  • 승인 200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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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19. 손수레에 깔린 복서의 꿈




학생 주임 박 선생은 일요일이라 오래간만에 권투 도장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나섰다. 대학 다닐때는 매일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졸업하고는 각자 생활이 바빠 두 달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었다.

허름한 권투 도장 안에는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언제 와봐도 권투 도장은 젊음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박 선생은 가끔 도장에 들를 때마다 가슴 속에 있는 먼지가 씻기는 기분이었다. 박 선생의 친구는 선 수 하나를 잡고 폼을 교정하고 있었다. 펀치볼을 두드리는 소리, 줄넘기를 하는 소리, 샌드백을 두드리는 소리가 어울려 싱싱한 화음을 이뤄 내고 있었다. 박 선생은 과즙 음료와 이온 음료를 한아름 안고서 사범으로 일하는 코치에게 다가갔다.

「수고 많구나.」

「칠뜨기 왔어?」

박 선생은 그리 넓지 않은 체육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곳에 오면 늘 만날 수 있던 창수가 보이지 않았다.

「야, 근데 왜 창수가 안보이냐?」

「이 자식이 일주일 째 안 나타나고 있어. 시합이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말이야.」

사범은 음료수를 하나 땄다.

「혹시 창수네 집에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그 자식이 게으름 피우느라 안 나올 놈은 아닌데.」

「글쎄, 요즘 좀 피곤해 보이긴 해도 학교엔 매일 나오는데...」

박 선생은 창수네 집에 한번 가봐야겠다며 금방 체육관에서 나왔다.

산동네에서 번짓수만 가지고 집을 찾는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박 선생은 한 시간 가량 이집, 저집을 기웃거려야만 했다. 한 집에 보통 너댓 가구가 살고 있어서 문패를 보고 찾을 수도 없었다. 창수의 집을 찾아 헤매면서 만일 창수가 집에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함께 해야 했다. 만일 창수의 부모님과 창수 없이 마주치게 된다면 필경 창수 부모님은 창수가 큰 잘못을 저질렀으리라고 짐작할 것 같았다. 바위를 타고 놀던 아이들에게서 간신히 창수네 집이 어느 골목인지 알아냈다. 박 선생은 그중 똘똘해 보이는 8살가량의 꼬마에게 부탁을 했다.

「가서 창수 형 있나 보고 박길호란 사람이 여기서 기다린다고 말해 줄래?」

「알았어.」

대답을 한 꼬마는 말똥말똥 박 선생을 쳐다보았다. 꼬마의 반짝이는 눈을 십여 초간 마주 본 끝에 박 선생은 그 꼬마가 대답만 하고 왜 가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박 선생은 호주머니를 뒤져 백 원짜리 동전 한 닢을 꺼내 꼬마의 손에 쥐어 주었다.

꼬마는 동전을 꼭 쥐고 날쌔게 뛰어갔다. 얼마 있다 꼬마와 창수가 나타날 때까지 박 선생은 꼬마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았다. 골목길은 가파르고 좁고 지저분했다. 아이들은 골목길 대신 바위투성이인 공터를 놀이터 삼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위 놀이터 역시 꼬마들의 놀이터로는 부적당했다. 아이들이 발을 딛기엔 너무 미끄러웠고 올라가 놀기엔 너무 위험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열심히 놀았다. 왜 이 동네엔 놀이터가 없을까 생각하며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산동네는 어찌나 빽빽이 집이 들어섰던지 놀이터는커녕 세발자전거 한 대 세워 둘 공간도 없어 보였다.

박 선생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왜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는 모래밭이 있는 놀이터 한번 맘대로 써보지 못하고 학교에 가서는 먼지와 백묵 가루가 풀풀 날리는 교실에 앉아 겨울에는 조개탄과 씨름하고 여름에는 한증막에 들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단 말인가.

박 선생이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걸 보고 창수는 걱정스레 다가왔다. 무슨 일이길래 일요일에 여기까지 찾아왔을까? 내가 뭘 잘못했었나?

「안녕하세요? 선생님.」

창수는 박 선생의 등에 대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래. 집에 있었구나. 잠깐 앉아라.」

창수는 박 선생과 함께 바위 귀퉁이에 나란히 앉았다. 발밑에는 무수히 많은 집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체육관에 갔었다. 너 요새 연습하러 안 온다더라?」

「갈 형편이 안 돼서요.」

창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일이 있지? 요즘 부쩍 피곤해 보이고 자율학습도 안 하고 그냥 간다며?」

「아버지께서 편찮으세요. 병이 나신 게 아니고 다치셨어요. 청소 손수레에 깔리셔서 허리랑 다리를 다치셔서 일을 못 하세요. 그래서 요샌 엄마가 대신 아버지 일을 하시거든요. 그래야 계속 월급을 탈 수 있어요.」

「그래서 네가 어머니 도와드리는구나?」

「네. 어머니 혼자선 도저히 청소 손수레를 끌지 못 하실 만큼 무거워요. 새벽에 서너 시간 도와드리고 저녁에도 또 도와드리지만 그래도 맡은 구역 다 하려면 어머니가 무척 힘들어 하세요.」

창수는 죄나 지은 것처럼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고 안절부절못했다. 박 선생은 꼬마들이 욕을 하며 싸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사는 것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저 아이들도 사는 게 어렵다는 걸 아는 모양이구나. 삶에 지치면 욕설이 나오는 법이지. 박 선생은 가만히 창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창수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진실해 보였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나한테 얘기하지 그랬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 선생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말한들 내가 너를 위해 무얼 해줄 수 있었겠니?)

「죄송합니다. 선생님께 걱정을 끼쳐 드릴까봐 말씀 못 드렸습니다. 체육관 회비도 대신 내주시는데 연습 안 나가서 화나셨죠?」

「아니, 아니다. 그것 때문에 널 찾아온 게 아니다. 아버님 대신 어머님 일 도와드리랴, 학교 다니랴 무척 힘들겠구나.」

창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래도 훌륭한 아마추어 복서가 되겠다는 네 꿈을 포기해선 안돼.」

창수는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박 선생은 계속 발 아래 집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한번씩 어려운 시기가 있단다. 그때를 잘 참고 버티는 자가 이기고, 그렇지 못하면 인생에서 패하는 법이야. 너는 지금 바로 그 고비에 서 있는거야.」

박 선생은 창수의 어깨를 두들겼다.

「창수야, 나도 내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테니까... 좌절 하지 말고... 끝까지 헤쳐 나가는 거야. 알았지?」

「예.」

창수는 박 선생과 헤어져 집으로 왔다. 아버지를 위해 밥상을 차려 방에 들여놓고 창수는 다시 어머니와 합세하기 위해 나섰다. 해사 지기 전에 맡은 구역을 다 청소하려면 서둘려야만 했다.




박 선생은 산동네를 한참만에 내려왔다. 비탈길을 내려오는 것도 발밑에 신경을 많이 써야 돼 쉽지 않았다. 매일 이 길을 오르락내리락거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집 앞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가던 자신이 더없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창수를 생각하며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도 어떻게 도와주는 것이 창수를 위한 것인지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점점 가슴이 답답해져 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러나 불을 붙이려다말고 앞자리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담배를 집어넣었다.

(아가야, 너도 몇 년 있으면 학교 들어가겠구나, 그때부터 네 인생은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굴대굴 굴러간단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도 너도 모르게 친구를 누르고 이기려고 하데 되지. 왜냐구? 옆에서 그렇게 부추기거든.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경쟁하는 법부터 배우게 되지. 게다가 말이다, 아가야. 공부는 또 얼마나 재미없다구. 재미있게 공부하는 법은 언제나 뒷전이야. 네가 직접 궁리하고 실험해 보고 만져 보고 견학하고 발표하고 만들고 의논할 수 있다면 공부는 재밌는 거란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널 꼭꼭 붙잡아 앉히고 말도 못 하게 하고 듣게만 한단다. 왜냐구? 그래야만 시험에 나오는 걸 쏙쏙 가르쳐 점수를 높일 수 있지. 시험에 나오지 않지만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시험에 나오는 것만 가르치고 싶어한단다. 그것뿐인 줄 아니? 요즘은 칼국수집에 가도 여름엔 에어컨이 있거든. 그런데 교실에서는 선풍기도 없어. 왜 선풍기를 안 사냐구? 학교는 맨날 가난하단다. 올림픽은 치러도 교실엔 영하 3도가 되어야 조개탄을 나눠 주는 게 이상하지? 혹시 네 부모님이 돈을 잘 벌면 넌 스팀이 나오는 사립학교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길 빈다. 조개탄 난로는 말야, 불이 잘 붙지 않고 필때는 냄새와 연기가 나서 문을 활짝 다 열어 놓아야 해. 그러니까 더 춥지. 양동이로 한가득 조개탄을 타와서 때도 오후 두세 시가 디면 다 타버려. 겨울엔 오후가 될 수록 더 춥잖아? 그리고 주번은 온몸에 재를 뒤집어쓰고 먼지를 마시며 난롯불을 끄고 재를 치우지. 설마 네가 학교 다닐 때는 그렇지 않을 거라구? 글쎄, 난 장담은 못하겠다. 20년 전에 내가 학교 다닐 때도 그랬거든. 그땐 그래도 한 반에 40명 정도였어. 시골 학교라서 그렇기도 했겠지. 아무튼 넌 60명이 우글거리는 난장판에서 공부해야 될 거야. 맨 뒤에 앉은 애의 걸상은 뒷벽에 닿을 지경이고 맨 앞에 앉은 애의 책상은 선생의 교탁과 맞붙어 있지. 가끔 창문을 열지 않으면 아마 질식하게 될걸?)

박 선생이 아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속으로 넋두리를 늘어놓자 아기는 까꿍놀이를 하자는 줄 알고 혼자 버스 시트 뒤로 고개를 숨겼다 내밀었다 하며 좋아했다. 박 선생이 내리는 곳에서 그 아기와 아기 엄마도 내렸다. 박 선생이 아기와 다른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아기는 작은 손을 흔들au <빠이빠이>라고 했다. 박 선생은 창수 걱정을 잠시 잊고 웃으며 집으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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