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15)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15)
  • 임정진
  • 승인 200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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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15. 가슴 두근거리는 청춘들



진수는 화실에서 끝나 화실 친구들과 함께 버스 정류장까지 나왔다. 비바람이 불어 사람들은 일찍 귀가했는지 길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진수가 타고 갈 버스만 오지 않았다. 진수는 별수없이 혼자 남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 부근에는 작은 만화가게와 오락실이 있어 늦은 시각인데도 아이들이 들락날락했다. 진수는 그쪽을 쳐다보다 버스가 오는지 확인을 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오락실에서 진수 또래의 여학생 네 명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진수 곁으로 몰려오는 것이었다.

「어머 미숙아, 오랜간만이다.」

「그래, 이게 두 달 만이지, 아마.」

「기집애, 그동안 더 예뻐졌다.」

「잠깐만 저기 가서 얘기하다 가자.」

「나----난 미숙이가 아냐.」

그러나 진수의 목소리는 낯선 네 명의 큰 목소리에 묻혀 버려 들리지도 않았다. 넷이 수선을 떨며 진수를 잡아 끌어당기는데 정류장에 있던 어른 서너 명은 친구들끼리 장난치는 줄 알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들 비바람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에 지쳤는지 버스가 안 온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한 아이가 우산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는 진수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진수는 무서움에 떨며 넷이 잡아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그들은 진수를 담에 붙여 세웠다.

「길게 말하기 싫으니까 돈 내놔.」

「나 돈 없어.」

진수는 겁에 질려 가방을 꽉 쥐고 조그맣게 말했다. 우산은 이미 빨간색 통바지를 입은 애에게 뺏겨 비를 맞고 서 있으려니 무서운데다 춥기까지 해서 턱이 달달 떨리는 것이었다.

「참, 너 이런 거 첨 당하냐, 왜 이래? 그냥 돈 내놔. 맞고 내놓으면 뭐가 좋아?」

「우리가 뒤져서 돈 나오면, 너 곱게 못 가, 알지?」

「보아하니 화실 다니나 본데, 돈 없이 화실 다닌다면 누가 믿니? 응? 돈 좀 있으니까 미술한다고 깝죽거리는 거지, 그렇지? 공주님.」

진수는 가방을 열고 엄마가 급할 때 택시 타라고 비상금으로 준 5천 원짜리를 꺼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5백 원짜리와 십 원짜리 여섯 개를 꺼냈다.

「돈은 이것뿐이야. 오늘 회수권 사서 돈 다 썼어.」

「그래? 그럼 어디 회수권 내놔 봐.」

진수는 지갑에서 회수권 일곱 장을 꺼냈다. 한 달치를 미리 사둔 것이었다.

「우린 착해서 유가증권도 받아. 자 이제 너 집에 가야지.」

영어가 잔뜩 쓰여진 티셔츠를 입은 애가 회수권을 뺏어 들더니 그중 낱장 한 장을 진수에게 도로 주었다.

「그 쟈켓 벗어, 그리구 시계 좀 보자. 시계 좀 좋은 거 차고 다녀. 이런 후진 전자시계 차지 말고.」

진수가 재킷을 벗어 주자 그들은 서로 자기에게 맞겠다며 실랑이를 벌였다. 진수의 우산을 가지고 있는 애가 진수에게 가라고 손짓을 했다.

「다음에 또 보자, 안녕.」

진수가 떨려서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는 걸 간신히 떼어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달렸다. 마침 진수가 탈 버스가 와 진수는 얼른 올라탔다. 버스에서 내리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아직 불어 가로수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들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졌다. 진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엄마> 하며 달려가 어머니에게 안겼다. 어머니는 진수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랐다.

「얘,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니?」

진수는 어머니에게 말도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어찌나 분한지 말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왔다. 어머니는 딸이 울기만 하자 난감해져서 일단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야! 바보같이 울지 말고 말해, 왜 그래?」

봉구가 다그치자 진수는 간신히 울음을 멈추고 얘기를 시작했다.

「여자 깡패한테 걸렸어. 돈 다 뺏기구 옷도 뺏기구 회수권도 한 달치 다 가져 갔어.」

봉구는 진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야, 그걸 가지고 이렇게 온 가족을 소집하구 난리야. 난 또 무슨 외계인이라도 만난 줄 알았네.」

「봉구야, 넌 오빠가 돼가지고 어떻게 그러니? 아니 여동생이 깡팰 만났다는데, 그게 깡패니? 강도지. 강돌 만났다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냐?」

어머니는 봉구를 나무랬다. 아버지는 잠자코 진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봉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요새 깡패한테 안 털리고 학교 다니는 애가 어딨어요? 난 두 번이나 당하고 맞기도 했는데, 맞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

봉구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는 걸 보며 어머니는 진수가 울 때보다 더욱 놀랐다.

「아니, 그런데 쟨 왜 집에 와서 그런 얘기 한 번도 안 해? 맞기까지 했다면서. 아니 그럼 깡패가 그렇게 많단 말이야?」

봉구 어머니가 흥분하자 아버지는 딸과 부인을 한꺼번에 위로해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진수는 맞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네, 봉구 말대로. 진수도 그만 씻고 자라. 운이 없는 날이었나 보다. 당신도 진수 자리나 얼른 깔아 줘. 놀란 애 붙들고 당신까지 흥분하면 어떡해?」 그리고 아버지는 안방으로 들어가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들어오자 아버지는 담담히 말했다.

「내일부터 내가 화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진수 태워 와야겠어. 어디 세상이 험해서 딸 키우겠어?」

「그러게 말예요. 아까 버스에서 내려 진수가 우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구요. 치한이라도 만났나 해서. 돈만 뺏겼으니 다행이지, 몸 건드렸으면... 휴, 십 년 감수했어요. 오늘.」

아버지와 어머니는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진수는 진수대로 분해서 잠을 못 자고 봉구는 은주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 하느라 잠을 못 잤다.



다음날 봉구는 소연을 데리고 롯데리아로 가는 데 성공했다. 이상한 건 은주에게는 말 붙이기가 그렇게 힘든데 소연이에게는 하나도 떨리지 않고 당당하게 무슨 말이든 술술 나온다는 것이었다.

봉구는 일주일치 용돈을 톡톡 털어 소연이 앞에 햄버거, 콜라, 아이스크림, 치킨, 감자튀김을 수북이 쌓아 주었다. 적을 공략하려면 우선 정보가 필요했다.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가 아니던가. 소연은 봉구가 느닷없이 데이트 신청을 하고 돈을 아끼지 않고 먹을 걸 잔뜩 사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자 기분이 좋았다.

「난... 니가 이렇게 나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몰랐어.」

「으응, 그... 그래, 자 많이 먹어. 또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하구.」

「그리고 교실에서는 네가 매일 선생님들한테 맞고 그래서 잘 몰랐는데 밖에서 만나니까 너 말도 잘하는구나.」

「내가? 고마워, 그렇게 봐줘서.」

「미팅해 보면 말 못하는 남자애가 제일 신경질나더라. 돈 없는 건 봐주겠는데 말 못 하면 정말 대책 없어. 돈은 내가 써도 되지만 여자가 대화의 주도권을 잡을 순 없잖아?」

「그럼, 그렇지.」

봉구는 계속 어정쩡하게 웃었다. 언제쯤 본론을 시작해야 할지 노리고 있으니 소연의 수다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난 요새 미팅은 안 해. 시간 낭비인 것 같아서. 소개팅 두 번 했는데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미팅보단 좀 낫지.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춰서 만나니까 말도 좀 통하고... 넌 소개팅 몇 번 해봤니?」

「나? 난 한 번도 안 해봤어. 괜히 여자애한테 돈만 쓰고 남는 것도 없잖아.」

「왜? 여러 종류의 여자애를 만나 보면 인간관계에 대한 안목이 넓어지잖아. 사회생활엔 그런 게 더 중요한 거 아니니? 미적분은 시험 보고 나면 빠이빠이지만.」

「근데 걔 말이야.」

봉구는 더 이상 뜸을 들일 인내심이 없었다. 소연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누구?」

「누구긴. 삐쩍 마른 네 짝꿍 말이지.」

「아, 은주, 은주가 왜?」

소연은 왜 봉구가 갑자기 은주 얘기를 꺼내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걔 참 이상하더라.」

소연은 봉구가 은주를 비난하려는 줄 알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이상해? 얼마나 좋은 앤데.」

「너한테 좋은지 몰라도 내가 보기엔 영 아니야. 여자가 매력이 있어야지. 맨날 책만 들여다보고 있고, 한마디로 밥맛이야, 밥맛.」

소연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면 나처럼 다방면에 소질을 가진 여자애가 좋다는 말이겠군.)

「그래? 하기야 남자들이 보면 그렇기도 할 거야.」

「근데 걘 집이 어디래?」

봉구는 애써 관심 없다는 듯 따분한 목소리로 은주의 집을 알아내려 했다.

「글쎄, 나도 가본 적은 없는데 얼핏 듣기로는 얼마 전에 압구정동의 무슨 아파트로 이사 갔다더라.」

「압구정동?」

봉구는 고개를 천천히 끄떡이더니 남자 친구에 대해서도 묻기로 결심했다.

「물론 사귀는 남자는 없겠지? 그런 공부벌레가...」

「그럼, 걘 공부밖에 몰라.」

봉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겠지... 근데 형제는 몇이래?」

소연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밥맛이라면서 왜 이렇게 가지가지 물어 보는 걸까?

「글쎄, 오빠가 하나 있는데 미국에 유학 가 있다나 봐. 박사 코스를 밟는대나.」

「역시 물이 좋은 집안이군. 엄마, 아빠는 다 계셔? 아빠는 뭐 하신대니?」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연은 봉구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모두 소연과 봉구를 쳐다봤다. 그제야 봉구는 자기의 질문이 서툴렀음을 알고 당황했다.

「아,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서...」

「그냥 궁금한데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 봐? 누굴 호구로 아니? 야, 내가 네 봉이니? 웃기고 있어.」

소연은 열이 뻗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 미안해 소연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몇 가지만 더 물어 보자.」

봉구는 한껏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으나 소연은 그런 봉구를 용서할 수 없었다.

「궁금한 게 그렇게 많으면 직접 가서 물어 봐. 이 등신아.」

소연은 먹고 있는 햄버거를 봉구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발을 쿵쿵 구르며 나가는 소연을 보고 봉구는 얼굴에 묻은 케첩을 닦을 생각도 않고 실망에 빠졌다.

(몇 가지만 더 물어 보면 되는데 그걸 못 참고 가다니...)



천재는 강 선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려 곧 심장질환이라도 걸리거나 순환기 장애라도 일으킬 지경이었다. 학교에서는 보는 눈이 많이 맘대로 양호실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다.

천재가 가끔씩 촬영해 보던 무비 카메라를 학교에 가져가기로 했다. 무비 카메라로 강 선생의 모습을 찍어서 두고두고 언제나 볼 수만 있다면 인생이 훨씬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자연스러운 강 선생의 모습을 담기 위해 천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양호실 주변을 맴돌았다. 출근하는 강 선생이 교문을 들어서며 선도부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웃는 표정, 현관에서 다른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양호실 창의 커튼을 열어 젖히는 모습, 무언가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는 모습 등 놓치지 않고 촬영해 나갔다. 천재는 자신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너무나 기특해 매일 밤 카메라를 껴안고 보고 머리맡에 모셔 두고 잠을 잤다.


밤마다 진수는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집에 오게 되어 본의 아니게 아버지와 하루에 20분씩이나마 꼭꼭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끔 질문을 던지고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아뇨. 재미없었어요.」

「왜?」

「우리 학교 바로 옆에 남자 중학교 하나 있걸랑요. 근데 오늘 그 학교에서 한 애가 죽었대요.」

「저런 어쩌다가.」

「4층에서 떨어졌어요. 자업자득이지요, 뭐」

「뭐가 자업자득이야?」

「자기 시험 점수 고치려고 새벽에 아무도 없을 때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려고 옥상에서 교무실 창문으로 홈통 붙들고 내려가다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넌 그 애가 불쌍하지도 않니?」

「글쎄요. 우리 반 애 한 열 명쯤은 울었어요. 걔가 불쌍하다고.」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아버지는요?」

「나도 그 애가 불쌍하다고 생각된다.」

「난 그렇게 생각이 안 돼요. 감정이 메말랐나 봐요. 미술 하는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니?」

「청소하다 떨어졌으면 불쌍하겠죠. 하지만 자기 시험지 성적 고치려고 몰래 들어가려 한 건 도둑질이나 마찬가지 아녜요? 도둑질하려다 죽은 건 자기 탓이잖아요.」

「그럴까?」

아버지는 집 근처 공터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진수 손을 잡아끌어 차에서 내리게 했다.

「아빠, 늦으면 엄마가 걱정하세요. 사고 난 줄 알고.」

「잠깐이면 된다. 나랑 별 구경 좀 하고 가자.」

아버지는 진수 손을 꼭 잡고 함께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밤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던 은하수는 먼지와 연기와 밝은 가로등에 밀려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붉은 기가 도는 초승달이 가로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곤 밝은 별 서너 개만이 밤하늘임을 느끼게 했다.

「밤하늘이 예전 같지 않구나.」

진수는 아버지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 별 본 지 정말 오랜만이에요. 밤에 다녀도 버스랑 쇼윈도의 불빛보고 다녔거든

요.」

「그래. 죽었다는 그 아이도 별을 보지 않았을 거다.」

진수는 잠자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에게 이런 로맨틱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아버지는 진수가 이렇게 냉담한 아이인 줄 몰랐었다. 별도 몇 개 없는 빈 하늘을 떠도는 죽은 아이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했다. 진수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밤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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