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8)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8)
  • 임정진
  • 승인 2009.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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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18. 천재, 베를린영화제를 꿈꾸다



천재는 삼 일째 집에 일찍 와 자기 방에 틀어박혀 필름을 편집했다. 강 선생이 나오는 화면 하나하나가 다 소중해, 되도록 버리는 필름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 천재의 방 벽에는 온통 영화감독 사진이 붙어 있었다. 스필버그,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감독 등의 사진 옆에는 초대형 판넬이 있었다. 천재가 좋아하던 강수연 양의 사진이었다. 밝게 웃고 있는 강수연을 쳐다보며 웃는 일을 천재는 얼마 전부터 그만두었다. 자기가 찍어 온 필름 보기도 바빴다.

봉구는 간신히 가방을 찾아 들고 밥을 사먹었다. 그런 다음 생각해 보니 갈 곳이 없었다. 이 부푼 가슴을 안고 독서실에 가봐야 공부가 안될 것은 뻔하고 독서실 간다고 도시락에 돈까지 받아 왔으니 집에 들어간다는 건 말도 안됐다. 궁리 끝에 천재네 집으로 가기로 했다.

「띵똥.」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던 천재 동생, 수재가 문을 열어 주었다.

「봉구 형 웬일이야?」

「응, 형 있지?」

「자기 방에서 공부하고 있어」

봉구가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천재 어머니의 육중한 몸이 부엌 쪽에서 나타났다.

「누구니?」

봉구는 순간 무선 전화기가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아, 안녕하세요? 저예요, 봉구」

천재 어머니는 봉구를 째려보았다.

「아침 일찍 어쩐 일이냐?」

「천재랑 같이 공부하려고요...」

「뭐, 공부? 열흘 삶은 호박, 이도 안 들어갈 소리 하네. 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지. 어쨌든 왔으니까 들어가봐.」

「고.. 고맙습니다.」

천재 방 쪽으로 가는 봉구를 보며 천재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어휴, 저 웬수들. 쟤 엄마도 나처럼 속이 썩어 문드러졌겠지. 아니 공부만 하라는데 왜 그걸 못 해? 누가 저희더러 돈을 벌어 오래? 청소를 하래? 동생을 업어 주래? 우리땐 집안일에 농사일에 동생까지 업어 주면서 공부했는데... 아니 공부만 하라는데 왜 그걸 못해.」

「엄만 또 그 소리」

수재가 어머니를 보며 낄낄대자 어머니는 수재를 향해 소리쳤다.

「넌 아침부터 텔레비전이야? 저놈의 텔레비전을 내다 버리든지 해야지」

「엄마 나 <한지붕 세가족>만 보고 들어가서 공부할거야. 세탁소 아저씨 봐야 돼」

「왜? 너 세탁 하려구?」

「아니 그 아저씨 흉내내는 게 요새 유행이야.」

「공부 잘하는 것 좀 흉내 내.」

「엄마, 나 개그맨 할까봐.」

「뭘 해? 하필 하고 싶은 게 그거야? 그럴 듯한 직업이 좀 많니? 판사, 검사, 의사, 교수, 과학자, 약사, 외교관. 그런 거 많잖아.」

「에- 난 그런 거 싫어. 가수 아니면 개그맨 될 거야.」

「아들 둘이 어째 하나같이 저럴까. 난 자식 덕 보긴 애당초 글렀어.」

천재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수재는 계속 텔레비전을 보며 부엌을 향해 소리 질렀다.

「엄마, 아무거고 일인자가 되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인정받고 돈도 벌고. 엄마도 호강 시켜 줄게. 걱정마.」

봉구는 천재 방문을 두드렸다.

「후 이즈 잇?」

「나야 임마.」

「봉구냐?」

천재가 얼른 방문을 열어 주었다. 봉구를 방에 들이고 밖을 살핀 후 천재는 방문을 닫아걸었다.

「야, 너 용케도 적진을 통과해 왔구나.」

「말도 마라. 무서워서 까무라치는 줄 알았어. 니네 엄만 일단 몸매로 사람을 압도하잖아.」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냐? 이렇게 일찍. 너 일요일엔 12시까지 자는 애잖아.」

「응, 새벽 기도 드리고 오는 길이야.」

봉구는 손을 모으고 기도드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뭐? 새벽기도? 예수님 목탁 치는 소리 하고 있네. 네가 언제부터 교회 나갔어?」

「오늘부터 나가기로 했다.」

천재는 봉구가 갑자기 웬 교회 타령인가 의심스러워 봉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봉구는 천재의 영사기와 필름을 보았다.

「너 요새 고물 카메라 들고 왔다 갔다 하더니 또 엉터리 영화 하나 만든 모양이구나. 너 진짜 영화판에 끼어들 작정이야? 어차피 대학은 못 갈테고 그것도 좋겠지. 근데 연영과 나온 사람이 수두룩한데 너 같은 애, 영화판에서 받아줄까?」

「야.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자. 지금 막 시사회를 하려던 참인데 너 마침 잘 왔다. 여기 앉아. 관객 동원에 실패한 감독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이번엔 뭐야?」

「보기나 해. 깜짝 놀랄 거다.」

천재는 커튼을 치고 영사기를 틀었다. 이불 호청으로 만든 스크린에 타이틀이 나왔다.

<나의 연인>

봉구는 타이틀을 보고 픽 웃었다.

「지랄하네. 무슨 삼류 영화야?」

타이틀이 사라지면서 <감독 안천재>라는 자막이 떠올랐다. 봉구는 또 비웃었다.

「얼씨구.」

그러나 첫 화면이 시작되는 순간 봉구는 웃을 수가 없었다. 교문으로 들어서며 화사하게 웃는 양호 선생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건 뭐야?」

「입 다물고 보기나 해, 임마. 영화 감상 하는 태도가 글렀어.」

다음 장면은 강 선생이 정면을 보고 웃는 것이고 뒤이어 천재가 웃는 모습이 나왔다. 그러더니 둘이 마주보고 웃는 장면이 나왔다.

「잘 논다. 그동안 편집 기술만 늘어 가지고...」

봉구는 기가 막혀서 천재의 등을 한 대 후려쳤다. 그 다음엔 창가에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는 강 선생의 모습 위로 자그마하게 천재의 웃는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강 선생이 천재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편집이 된 것이었다.

맨 끝장면은 천재와 강 선생이 마치 키스라도 하려는 듯 다가서는 장면이었다.

「어때, 끝내 주지?」

천재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영사기를 껐다.

「딱 유치원 수준이다.」

「짜식이, 질투라는 거냐. 지금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출품할까 생각중인데... 아냐,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할까?」

「질투? 질투할 게 없어 정신병자를 질투해?」

「뭐 임마?」

천재는 봉구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봉구는 싱글벙글 웃으며 천재의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다.

「천재야, 넌 아무리 그래봤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대답 없는 메아리, 즉 간단히 말해 짝사랑 아니냐. 난 말이다, 이 봉구는 여자에게 대쉬했다. 지금쯤 그녀는 내 편지를 읽고 있다, 이 말씀이야.」

봉구는 황홀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 너 영화 보고 완전히 돌아 버렸구나?」

봉구는 대답도 안 하고 눈을 감은 채 미소만 지었다. 천재는 그런 봉구를 보고 혀를 쯧쯧 차더니 갑자기 판넬 앞으로 갔다. 그리곤 엄숙히 말했다.

「강수연 양,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나의 연인이 아닙니다. 용서하세요. 나의 진정한 연인을 이제야 찾았습니다.」

그러더니 천재는 강수연의 사진이 넣어진 판넬을 벽에서 떼어 내 옷장 위에 얹어 버렸다.



은주는 교회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았다. 어머니가 들어올 까 봐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펴보았다. 쪽지엔 삐뚤빼뚤하게 못생긴 글씨가 단 석 줄 적혀 있을 뿐이었다.


<매춘> 보러 갔다가 잡힌 건 사실은 내 본심이 아니었어.

달중이가 하도 가자고 꼬시는 바람에 갔던 것뿐이야.

이건 정말이야. 봉구가


「킥」

은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손으로 막았다.

「똑똑」

은주는 얼른 쪽지를 감추며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네. 들어오세요.」

은주 어머니가 메론과 그레이프후르츠 깎은 것과 직접 만든 딸기 쥬스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거 먹으면서 해라.」

은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은주 어머니가 검열하듯 책상 위와 방안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나갔다. 은주는 어머니가 나가자 다시 쪽지를 꺼내 읽었다.

「후후...」

은주는 오래간만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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