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6)
추억의 영상소설-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6)
  • 임정진
  • 승인 200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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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석 감독 이미연 주연의 80년대 히트작 / 임정진 작

이 영상소설은 1989년 개봉한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소설화한 것이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입시 현실에 찌들어 꿈을 잃어가는 80년대 십대들의 모습을 ‘자살’이라는 무거운 모티브로 극화해 개봉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황기성사단 제작, 김성홍 각본,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는 배우 이미연 김보성의 데뷔작이며 이덕화 최수지 등이 공연했다. 영화의 흥행 성공에 이어 출판된 영상소설은 수십만 부가 팔려 역시 화제를 모았다.

본지에서는 80년대 대형 히트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를 영화 스틸과 함께 격일 연재한다.-편집자


출연

이미연-이은주, 김보성(당시 이름 허석)-김봉구, 최수훈-안천재, 이덕화-박길호, 최수지-강선생, 전운-교장, 최주봉-담임, 정혜선-은주어머니, 이해룡-은주아버지


수상

제26회 백상예술대상(1990) 남녀 신인연기상(김보성, 이미연), 시나리오상(김성홍)




6. “이건 학교가 아니라 지옥이야”


다른 아이들이 다 나가 버린 교실에는 봉구와 천재뿐이었다. 유리창 밖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냥 엎드려서 잠을 자던 둘을 책가방을 챙겨 일단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둘 다 집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천재와 봉구는 아무 말도 없이 학교 뒷동산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라갔다. 잡목들로 엉성하게 꾸며진 뒷동산에는 그래도 군데군데 벤치가 있어 학생들이 시간 날 때마다 찾아와 앉곤 했다. 잡음이 약간 나는 스피커에서는 교내 방송국의 음악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교내 방송국은 아침, 점심, 저녁 3회 방송을 내보내는데 스피커가 달린 곳은 매점과 화장실, 뒷동산, 교실 등이지만 교실 스피커는 점심시간에만 켜게 되어 있었다. 결국 아침, 저녁 방송은 청취자도 없는 허공에 사라지고 마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도 방송반 아이들은 기를 쓰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봉구와 천재는 반쯤 부러져 나가 반쪽이라 불리는 벤치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그곳에서는 도서관이 잘 보였다. 도선관 안은 벌써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고개를 30도씩 수그린 수많은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천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학교가 아니라 지옥이다, 지옥.」

「쟤네들은 공부가 지겹지도 않은가?」

천재는 머리를 북북 긁으며 봉구를 쳐다보았다.

「쟤네들은 하고 싶어 하겠냐? 어쩔 수 없으니까 하는 거지.」

봉구는 잠자코 있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청춘을 하기 싫은 일에 몽땅 바치고 있는 아이들과 자신이 불쌍해졌다. 천재가 봉구에게 다시 물었다.

「너 몇 등이라고 그랬지?」

「쑥스럽게... 46등이다, 왜?」

「한심한 녀석.」

「뭐? 꼴찌하는 주제에 나보고 한심하다고?」

봉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천재는 그런 봉구를 비웃는 것이었다.

「히히, 어차피 대학 못 가는 건 마찬가지잖아. 거기다가 난 머리가 좋은데도 다른 애들 노는 꼴이 하도 같잖아서 일부러 안 한다치고, 넌 머리도 나쁜 놈이 한다고 해도 안 되니 얼마나 한심해?」

「뭐 임마?」

봉구는 천재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야, 야, 이거 놔. 성적 가지고 이러지 말자. 남들이 보면 웃겠다. 병신들끼리 꼴값한다고.」

봉구는 천재의 옷자락을 놓고 다시 기가 죽었다. 천재는 봉구의 눈치를 살피더니 딴 얘기를 꺼냈다.

「야, 근데 걔 말야, 걔 정말 매력 있데-----.」

「누구?」

「누군 누구야. 은주 말이지.」

「은주?」

봉구는 갑자기 천재 입에서 은주 얘기가 나오자 입 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그래. 은주는 얼굴도 이쁜 게 어쩜 그렇게 공부도 잘하냐? 남자 애들은 제끼고 전체 6등이라니, 재색을 겸비한 보기 드문 규수 아니냐? 내가 평소 그리던 여성상이야. 적어도 여잔 그 정도는 돼야지. 2세를 위해서도 말야.」

봉구는 괜히 심술이 나서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임마, 걔가 뭐 매력 있냐? 삐쩍 말라 가지고 눈만 황소눈깔처럼 뗑그런 게... 여잔 뭣보다 성적인 매력이 있어야 하는 건데, 걘 날샜어. 그리고 그렇게 너무 공불 잘하면 남자를 우습게 안다, 너. 여잔 약간 백치미가 있어야 귀여운 거야. 그래야 남자도 잘 섬기고.」

「아냐, 아냐. 은주는 정말 괜찮아. 내가 한번 대쉬해 볼까?」

천재가 일부러 진지한 척 말하자 봉구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안 돼!」

「이게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지랄이야. 놀래서 쌍방울 떨어질 뻔했어.」

「미, 미안하다...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친한 친구가 되지도 않을 일로 고민하는 게 보고 싶지 않거든...」

「...짜식...」

천재는 봉구의 심각해진 얼굴을 보며 비실비실 웃었다.

「천재야, 여기서 이렇게 궁상 떨지 말고 집에 가자. 어차피 맞을 매잖아.」

「그래도 일찍 들어갈 용기가 안 난다.」

「그럼 우리 집까지 걸어가자.」

둘은 가게들의 물건도 다 구경하고 지나가는 여자들에 대해 한 마디씩 품평회를 하며 집 근처까지 왔다. 그렇게 노닥거리며 걸어오니 이미 골목은 컴컴해져 있었다. 동네 입구에서 둘은 각자 가야 할 골목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봉구야, 난 오늘 들어가면 완전히 죽었다.」

천재는 손으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봉구는 피식 웃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 부모 자식간인데...」

「넌... 괜찮겠냐? 46등 가지고?」

「나? 난 뻔해. 아이구 내 팔자야,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저 모양이니 원, 아이구, 아이구...」

봉구의 능청스런 어머니 흉내에 천재는 웃으며 봉구와 헤어졌다.


성훈은 성적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옆반 영식이와 오락실을 찾아갔다. 참고서 값에서 삥땅해 둔 돈이 조금 있었고 아침에 아버지 호주머니에서 꺼낸 배춧잎도 한 장 있어 오랜만에 당당하게 오락실로 갔다. 영식은 여자가 옷을 벗는 포커 게임기에 앉았고, 성훈은 빠찡고 게임을 하기로 했다. 오락실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했고 다들 눈이 충혈 될 정도로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1시간 만에 성훈은 가진 돈을 다 게임기에 처넣고 말았다.

「야, 영식아. 돈 좀 꿔줘.」

「나도 다 털렸어. 저 여우 같은 기집애 때문에.」

영식이는 팬티만 입고 윙크를 하고 있는 화면 속의 여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영자야, 나 돈 생기면 또 올게, 다른 놈에게 벗어 주지 말거라.」

「웃기구 있네.」

영식과 성훈은 나란히 오락실을 나왔다. 오락실을 나서니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생소하기만 해 둘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고 가슴은 허전하기만 했다.


문도와 촉새는 더블 햄버거에다 콜라, 아이스크림, 감자튀김, 소세지 구이를 먹어 스태미너를 보충한 뒤 7시쯤 돼서 디스코텍으로 들어갔다. 디스코텍 입구에 있는 물품 보관소에 책가방을 맡겼다.

「촉새야, 여기 진짜 예쁜 애들 많이 오냐?」

「그렇다니까. 지금 좀 일러서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 봐. 원래 이태원은 10시쯤 돼야 복닥복닥하고 새벽 1시가 피크잖아. 피크.」

「아니 그럼 기집애들은 어디서 놀다 밤 10시나 돼서 오는거야. 일찍일찍 와서 놀지.」

「카페 같은 데 죽치고 앉아서 노인네들한테 술 좀 얻어먹다가 오나 봐. 요즘은 포장마차에 가서 놀다 오는 애도 많대.」

「아무튼 우리 신나게 놀자. 본전은 뽑아야지.」

문도는 웨이터가 가져 온 맥주를 촉새의 컵에 따라 주고 자기의 컵에도 따랐다.

「젠장, 요즘은 다 <칼스버그> 아니면 <레벤브로이>라 두 잔 따르면 끝이야.」

「문도야, 건배하자.」

「그래, 위하여!」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촉새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헤어 무스를 꺼냈다.

「너 먼저 바르고 와라.」

문도는 촉새가 준 무스를 가지고 화장실에 갔다. 무스를 뿜어 머리를 매만진 후 손을 씻으며 보니 옆에 콘돔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하나 사둘까?)

문도는 망설이다 그냥 나왔다. DJ는 로봇춤을 추면서 온갖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다.

「오~예 ! 젊은 오빠, 늙은 언니, 다 나오세요. 디스코도 좋아요, 지루박도 좋아요.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끼리 맴적으로 허망한 사람끼리 예술을 해요, 예술을 해요. 죽으면 썩어질 몸, 죽치고 앉은 젊은 오빠, 나중에 후회해요. 자 에브리바디 컴온.」

촉새와 문도는 낄낄대며 거울을 마주보면서 춤을 추었다. 신나게 한참 추다 자리로 돌아왔다.

목이 말라서 맥주를 한 병씩 마시고 잠시 앉아 땀을 식혔다. 대형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어찌나 우렁찬지 심장이 함께 쿵쿵 울려 댔다. 문도가 디스코텍을 한번 둘러보곤 3명의 여자애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발견했다.

「야, 촉새야, 재들 괜찮은데...」

「어디? 응~. 괜찮다.」

「웨이터한테 부탁할까?」

「문도, 너 미쳤니? 우리가 왜 설쳐. 돈 아깝게. 그냥 있으면 쟤들이 먼저 접근해 와. 술도 지들 돈으로 사주고. 기다려.」

「야. 새침하게 생겼는데, 그냥 기다리면 언제 블루스라도 춰보겠냐.」

「아, 글쎄 기다려 봐. 요즘 진짜 날라리는 내숭 떠느라 새침하게 앉아 있는단 말야. 아마추어들이 괜히 설치고 돌아다니지.」

「진짜냐?」

문도는 촉새의 충고대로 점잖게 앉아서 맥주만 마셨다. 여자애들 셋은 자기들끼리 무어라 속닥이더니 구중 하나가 문도네 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촉새야, 진짜 온다, 와.」

「가만있어. 내가 처리할게.」

까만 미니스커트에 흰 셔츠를 입은 깜찍한 여자애가 문도 앞에 서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문도는 귀를 잡아당기며 안들린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니까 미니스커트의 여자애는 문도 옆자리에 잽싸게 앉아 문도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랑 합치겠냐구.」

문도가 뭐라 말할까 하는 표정으로 촉새를 쳐다보자 촉새는 나머지 두 명의 여자애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두 여자애도 냉큼 문도네 테이블로 와 같이 앉았다. 웨이터가 얼른 여자애들의 컵과 먹다 남은 안주를 문도네 테이블로 가져다 주었다.


진수는 화실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바빠졌다. 체력장 연습이라도 한 날은 화실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달랑 앉아 몇 시간씩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렇게 심한 육체노동일 줄 몰랐었다. 미술반에서 아이들과 수다 떨면서 정물화나 인물화 그릴 때는 재미도 있고 그렇게 힘든 줄 몰랐었다. 그런데 화실에 오니 석고상 데생과 구성만 집중적으로 해서 지겨운데다 또 옆에서 그리는 아이가 예고 시험 때 경쟁자라 생각하니 긴장이 되어 수다도 떨 수가 없었다.

「진수야.」

「네, 선생님.」]

「너 물감 많이 남았니?」

「왜요?」

「좀 있다 새로 살 꺼지? 그땐 일제 사와라. 국산도 좋은데 아직 일제만 못해서 붓자국이 나고 색감이 떨어져. 혼합하면 더 그렇고. 어차피 시험 볼 때 좋은 물감으로 봐야 하는데 미리 적응이 안 되면 그때 자기 실력 안 나와.」

「네.」

진수는 일제 물감이 꽤 비쌀 텐데 생각하며 아그리파상을 노려보았다. 화실에 와보니까 진수의 그림 실력이라는 게 별로 두드러질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부잣집 애들이 많아 사사건건 기죽는 일도 많았다.

「선생님.」

진수는 조그맣게 화실 선생님을 불렀다. 화실은 미대를 나온 여자 선생님과 남자 선생님 둘이서 같이 경영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학생들은 두 선생님이 애인 사이인 줄 알고 있었는데 둘 다 따로따로 애인이 가끔 찾아오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풀게 되었다.

「왜?」

남자 선생님이 진수 곁으로 왔다.

「저, 의자 등받이 있는 걸로 바꾸면 안 돼요?」

「얘 좀 봐. 무식한 소리 하지 마. 데생할 때는 대학 교수라도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는 거야. 등받이에 기대 앉아면 자꾸 자세가 틀려져서 데생을 할 수가 없어. 스툴에 앉아야 등 똑바로 펴고 석고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거야. 알았어?」

진수는 별수 없이 더욱 허리를 꼿꼿이 펴고 연필을 잡았다. 데생을 하면서도 집에 가서 숙제할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만 했다. 화실 선생님도 담임 선생님도 그림 그린다고 학과 성적 떨어지면 다 날 샌다고 진수를 협박했다. 예고든 미대든 이제는 학과 성적 낮아서는 못 간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는 담임 선생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옛날에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실기 잘해서 대학 들어가곤 하기도 했지. 그런데 이제는 그게 말이 안 돼. 왜냐, 워낙 학생이 많거든. 실기 잘하는 애가 워낙 많아. 그만큼 경쟁이 세어졌으니 학과 점수가 조금만 낮아도 떨어질 수밖에.」

진수는 자꾸만 자신이 없어졌다. 기왕 예고 간다고 마음 먹었으니 끝까지 해보긴 해야겠는데 실기도 공부도 잘할 자신이 없었다. 공부만 하면 되던 시절이 그립기까지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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