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대표작이 없는 감독, 임권택
나는 아직 대표작이 없는 감독, 임권택
  • 김두호
  • 승인 200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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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길에서 만난 영화와 동행한 임권택의 일생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임권택 감독은 지금 막 부산에서 올라왔다. 동서대학교가 신설한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의 2008학년도 신입생 면접을 보고 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단과대학의 석좌교수로써 내년도 100명의 신입생을 뽑을 영화, 연기, 뮤지컬 학과의 면접을 보고 온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프랑스대사관으로 이동해야 한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 위해서다.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축구대표팀과 2002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은 미국의 데이비드 린치 감독등도 서훈을 받은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무훈을 세운 군인이나 문화, 종교, 학술, 체육 등 각 사회분야에서 공적을 이룬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으로 나폴레옹시대부터 이어져온 영예다. ‘취화선’으로 칸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그에게 프랑스 정부가 존경의 인사를 하는 것이다. 9살에 집을 떠나 100편의 작품을 만들며 충무로에서 평생을 보낸 그는 이제 여기까지 왔다. 임권택 감독, 그는 담배부터 한 대 꺼내 물었다.




담배 다시 피시네요?

응. 다시 펴요. 한 10년 끊었었는데 영화 <장군의 아들2> 끝내고 끊었다가...그 담에 2년쯤 있다 또 피다가. 뭐 그런거지요.


담배 끊으시니까 좀 외로우셨나봐요? 그전에는 아주 많이 피셨잖아요.

그랬죠. 옛날에 많이 필 땐 하루 너댓갑 피었는데 이젠 그렇게는 안피고...그리고 뭐 옆에서 담배 많이 피면 죽을때 괴롭다고 하도 떠들어 대니까 괜한 오기가 생겨서 내가 살면 얼마나 오래산다고 몸사리냐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하. 그럼 술도 많이 줄으셨나요?

사실 감독이 아니라 술꾼이었지요. 전에는 영화계에 친구들도 많았는데 요즘은 같이 놀 친구도 별로 없고. 술 마시면 분위기도 서로 띄우고 그래야 하는데 이젠 그런 것도 피곤하고 할 이야기도 없고... 그러니까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 않으니까 저절로 술이 줄어요. 그냥 집에서 잠 안오면 소주 반병 정도 마시고 자고 그러는 거지요.


그럼 요즘 일과는 어때요?
뭐 번잡스러운 일은 많은데, 그래도 내 중심은 아무래도 감독이니까.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이야기 하냐고 하지만 그냥 왜 <천년학>이 관객들에게 성과가 없었을까도 생각하고, 책도 읽고, 나를 정돈하는 시간들을 가지고 있어요. 글쎄, 관객이 안 든 영화는 늘 문제와 변명이 있는 법이지만... 우선은 젊은 관객들에게 영화가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았다는 게 제일 큰 이유일거고. 그래서 요즘이 근본적으로 내 영화에 대해 다시 뜯어서 생각하는 시간인거예요.


깐느영화제 감독상. 100편의 영화감독. 어느 누구도 ‘영화감독 임권택’의 업적과 그의 일생이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임권택이 ‘영화의 근본’ 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란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후배들이 마련한 <천년학> 헌정시사회에서 <시월애>를 만들었던 이현승감독이 ‘영화100편이란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숫자다.’라는 말을 했던데.

그렇지요.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 60년대에나 가능했던 일이예요. 그땐 다 엉터리들이었으니까. 60년대에만 한 50여편 찍었을 거예요. 거짓말로 하던 영화들을.


거짓말로 하는 영화라... 그때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많이 잊어버렸고 그리 좋은 기억은 없어요. 내가 영화를 시작하게 된 거부터 좀 설명을 할까요?


네.

난 시골(전남 장성)에서 컷기에 사실 어릴 땐 영화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충무로에 입문한거지요.


정창화감독 문하로죠?

그렇죠. 잔심부름이라도 하면 밥은 안 굶겠지 하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처음엔 연출부가 아니라 소품부 신부름부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쩐일인지 정감독님이 날 잘 보셨던지 그다음에 연출부 심부름도 시키고 그러시다가 연출부 되고, 조감독도 되고. 연출부를 하면서 감독이란게 참 멋진 거구나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는 내가 진짜 감독이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하하. 왜요? 사실 빨리 데뷔하셨잖아요. 데뷔작이 62년도 <두만강아 잘 있거라>죠?

개봉은 62년도 했지만 찍기는 61년도 다 찍었어요. ‘한흥영화사’라는 회사였는데 조감독을 하고 있을 때 연출제의를 받았지요. 요즘은 다큐멘타리나 단편영화처럼 감독이 되기전에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지만 사실 그때는 조감독이 재주를 보일 수 있는건 예고편뿐이었거든요.




예고편?

응. 그때는 조감독의 최고 프라이드는 영화 예고편을 만드는 거 였어요. 이게 유일한 연습의 기회지. 그런데 그 한흥영화사 사장이 내가 만든 예고편을 좋게 본거예요. 마음에 들었던지 ‘감독해보지 않을래?’ 하더라고요.


좋으셨겠네요.

아니, 전혀. 사실은 너무 고민이 되더라고요. 왜나면 난 원래 걱정이 좀 많은 사람인데다가 더럭 제의를 받으니까 ‘내가 감독으로 첫 작품을 실패하면 여기서 먹고 살지 못한다.’ 이런 생각이 제일먼저 들더라고요. 그나마 조감독만 하면 생활은 되는데 감독한다고 설쳤다가 영화 망하면 인생이 엉망진창이 될거 같고... 다행이 데뷔작이 잘되서10년간 50여편 찍게된거예요.


누구나 데뷔작이 중요하지만 역시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임권택 개인에게는 혁혁한 공로의 영화다. 그 영화덕분에 오늘의 임권택 감독이 있을 수 있었고 그 영화 덕분에 60년대 임권택 스스로 ‘말도 안된다’는 50여편의 영화작업이 시작되었으니까.


초반에 만드신 50여편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이세요?

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 영화사에서 책(시나리오)을 골라오면 현장에 고쳐가면서 찍었지요. 그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10년 정도를 매년 너댓개를 쉬지 않고 찍었어요. 몇 년전에 어느 평론가가 ‘기본기가 없으면 못 버텼을텐데’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맞어요. 그래서 당시에 대중소설 엄청나게 읽어가면서 그 독서량으로 버틴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표절을 했다는 말은 아니고요.


하하. 알아요. 찍고 버티신것도 그렇지만 감독님에게 계속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도 놀랍네요.

그건 운이에요. 임권택 영화가 이상하게 지방에서는 손해를 안 봤거든요. 그때는 지금처럼 투자자 돈으로 영화 만드는 때가 아니라 지방의 흥행사들 돈으로 제작할 땐데 나는 그 사람들한테 뭘 만들어도 적당히 흥행되는 무난한 감독이었어요. 그러니까 계속 기회를 얻었지요. 살아야 되니까 말도 안되는 책 가지고 찍어댄 거예요. 그렇지만 내 이름 달고 나가는 영화니까 조금이라도 낳은걸 내보내려고 하다보니 매 작품 고통의 연속이 되는 거고.



힘들고, 외롭고, 답답하고 그러셨겠어요.
그렇게 10년을 지나다보니 사실 영화에 대한 꿈이 다 없어졌지요. 기계처럼 찍고, 술마시고, 술깨면 또 찍고... 이렇게 단순한 흥행목적의 구라 영화만 찍다가 인생을 끝내야 하나 하는 절망감을 맛보고 희망이 전혀 없더라고요.

영화 말고 다른 걸 생각해 보진 않으셨구요?

생각을 안 해본건 아니고, 그리고 영화를 좋아해서 충무로에 들어온 것도 아니지만 하다보니 영화 자체는 나한테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문제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죠. 그러니까 술 먹고 취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지요. 그때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손을 떨어요. 그때가 영화감독으로써 나의 첫 번째 위기였을거에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었지요. 방향을 바꿔야 한다. 살아남으려면 어떤 영화를 해야하나...헐리우드 영화만큼 내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싶었는데 그건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본, 인력, 인프라 모두 채워져야 하니까 금방 터무니없는 생각이란걸 알았고 그렇다면 '한국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를 해야된다'라고 자각한거에요.


그 말씀은 ‘개념’에 가까운데 구체적인 선언이나 다짐같은 것은요?

거짓말부터 하지말자. 10년간 내 영화 50편은 다 생구라였다. 진실만 말하자. 솔직한 영화를 만들자가 구체적인 내 다짐이었지요. 이게 72년도예요. 그래서 나한봉 작가랑 <잡초>를 준비했지요. 그렇게 준비가 다 되었는데 이게 찍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난 이미 ‘흥행용 3류감독’으로 때가 묻어있는 거에요. 내가 ‘예술’하겠다니까 그 많은 충무로 제작자들 중에서 아무도 나한테 기회를 안주더라고요. 그때는 유신영화법 이전이라 누구던지 제작을 할 수 있었을 때였는데.

그럼 직접 제작을 하셨겠네요.

그랬죠. 내가 직접 지방업자들 만나서 제작비 끌어당기고 남들에게 빚져 가면서 만든게 <잡초>에요. 돈이 부족하니까 카메라를 2콤마로 개조해서(정상적 필름 1컷은 4콤마) 찍었죠. 그럼 5천자 가지고도 1만자 분량을 담을 수 있으니까. 내가 찍는덴 기술자니까 자신 있었지요. 그렇게 찍고 극장 붙일땐 다시 (4콤마로) 바꿔가면서. 하지만 정말 내용은 충실하게 찍었어요.


흥행은?

73년도에 일주일 개봉했는데 아무도 안보더라고요. 왕창 망했지.




저런.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이 <잡초>때문에 충무로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식이 바뀐 거에요. ‘어라? 저놈 진지한 영화도 찍을 줄 아네?’하면서. 그래서 <증언>이라는 영화를 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때 ‘유신영화법’이 시행이 된거죠. 영화사가 14개밖에 남지 않게되고. 그래서 사실 유신시절이 한국영화 최고의 암흑기라고 말하지만 나한테는 최고의 시절이 되어버린 거에요.

어째서요?

아시겠지만 그땐 ‘쿼터’란게 있었거든요.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안보기도 했지만 영화사가 14개밖에 없으니 어떤 외화를 가지고 들어와도 돈을 벌 때지요. 그런데 달러가 귀하니까 외화도 그냥 살 수 있던게 아니라 영화사마다 정부에서 외화를 살 수 있는 권리인 쿼터를 줬구요. 의무제작편수가 생겼고 대종상 작품상을 타거나 반공영화상을 타면 쿼터가 한 장씩 더 생기는 뭐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작자들이 다 이 ‘쿼터’에 혈안이 되어있지 한국영화에는 관심도 없어진 거에요. 단지 한국영화는 쿼터를 따기 위해 만드는 것 뿐이었지요. 아마 지금 돈으로 따지면 한편당 2억 정도로 영화한편씩 만들었을거에요. 대종상을 노리면 좀 더 쓰고.


쿼터를 위해 예술영화가 필요했겠네요.

바로 그거지요. 내가 예술을 선언하자마자 법이 그렇게 바뀌니까 일이 제법 들어왔어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하고 생각했지요. ‘구라체질’을 완전히 빼자 생각하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그 몸에 배인 게 하루아침에 빠지지는 않지. 한 7~8년 걸린거 같아요. 건전한 영화만 찍었지요. 그러니까 대종상도 가끔 타고, 반공영화상도 타고 하면서 그렇게 <깃발없는 기수>까지 간거에요. 그 기간동안 20편쯤 더 찍은거지요.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영화에 대한 고민은 해소가 되셨겠네요.

웬걸. 내가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니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니까 아무도 임권택 영화에 관심이 없고 봐주지를 않는거에요. <족보>나 <짝코>이런 영화들 흥행이 하나도 안 된 것들이에요. 맨 날 건조하기 짝이 없는 영화들만 만드니 사람들이 돈주고 볼 턱이 있겠어요? 또 고민에 빠진거야.


고민? 이러다가 감독으로 살아남기 어렵겠다?

그건 물론이고 잘 생각해보니까 내가 하고있는게 60년대와 다를바 없다는 걸 깨닳은 거지요. 그땐 흥행시키려고 아무 영화나 찍었고 어쩌면 지금은 쿼터 따려고 예술합네 하고 있는거니까. 이건 내가 솔직한 영화를 찍고 안 찍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매한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한 거에요. 감독으로써 두 번째 위기에 빠진거죠. <깃발없는 기수>이후에 1~2년간 이 문제와 씨름했는데 답은 간단했어요. ‘재미를 붙이지 못하면 죽겠구나’ 였지요. 그때 <만다라>가 나온 거에요. 재미와 건조함이 조합된.



제가 그 당시에 ‘임권택 <만다라>로 대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라는 기사를 썼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지요. 70여편 만에 처음으로 관객에게 ‘임권택 영화’가 어떤 것을 추구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거지요.


임권택감독은 자기 영화세계의 새 전환기를 이룬 작품을 <만다라>로 정의했다. 드디어 ‘임권택식 영화’가 어떤 것인지 방향이 설정된 것이다. 그 이후 임권택은 <인간의 수난사>를 자신의 화두로 삼는다. <티켓> 제작이 중단된 <비구니> <씨받이> <길소뜸>그리고 <아제아제바라아제> <개벽> 그리고 본의 아니게 <서편제>의 뒤로 순서가 밀리긴 했지만 <태백산맥>까지.


<만다라> 이후의 임권택감독 영화는 어떻게 구분하면 될까요? <씨받이>에서 한 콤마를 쉬어야 할까요? 아니면 <서편제>로 구분되어야 하나요?

음, 개인적으로는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것 같아요. 아무래도 <서편제>를 기준으로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전까지의 작품은 ‘개인의 수난사’로 보고 그 이후 영화는 ‘한국 문화의 발견’이라고 나누면 좋겠지요. 물론 <태백산맥>처럼 순서가 좀 엉킨 영화도 있지만.


그러게요. 저도 꼭 묻고 싶었던 거거든요. 감독님 필모를 쭉 보다보면 <태백산맥>의 위치가 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기분이 들거든요.

그럴 수 있을 거에요. 사실 <태백산맥>은 <서편제>보다 먼저 하려고 했던 영화에요. 그때가 어떤 상황이었냐 하면 내가 이태원사장(태흥영화사)하고 <장군의 아들>을 3편까지 끝낸 상태였지요. 사실 <장군의 아들>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는데 내가 60년대에 액션영화를 여러 편 했다는 것을 이태원사장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기획이 시작된 거예요.


3편 모두 흥행은 크게 성공하셨잖아요.

그랬지요. 그 3편으로 태흥영화사는 돈을 벌었지만 난 개인적으로 4~5년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었어요. 흥행이 잘 되었으니까. 이태원 사장인 다음엔 뭘 하고 싶냐고 묻길래 <태백산맥>을 하겠다고 했지요. 돈도 벌어줬겠다 홀가분하게 시작했는데 이 영화가 시나리오까지 나온 상태에서 ‘이념의 벽’에 부딪힌 거에요.


이념의 벽?

그땐 아직 노태우씨가 대통령 할 때거든요. 정권 마지막 해인가 그랬을거야. 시나리오를 보더니 정부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전화건 사람이 누구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가 아주 정중하게 ‘지금 찍으시겠다고 하시면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1년후에 정권 바뀌면 하십시오.’ 하더군요. 그 말이 맞는 말이었어요. 다음선거에선 DJ건 YS가 되건 둘 중 하나가 될 테니까.그래서 할 수 있어? 그냥 1년 기다려야 겠다가 된 거지요.




누가 뭐래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중 가장 앞자리에 두어야 할 영화가 바로 이 <서편제>다. 그 이전에도 <만다라>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같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서편제>야 말로 임권택 감독이 꿈꾸던 임권택 적 건조함과 재미가 만나는 차원을 넘어서 그를 ‘영화작가’의 반열로 끌어올린 작품이니까 말이다. 드디어 <서편제>에 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서편제>를 먼저 찍기로 하신건가요?

사실 <서편제>는 78년부터 하려고 했던 영화에요. 이청준씨의 연작인 <서편제><소리의 빛><선학동 나그네>3편을 읽고 그때까지만 해도 3개를 다 묶어서 하려고 했죠. 그때부터 이 <서편제>는 내가 찍고 싶을 때 언젠간 찍는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참 되려고 하니까 말야. <서편제>는 ‘오정해’ 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데 아까 <태백산맥>이야기를 했잖아요.


네.

<태백산맥>이 엎어지기 전에 연출부들이랑 여관에서 시나리오 작업할 땐데 내가 TV를 잘 안보는데 TV에서 <미스춘향선발대회>를 하는 걸 우연히 본거예요. 그때가 마지막으로 한 8명쯤 남았는데 오정해가 그중에 있는데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그래서 조감독이랑 연출부들한테 말했지요. ‘쟤가 몇 등을 하더라도 우리가 데려다가 태백산맥에서 ‘소화’로 쓰자. 당장 가서 데리고 와라.’ 그런데 오정해가 거기서 1등을 한 거에요. 그리고 몇 일 후에 만났더니 얘가 판소리를 하는 애더라고요. 우연이었지. 그리고 잠시 후에 <태백산맥>이 막힌거고요. 사실 그 앨(오정해)를 보고 <서편제>가 다시 떠오른 거에요. 그동안은 배우가 없다는 것도 서편제를 시작 못한 이유였는데 이젠 여배우도 생겼고 그리고 <개벽>할 때 만난 김명곤도 있고. 그 친구도 판소리를 정식으로 배운 친구였거든요.

[인터뷰이 나우] 부산국제영화제는 금년도 한국영화회고전의 인물로 임권택 감독을 선정했다. ‘한국영화의 개벽-거장 임권택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제18회 영화제 개막식을 앞둔 9월 23일부터 20일 동안 부산의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될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연출작품 총 101편 중 70여편이 선정됐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의 대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1981년 화천공사 제작, 황기성 기획, 안성기 주연의 <만다라>에서부터 베니스, 칸, 베를린,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 <취화선>과 흥행영화 <서편제> 등이 모두 상영된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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