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캐나다산 불곰. 래리워커
[MLB] 캐나다산 불곰. 래리워커
  • 소혁조
  • 승인 2007.12.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MLB 레젼드 / 소혁조


[인터뷰365 소혁조] 야구는 미국인들이 가장 즐기는 스포츠이지만 미국인만의 스포츠는 아니다. 1990년대부터는 박찬호, 노모를 필두로 하여 수많은 동양 선수들도 세계 야구의 본령인 MLB에서 활약하고 있고 중남미 선수들의 실력은 단연 세계 최강이다. 도미니카, 푸에리토리코, 파나마,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중남미의 히스패닉 선수를 제외한 백인, 그 백인 중에서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보면 캐나다가 있을 것이다. 캐나다는 추운 나라답게 아이스하키 같은 스포츠가 무척 활성화되어 있지만 미국과 접경인 이유로 야구 또한 그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스포츠이다. 그리고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래리 워커는 캐나다 출신 선수 중 가장 빛나는 활약을 선보인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


몬트리올에서 시작한 뜻하지 않았던 야구인생

래리 워커는 원래 고교시절부터 아이스하키 선수를 꿈꾸었다. 하지만 아이스하키엔 큰 재능을 보이지 못해 프로팀에 입단하지 못했고 고교를 졸업한 이후 야구 선수로 전업하게 된다. 처음부터 야구에 큰 열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야구 재능은 남달랐던지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마이너 리그에 입단하게 된다.


몬트리올에서 뛰던 마이너리그 시절엔 타고난 힘과 강견, 빠른 발로 좋은 성적을 냈고 큰 주목을 받았으나 부상을 당하는 등 곡절이 많았다. 때문에 빅리그 승격은 마이너리그에 입단 4년 만에 이루어지게 된다. 몬트리올에서의 본격적인 활약은 1990년부터였다. 많은 야구팬들이 래리 워커를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쿠어스필드 덕을 본 홈런타자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많지만 사실 그는 대단히 뛰어난 멀티플레이어였다. 호타준족에 완벽한 수비까지 갖추었고 특히 온몸을 내던지는 허슬플레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몸을 아끼지 않는 그의 허슬플레이와 무시무시한 힘으로 장타를 뻥뻥 날리는 모습을 보고 캐나다의 불곰, 백곰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1990년부터 1994년까지 활약하며 골든글러브와 실버슬러거 상도 수상하며 맹활약하였으나 전국적인 스타의 대열에 합류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우선 몬트리올이란 팀 자체가 캐나다에 속해있고 메이저리그 내의 마이너리그라 할 정도로 인기와 성적이 모두 좋지 못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4 시즌이 끝나고 워커는 그의 야구인생을 가장 빛내준 콜로라도 로키스에 새 둥지를 틀게 된다. 199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래리 워커의 본격적인 신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콜로라도에서의 성공신화

래리 워커는 토드 핼튼과 함께 콜로라도 록키스 프랜차이즈 사상 가장 훌륭한 타자로 꼽힌다. 우투 좌타인 워커는 같은 좌타자인 핼튼과 함께 쌍포를 이루며 1990년대에 가장 공포스러운 타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1995 시즌. 창단 3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콜로라도에 입단한 워커의 활약은 대단했다. 타율 0.306, 36홈런에 101 타점을 기록하며 팀 타선을 이끌었고 워커의 활약에 힘입은 로키스는 창단 3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오르기도 했다. 비록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게 디비전시리즈에서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패하긴 했지만 워커를 영입한 콜로라도와 워커 모두에게 빛나는 미래만이 보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로키스를 누르고 NLCS에 오른 브레이브스는 그 여세를 몰아 창단 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였고 1995년 이후엔 단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하고 있다.


워커는 2003 시즌까지 로키스에서 뛰었다. 로키스에서의 전성기는 대략 1997년부터 2001년까지 5년으로 보고 있는데 그가 로키스에서 얼마나 빛나는 활약을 했는지 그에 대한 기록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본다.


1997년 타격 2위. 1998-1999, 2001년 타격 1위. 2002년 타격 2위 / 1997, 1999년 출루율 2위, 장타율 1위, 실버슬러거상 수상 / 1997년 49홈런 1위


특히 1997년은 래리 워커의 야구인생에 가장 특별한 해였다. 1997년의 빛나는 기록만 살펴보자.


타율 0.336, 홈런 49, 타점 130, 안타 208(최다안타 2위), 출루율 0.452(1위), 실버슬러거 수상, 골든글러브 수상, 올스타 선정.


단일 시즌에 이 정도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선수는 역대 메이저리그 선수 중 몇 손가락 안에 든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그에게 1997년은 외계인 같은 활약을 보였고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그는 난생 처음 시즌 MVP를 수상하기에 이른다. 워커의 MVP 수상은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첫째로 1990년 이후에 MVP를 받은 선수 중 소속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경우는 워커가 유일하다. 시즌 MVP는 개인의 성적도 출중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가 얼마나 팀 성적에 큰 공헌을 했는가를 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1998시즌에 전 세계를 떠들석하게 만들며 홈런 신기록 돌풍을 일으킨 세인트루이스의 마크 맥과이어 대신 그의 라이벌이었던 새미 소사가 MVP 수상을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커가 MVP를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성적이 너무도 압도적이었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의 MVP 수상에 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역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캐나다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캐나다 선수는 숫적으로도 미국이나 히스패닉 계열의 선수들에 비해 열세인데 워커의 뛰어난 활약은 역사상 최초의 캐나다 출신 MVP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 참고로 캐나다 출신 MVP 두 번째 수상자는 2006년에 수상한 미네소타 트윈스의 저스틴 모어노이고 래리 워커 이후 9년만의 일이었다.


래리 워커의 로키스 시절은 그야말로 외계인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출중했다. 워커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타자 중 워커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기복없이 빼어난 성적을 거둔 선수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전설 토니 그윈 정도 밖엔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대단했다.


하지만 워커의 성적은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그가 타자들의 천국이며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였다는 점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워커와 함께 로키스의 핵 타선을 이끈 토드 헬튼도 저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워커의 개인성적을 산출했을 때 홈구장에서 거둔 성적과 원정경기에서 거둔 성적은 격차가 매우 크다. 심할 경우엔 타율이 무려 1할 8푼에 이르는 시즌도 있었다. 이와 같은 데이터를 분석했을 때 그가 홈구장 덕을 본 타자일 뿐이라는 상대적 폄하를 받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참고로 헬튼의 경우엔 홈구장과 원정경기의 성적의 편차가 크지 않다. 이런 이유로 헬튼과 워커를 동일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본다.

.

.

홍관조 군단의 일원이 된 백곰-우승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

워커는 2002년을 정점으로 하여 2003년부터 완만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 쳐도 3할은 거뜬히 넘을 것 같았던 그의 타율은 1996년 이후 처음으로 2할대로 추락했다. 언제나 부상으로 신음하였고 기복이 심했다. 더구나 원정경기와 홈구장에서의 편차 큰 성적은 언제나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나이도 많았다. 어느덧 37세의 은퇴를 앞둔 나이가 되었고 이제 그의 전성기는 끝났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였다. 그리고 로키스는 이때부터 워커를 트레이드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2003년을 기점으로 그의 시대는 완전히 끝난 것 같았다. 2004년에도 언제나 그를 괴롭히는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6월에 들어서야 게임에 출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4년 8월.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임박할 때 그는 드디어 세 번째 유니폼을 입게 된다. 2004시즌 양대 리그를 최강팀이었고 어느 팀보다 우승 가능성이 높았던 전통의 명문 세인트 루이스 카디널스로 옮기게 되었다.


시즌 막판에서야 겨우 합류할 수 있었지만 워커는 세인트루이스의 살인타선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앨버트 푸홀스, 스캇 롤렌, 짐 애드먼즈의 피할 수 없는 살인타선에 래리 워커까지 가세한 세인트 루이스는 모든 투수들의 악몽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11홈런을 기록하는 등 워커의 활약 역시 대단했다. 덕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난적 휴스턴을 꺾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고 워커 역시 난생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4-0으로 스윕당했지만 워커의 카디널스 합류는 큰 의미를 둘 수 있었다. 푸홀스와 롤렌, 애드먼즈(사실 푸홀스 하나만 있어도 일당백이지만)의 타선에 워커까지 가세한 것은 해도 너무한 타선이었다.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이 말도 안되는 타선을 구축하게 된 것이었다. 워커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로키스의 홈구장인 쿠어스필드를 벗어나면 별 것 아닌 타자,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논란을 불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야심차게 준비한 2005년. 하지만 부상과 많은 나이는 워커의 한계가 여기까지임을 말해주는 듯 했다. 또 다시 부상으로 한 달 간을 결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100경기에 출장하여 0.289의 타율과 15 홈런을 기록하였고 주전 우익수로 출장하였다. 팀의 주연은 아니었지만 워커의 알토란 같은 활약에 힘입어 카디널스는 2년 연속 NL 최고의 승률을 차지하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의 활약은 대단히 부진했다. 2005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한 워커는 포스트시즌에서 그의 야구인생에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휴스턴과의 NLCS 6차전 마지막 타석에서 삼진 아웃을 당하고 쓸쓸하게 물러났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선수의 모습치곤 너무도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


이 타석이 래리 워커에겐 그의 선수생활 마지막 타석이었기에 카디널스의 팬들은 비록 삼진을 당했으나 워커를 향해 기립박수를 치며 그를 열렬히 받아주었다. 난 그 장면에서 무척이나 감동했다. 아마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이라면 숱한 야유만을 퍼부었을 것이다.


난 그때 카디널스이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2005년엔 같은 중부지구의 라이벌인 휴스턴에게 무릎을 꿇고 물러나지만 2006시즌엔 새롭게 단장하는 뉴부시 스타디움에서 카디널스가 꼭 우승하길 바랬었다. 저 정도로 매너가 좋은 훌륭한 팬들에겐 응당 그만한 대가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래리 워커의 야구-넘치는 파이팅과 쇼맨십

래리 워커는 선수시절 내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가 입은 부상의 대부분은 그의 넘치는 파이팅과 쇼맨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성격은 다소 엉뚱한 면이 있었고 선수 생활 중 꽤 많은 일화를 남기며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1. 래리 워커를 잘 몰라도 이 사건을 이야기하면 모두 ‘아하!’ 하며 기억할 유명한 사건이 있다. 1997년 올스타전에서 그가 보여준 쇼맨십이었다. 당시 시애틀 소속으로 AL 투수로 마운드에 오른 랜디 존슨에 맞서 워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였다. 랜디 존슨이 던진 볼이 그만 엉뚱하게 워커의 머리를 향해 맹렬히 날아왔고 깜짝 놀란 워커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으나 보고 있는 이 모두의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존슨의 위험한 볼이 날아온 후 다음 투구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워커는 올스타전 역사에 남을 희극을 연출한다. 헬맷을 거꾸로 쓰고 왼쪽 타석이 아닌 오른쪽 타석에 섰던 것이었다. 당시 이 장면을 보며 많이도 웃었던 기억이 난다.



2. 래리 워커는 캐나다 출신답게 아이스하키에 지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꿈도 야구선수가 아닌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NHL 중계를 무척 즐겨봤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와의 중요한 일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경기는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나 워커에게 피를 말리는 것은 게임의 결과가 아니라 스탠리컵 결승을 곧 시작하는데 티비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게임은 승부가 나지 않아 연장으로 접어들 기미가 보이는 가운데 워커는 빨리 중계를 보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 승부를 결정짓는 홈런을 치고 말았다. 그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보다 그가 응원하는 아이스하키 팀이 결승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워커는 공격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수비 능력도 대단히 출중했다. 송구 능력에 있어선 당대 최고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게다가 매년 2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할 수 있는 빠른 발도 가졌다. 선천적으로 빠른 발은 아니었으나 대단히 빠른 두뇌회전으로 주루 플레이를 잘했다. 난 2005 NLCS 6차전 마지막 타석에서의 워커를 기억한다. 허무하게 삼진을 당하고 난 뒤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타석에 들어와 헬맷과 방망이를 정리하는 모습을 기억한다. 쓸쓸하게 보이는 뒷모습. 늘 넘치는 파이팅과 쇼맨십으로 팬들을 즐겁게 해준 빅스타의 모습치곤 너무 쓸쓸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무려 17년에 걸친 길고 긴 세월동안 그가 보여 준, 그와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모습은 단 한 순간뿐이었다. 그는 틀림없이 1990년대를 장식한 최고의 좌완 슬러거였고 언제나 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엉뚱한 짓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프로의식이 넘치는 선수로 기억될 뿐이다. 비록 단 하나의 우승반지도 없이 은퇴했지만, 그의 통산 성적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엔 부족하겠지만 많은 이들은 그를 훌륭한 선수로 기억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소혁조
소혁조
press@interview365.com
다른기사 보기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