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
  • 임정진
  • 승인 2009.08.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8. 1등도 늘 행복한 건 아니다



봉구는 성적표를 가지고 집에 들어가 곧장 안방으로 돌진했다. 말없이 성적표를 내밀었다. 봉구 어머니는 긴장된 얼굴로 성적표를 펼쳐 보았다.

「아이구 내 팔자야, 하나밖에 없는 아들 놈이 저 모양이니 원 아이구...」

어머니는 그 길로 자리를 펴고 누워 버렸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어머니 곁에 봉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띵똥, 띵똥.」

봉구가 천천히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아버지였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엄마는?」

「안방에 누워 계셔요.」

「왜, 어디 아프시냐?」

「그런가 봐요.」

기운 없는 봉구의 대답을 듣고 아버지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 너 성적표 받아 온 날이구만.」

「예.」

봉구는 겸연쩍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라, 이 녀석아. 좀 잘하지 그랬냐?」

아버지는 봉구에게 꿀밤을 한 대 먹었다. 안방 문을 열면서 아버지는 봉구를 째려보았다.

「어이구, 오늘도 편안히 자기는 글렀나 부다!」

봉구는 아버지에게 몹시 미안했지만 사과할 틈도 없었다. 아마 아버지는 새벽 1,2시까지 어머니의 교육론과 입시 걱정에 대한 넋두리를 듣게 될 것이었다.


성적표와 함께 귀가하는 날은 누구나 우울하기 십상이다. 다른 학생들은 부러워하는 성적이지만 은주 역시 집에 들어가기가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소파에 마주앉은 은주와 은주 어머니 사이에는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은주는 어머니가 잠자코 성적표를 바라보는 동안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침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넌, 마치 현상유지만 하기로 작정한 아이 같구나.」

은주는 어머니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에 더욱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그 정도 수준의 학교에서 전체 석차가 6등밖에 안 된다는 건 문제가 아주 심각해.」

어머니는 성적표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는 더러운 벌레라도 만지듯 은주 쪽으로 휙 밀었다.

「나 오빠 공부할 때는 안 그랬는데, 너 하는 걸 보면 내가 불안해 죽겠어.」

「죄송해요.」

「죄송으로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표정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처럼 냉엄하기만 했다.

「너한테 한 가지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성적에 맞춰 대학 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 그건 나뿐 아니라 아빠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거다. 오로지 네가 가야 할 대학과 학과는 하나뿐이야.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지 못할 때는 난 너를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겠다.」

은주는 저도 모르게 손이 조금 움찟움찟하는 걸 느꼈다.

「이건 우리 집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기도 하지만 너의 행복한 장례를 위해서도 꼭 이뤄 내야 해. 알았어? 내 말?」

「네.」

은주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좋아. 네가 내 말을 깊이 명심했다면 다음 번 성적은 조금이라도 향상되겠지. 들어가서 공부해.」

은주는 천천히 일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은주 어머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은주 뒷모습을 보다 다시 성적표를 집어 들고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저만할 때는 유혹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 내가 조금만 방심했다간 금방 티가 날 거야. 반에서 1등이라고 칭찬이라도 해봐. 당장 해이해져서 딴 궁리부터 하고 자만심만 생기지. 아버지와 딸이 동문회에 척 나타나 봐. 둘 다 너무 멋있어 보일 거야.)

은주 어머니는 은주 한약이 다 달여졌나 보기 위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창수는 또 어머니를 도와 청소 작업을 해야 했다. 성적표 때문에 혼나는 일도 창수에게는 사치였다. 부모님도 말없이 도장만 찍어 줄 뿐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 잘하기를 기대한다는 게 부모로서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가 하고 느끼고 있었다. 다음 번 수업료를 낼 수 있을지도 걱정되는 판이었다. 수입이 준데다 아버지 약값도 만만치 않았다. 청소 리어카에 쓰레기를 잔뜩 싣고 비탈길을 내려오려면 온몸에서 식은땀이 버쩍버쩍 났다. 결국 아버지는 그 무게를 못 이겨 미끄러지다 그만 그 무거운 리어카에 깔리고 만 것이었다.

창수는 혹시라도 누가 자기를 알아볼까 봐 모자를 최대한으로 깊숙이 눌러썼다. 새벽과 방과 후에 어머니를 도와드려도 언제나 맡은 청소 구역을 다하지 못했다. 쓰레기는 넘쳐났고 리어카는 무겁기만 하고 구역은 넓기만 했다.

「창수야, 그만 하고 학교 가거라.」

「엄마, 힘드시죠?」

창수 어머니는 힘없이 웃었다.

「그동안 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겠냐. 혼자 이 일을 다 하셨으니... 난 장대 같은 아들이 도와주는데 뭐가 힘들어. 늦겠다. 어서 가봐. 그리고 자율학습도 해라. 다들 하는데 너만 빠져서야 쓰겠냐. 대학은 못 가더라도 지금 공부 안 하면 언제 하겠니.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놔.」

창수는 잠자코 쓰레기를 리어카에 부어 넣었다.



봉구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또 있을까 걱정되어 일찌감치 일어나 살금살금 집을 빠져 나왔다. 새벽이라 버스가 어찌나 쌩쌩 달리는지 생각보다 학교에 훨씬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교문엔 그 진드기 같은 선도부도 보이지 않았고 수위 아저씨 혼자 교문 앞을 쓸고 있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봉구는 힘차게 수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교문으로 들어섰다. 그런 봉구를 보고 수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공부 못하는 놈들만 새벽부터 모여 드니...」

봉구는 신나게 휘파람까지 불며 교실로 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보니 온통 내 세상 같기만 했다.

무심코 교실 문을 열던 봉구는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교실에 천재가 혼자 앉아 있었다.

「어이 천재, 집에서 쫓겨났냐?」

봉구가 다가오자 천재는 책상에 푹 엎드려 버렸다. 봉구는 천재 앞자리에 앉았다.

「임마, 왜그래? 너 어제 작살난 모양이구나.」

그래도 천재는 잠자코 있었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짜식, 그런 거 한두 번 당해 보냐? 뭐 그깐 거 가지고 울고 그래?」

천재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를 질렀다.

「임마, 내가 울긴 왜 울어?」

봉구가 보니 천재의 한쪽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찢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너... 부상당했구나. 뭘로 맞았냐?」

「무선 전화기.」

봉구는 천재의 어깨를 두들겼다.

「임마, 그건 약과야. 1학년 때 우리 반 애 하나는 집에서 담배 피다 들켜서 유리 재떨이가 그냥 날아왔어. 그래서 걔 이마에 흉 났어. 그래서 악착같이 앞머리 내리고 다니잖아. 선생님들도 하도 보기 흉하니까 머리 길러도 안 때리더라, 야. 재떨이에 비하면 그래도 무선 전화기는 얼마나 문화적이냐 그렇지?」

「놀구 있네. 폭력은 다 나쁜 거야.」

「그렇지만 또 우리가 맞을 짓도 하긴 하잖아.」

「뭐가 맞을 짓이야. 성적 좀 나쁜 게 맞을 짓이야? 내가 누굴 때렸니? 하다못해 강아지를 죽였니? 아니면 슈퍼에서 빵을 훔쳤니? 성적이 나쁜 게 그렇게 악질적인 행위니?」

「야, 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거지상 하고 있어야 좋을 게 하나 없어. 얼굴 펴. 그나저나 너 그거 치료 안 해도 돼냐?」

「치료? 이까짓 걸로... 아냐, 치료받아야 해.」

천재는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면서 뛰어나갔다. 봉구는 어리둥절해서 천재를 쳐다보다 참고서를 보며 은주에게 무얼 물어 보면 좋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천재는 양호실로 날쌔게 뛰어갔다.

그러나 양호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이 오시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우선 천재는 침대에 누웠다. 동정심을 더욱 유발하려면 침대에 누워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했다. 5분도 안 돼 천재는 잠이 들고 말았다.

강 선생은 출근하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쿨쿨 자는 폼을 보니 많이 아픈 것 같지는 않아 안심을 했지만 눈두덩이 시퍼렇게 부어 있어 얼른 약을 찾아 상처 부위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천재는 부드러운 촉감에 의해 잠에서 깼다. 천재가 눈을 깜빡이자 강 선생은 물었다.

「많이 아프겠다. 어쩌다 이렇게 됐어?」

천재는 동문서답을 했다.

「선생님, 결혼하셨어요?」

「아니.」

강 선생은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이 나이의 남자애들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천재의 입은 쭉 찢어졌다.

「히히, 안심했네.」

「응?」

「아녜요. 그냥 저 혼자 한 소리예요.」

「자 다 됐어.」

천재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은 살찐 사람이 좋아요, 마른 사람이 좋아요?」

「그건 왜?」

강 선생은 싱거운 질문을 하는 천재를 어떻게 내보내나 궁리하며 약품을 정리했다.

「그냥요.」

「글쎄, 비쩍 마른 사람보단 약간 통통한 사람이 좋지. 여유도 있어 보이고.」

천재는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만 가도 좋아요. 저녁에 자기 전에 얼음찜질하고 내일 다시 한 번 들러요.」

천재는 갑자기 인상을 쓰며 시트를 끌어당겼다.

「선생님, 저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은데 여기 좀 누웠다 가면 안 돼요?」

애써 애처롭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천재에게 차마 가랄 수가 없어 강 선생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고 말았다. 천재는 신이 나서 시트를 이빨로 꽉 물었다. 그리고는 시트를 코까지 덮어쓰고 누워 실눈을 뜬 채 강 선생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계속>








기사 뒷 이야기가 궁금하세요? 인터뷰365 편집실 블로그


관심가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