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7)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7)
  • 임정진
  • 승인 2009.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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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17. 봉구, 드디어 은주와 접선



민호는 전국 모의고사를 위하여 시험공부를 하려 했지만 워낙 범위가 넓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다른 아이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모의고사 전날, 담임은 종례 시간에 특강을 하게 되었다.

「너희들은 고3시절이 지겨워 죽겠지만 겨우 1년뿐이다. 난 이 못 할 노릇 8년째다. 고3 담임 맡기 시작하면 계속 고3 담임만 주니까 말이다. 자 다 알다시피 내일 모의고사다. 전국의 고3 대부분이 같이 보는 시험으로 학력고사 때까지 세 번 더 이런 시험이 있다. 여기서 나온 성적으로 원서 쓸 때 학교, 학과 배치하는 거니까 최선을 다해서 봐라. 내일 시험을 위해서 간단히 몇 가지 요령을 말해 주겠다. 물론 아는 것도 있겠지만 확인하는 의미에서 잘 들어라.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일단 넘어가고 아는 것부터 잘 풀어야지? 그 다음 빈 칸을 채울 때 그냥 찍거나 답일 듯 한 것을 무작정 찍지 말고 먼저 색칠한 답을 대충 세어 봐라. <ㄱㄴㄷㄹ>이 거의 25프로씩 나오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ㄴ> 이 제일 적게 칠해져 있으면 모르는 건 무조건 <ㄴ>을 칠해서 퍼센테이지를 맞춰 주는 게 유리하다. 하지만 모르는 답이 25프로가 넘으면 이 방법은 효과가 없다. 그 다음, 네 개의 보기 중 극단적인 말이 있는 것이 답일 경우가 많다. <전혀~ 하지 않았다>라든가 <모두~ 이다> 이렇게 쓴 걸 잘 살펴라. 비슷비슷한 보기가 네 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암기 과목에 그런 게 많지? 그럴 때는 나머지 세 개를 포괄하는 것이 답이다. 명심할 것은 사지선다형을 출제하는 사람이 하나만 맞는 보기를 주고 세 개의 보기는 정확히 틀리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프린트는 다른 반 애들에게는 절대 보여 주지 마라. 헷갈리면서 자주 출제되는 거니까 무조건 외워라. 알았지?」

담임이 나누어 준 손바닥 만한 종이엔 30여개의 짧은 문항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고려연방제는 나쁜 것.

*한미관계, 한일관계를 지배와 종속이라 왜곡하는 것은 공산주의자, 좌경지식인.

*자유 없는 질서는 있을 수 있다.

*인민혁명당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은 북괴의 남조선 혁명, 내란선동 지하당 조직 획책.

*<청춘예찬>은 강건체.

*순수시는 김영랑, 미묘한 음악과 청정한 언어의 미감.

*1925년대 참여시, 조잡하고 생경.

*낭만시는 퇴폐적,감상적.

*주지사는 회화적.

*김소월<진달래꽃>의 주제는 이별 아니고 <이별의 정한>.

*신민회는 비밀단체, 신간회는 비밀단체 아님.

*15세기 그림 씩씩, 16세기 사군자, 19세기 복고적.

*천태종은 교선일치, 조계종은 정혜쌍수, 조계종 무신정권.

*신문왕은 녹읍폐지, 녹읍부활은 경덕왕.

*정약용의 여전제는 실현가능성 전무.


민호네 반 아이들은 그 쪽지를 소중히 품고 독서실로 향했다.

다음날 시험이 끝나고 나서 담임은 아이들을 위해 얼음이 부서져 들어 있는 하드를 육십 개 사가지고 종례에 들어 왔다.

「자 오늘 수고했다. 이거 먹으면서 내 얘기 들어라. 중간고사나 기밀고사 볼 때는 범위가 넓으니까 웬만큼 해가지고는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평소 실력으로 봐야 하는데 그전에 봤던 시험 점수를 과목별로 합산해서 평균을 내봐. 그러면 아슬아슬한 과목이 있을 거다. 83점이라든가 61점 이런거 말고 69.3점, 89.4점 이런 거. 69.5점이면 반올림해서 70점이고 89.5점이면 90점이다. 미냐 양이냐, 우냐 수냐. 그 갈림길에 선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0.1점 차이로 우가 못 되고 미가 되면 거기다 단위수 곱해 봐. 엄청난 차이지. 특히 단위수 높은 과목은 1점 차이로 내신등급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다. 명심해. 그리고 가능한 한 <국민윤리>는 틀리지 마라. 동점일 때 국민윤리 점수 높은 사람이 유리한 거 알지? 나이 어린 사람, 생일이 늦은 사람은 오늘 가서 어머니한테 절해. 어린 나이에 학교 넣어 주셔서 고맙다고. 동점이면 어린 사람이 대학 들어간다. 호적 고칠 재주 있으면 고쳐 봐.」

아이들은 얼음을 소리 내어 씹으며 담임의 얘기를 들었다. 얼음을 씹어도 여전히 속은 후덥지근했다.



진수는 화실에서 고등학교 1학년인 언니와 친해졌다.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는 게 꿈이라는 정실은 진수와 가끔 떡볶이도 먹으러 가고 데생하는 것도 봐주고 했었다. 언제나 생글생글 웃는 정실이 울상을 하고 있어 진수는 화실 선생님한테 야단맞은 줄 알았다. 그래서 위로도 못 해주고 가만히 그림만 그렸다. 야참 시간에 우동을 먹으면서 정실은 진수에게 비로소 화난 이유를 말해 주었다.

「우리 학교 기독교 재단이잖아.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엔 신자인 애 몇 명만 열심히 듣지, 누가 듣니? 놀지. 내신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구 생활기록부 행동발달 사항인가 뭐에 기록한대. 그래서 애들이 다 딴 책 보거나 졸거나 그러는데 내가 떠들다 들켰어. 선생님이 뭘 물어 보는 거야. 근데 내가 성경도 한 번 안 읽어 봤는데 뭘 알아야 대답을 하지. 그리고 우리 집은 불교 믿거든. 나야 일 년에 두어 번 엄마 쫓아가서 절만 하고 오지만 말야. 그래서 그냥 모르겠다고 하기 싫어서 난 불교 신자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돌부처에 절을 하는 건 우상 숭배라면서 날 가지고 한 시간 내내 설교를 하잖아. 어찌나 신경질이 나던지 아직도 기분이 나빠.」

「성경은 배우고 싶은 사람만 배우면 안 돼?」

「글쎄 말야. 특활반처럼 만들어서 배우고 싶은 애들만 모아 놓고 하면 휠씬 분위기도 좋을 텐데, 뭐라는 줄 아니? 미션 스쿨에 들어온 것도 다 하나님 뜻이니까 성경을 공부해야 한 대. 그것도 은혜래.」

「하긴 내 친구 하나는 불교계 재단 학교에 들어갔어. 걘 천주교 신자야. 세례도 받았고. 그래도 불교 교리 배우는 시간에 앉아 있어야 하니까 괴롭지. 뭐.」

「내가 미션 스쿨에 들어간 게 어디 하나님 뜻이니? 컴퓨터 뜻이지. 옛날에야 지원해서 들어갔으니까 기독교인은 미션 스쿨 가고 불교 믿는 사람은 불교 학교 가면 되잖아. 그러면 교리 공부 하는 데 누가 불만 갖겠어? 지금은 내 뜻대로 가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교리 시간을 만들어서 앉혀 놓다니 말도 안 돼.」

정실은 우동 국물이 다 식는 것도 모르고 투덜거렸다.

봉구는 그 다음 일요일에는 새벽에 집을 나섰다. 지난 일요일에 은주네 아파트에서 관찰한 성과로 은주가 다니는 교회의 위치와 예배 시작 시간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시간을 맞추어 교회로 갔다.

중간쯤의 좌석에 은주와 은주 어머니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봉구는 여의도 광장에 5십만 명이 우글거려도 은주라면 금방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은주 어머니는 은주 손을 꼭 잡고 간절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고, 은주는 지루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봉구는 은주가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명당자리에 앉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은주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기도가 끝나고 찬송가를 부를 차례가 되어 은주가 고개를 들자 봉구의 옆모습이 보였다. 봉구는 은주가 자기를 본 것 같자 얼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주가 자기를 봐주길 기다렸지만 막상 은주가 쳐다보자 쑥스러웠던 것이다. 찬송가 1절 이 끝날 즈음 봉구가 은주 쪽을 슬쩍 보니까 은주가 봉구를 보고 웃고 있었다.

(오오 하나님!)

봉구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싶었다.

(하나님은 역시 착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구나.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은주 만세!! 만세, 만세!!!)

봉구는 벌떡 일어나 만세 삼창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은주어머니가 볼까 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찬송가가 끝나고 새벽 기도회는 막을 내렸다. 은주와 은주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걸 보며 봉구도 뒤따라 일어섰다. 은주는 봉구가 뒤따라오는 것을 알아채고 뒤를 얼른 돌아보더니 살짝 웃어 주었다. 봉구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은주 곁으로 갔다. 쓱 지나치는 척하면서 은주 손에 작은 쪽지를 쥐어 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은주는 어머니가 볼까 흠칫 놀라며 쪽지 받은 손을 꼭 다잡아 쥐고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골목길로 들어선 봉구는 담에 등을 기대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찌나 가슴이 뛰는지 첩보 영화 볼 때처럼 오줌이 다 마려웠다.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자 봉구는 자기에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 벌어졌는지를 실감하고는 가방 든 팔을 빙빙 돌렸다.

「이야호----.」

그때였다.

「어?」

가방이 손을 빠져 나가 위로 솟구치더니 어느 집 정원수에 걸려 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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