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오브 뮤직> 막스 아저씨 기억나세요?
<사운드 오브 뮤직> 막스 아저씨 기억나세요?
  • 김세원
  • 승인 2007.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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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트랩 대령 일가가 가족 합창단을 구성하게 만든 장본인 / 김세원



[인터뷰356 김세원] 필자가 참석한 잘츠부르크 글로벌 세미나 세션의 명칭은 447 '유리 천장 부수기: 정계와 재계의 여성들'. 447은 447번째 세션이란 뜻이다. 정계와 재계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나고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데도 이들의 존재와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왔다. 날로 증가하고 있는, 정계와 재계의 고위직에서 활동 중인 여성들의 위치와 리더쉽, 이들의 영향력을 분석하고 세계의 여성지도자와 학자들이 국경과 종교,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여 연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세미나 제목부터가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철폐하자는 내용이어서 그런지 초청강사 11명과 세계 19개국에서 온 20여 명의 참석자 중 남성 참석자는 단 두 명이었다. 공식 참석자는 아니지만 초청강사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들이 배우자 자격으로 따라와 세미나장 뒷부분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은 아마도 이 세션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으리라. 세션 의장을 맡은 세계 여성 지도자 의회의 공동창립자이자 골드만 삭스의 글로벌리더쉽 담당 전무 출신인 로라 리스우드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세미나를 이끌었다. 아프리카 가나의 식품회사인 아그로푸드사의 사장이자 국회의원 출신인 한나 테트, 캘리포티아에 본부를 둔 여성 기금모금 네트워크의 대표인 크리스틴 그럼, 워킹 패밀리를 위한 기업의 소리 대표 도나 클라인, 페루 국회의원인 안나 타운센트의 강연은 21세기 리더쉽의 첫째가는 덕목으로 꼽히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일주일간의 세미나는 오전 9시에 시작돼 저녁 식사 후까지 계속될 정도로 일정이 빡빡했다. 오전에는 전체가 모여 초청 강사의 강연을 듣고 토론하고 오후에는 네 개의 워킹그룹으로 나뉘어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어디에 있기를 원하는가?' 등을 주제로 토론하고 의견을 정리하여 마지막 날 그룹별 발표 시간을 가졌다. 같은 이슬람이면서도 오만,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등 중동에서 온 참석자들은 히잡을 쓰고 있는 반면 평상복 차림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출신 참석자들은 일부다처제 등 이슬람의 풍습에 대한 서방의 비판은 코란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을 일반화시킨 일종의 편견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석자들은 정치제도나 역사와 전통, 문화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의회 진출을 보장하는 쿼터제와 각자의 근무시간과 일터를 사정과 형편에 맞춰 조절할 수 있는 재택근무제, 출근시간 가변제 등이 여성의 사회 진출에 필수불가결 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또 여성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여성끼리의 연대와 협력도 중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마지막 날 모든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본국에 귀국한 뒤 세미나에서 느낀 점을 바탕으로 양성평등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밝히는 액션 플랜 발표 시간도 인상적이었다. 유일한 남성참가자인 케이트 헤린 미국 테네시주 터스털럼대 디자인과 교수는 "막 아빠가 된 남성들을 주요 대상으로 양성평등이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리겠다"고 밝혀 많은 박수를 받았다.


잘츠부르크 글로벌세미나는 1947년 초 어느 겨울날 뉴욕의 지하철 안에서 탄생하였다. 하바드대 대학원생이었던 클레멘스 헬러는 2차대전 중 미국으로 망명한 막스 라인하르트의 부인인 헬렌 티니히와 만나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레오폴드스크론 성의 소유주이자 세계적인 음악축제로 명성이 높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공동창설자였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트랩 대령 일가가 가족 합창단을 구성해 마을음악제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망명을 돕는 막스 아저씨가 바로 이 사람이다. 예술을 사랑했던 그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예술세미나를 정기적으로 열기도 했다. 빈의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라인하르트의 예술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는 헬러는 6년간의 세계대전으로 중단된 유럽 지성인들의 교류 모임을 재개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난 지 1년여가 되는 유럽은 아직도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연합국은 분열돼 그해 윈스턴 처칠이 경고한 것처럼 동유럽에는 거대한 '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수록 전후 유럽의 젊은이들에게는 잠시나마 고달픈 일상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토론하며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미래를 설계하는 기회가 필요하다는 것이 헬러의 생각이었다. 하버드대 선후배인 리처드 캠벨과 스코트 엘레지가 그의 구상에 동참했다. 세 명의 젊은이는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전후 유럽의 젊은 세대에게 소개하는 세미나를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버드대 총장을 찾아가 재정 지원을 부탁했으나 실현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일거에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버드대 학생회가 모금한 현금 2000달러와 4000달러 상당의 식품을 지원하기로 하고 제네바의 국제 학생 서비스가 안전 수송 문제를 책임지기로 하면서 이들의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다. 남편과 사별한 티니히는 헬러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레오폴드스크론성을 제공하기로 했다. 잘츠부르크 미국 연구 세미나로 명칭을 정하고 헬러는 초청 강사진 섭외에 들어갔다.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 후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바실리 레온티예프, 역사학자 마이에센 등 쟁쟁한 교수들이 강사진에 합류했다.


1947년 7월 마침내 6주의 일정으로 첫 번째 세미나(당시 명칭은 여름학교)가 열렸다. 게슈타포의 혹독한 심문을 받은 덴마크인,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던 체코인, 멕시코로 망명했던 스페인인, 나치당원으로 연합군의 전쟁포로가 되었던 오스트리아인, 부모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사망했고 자신도 시체더미 속에서 3일 만에 구조된 루마니아 국적의 유태인 등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참석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와 허먼 멜빌의 '모비딕' 같은 소설을 읽고 토론하거나 식습관, 잠자는습관 등 인간행동을 분석하는 마가렛미드의 문화인류학 강의를 들으며 전쟁의 기억을 지워나갔다. 처음에는 미국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갖고 있던 유럽의 참석자들도 미군사령부 관계자 앞에서 거침없이 미국 정부와 정책을 비판하는 미국 측 참가자들을 보며 민주주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했다. 오스트리아 주둔 미군사령부는 1948년 두 번째 세미나의 개최를 허락했다. 이렇게 세 젊은이의 벤처 활동으로 시작된 잘츠부르크글로벌세미나는 프리만 재단, 일본재단, 록펠러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 학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일주일간 글로벌이슈를 논하는 국제적인 사랑방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사 뒷 이야기와 제보 - 인터뷰365 편집실 (http://blog.naver.com/interview365)

김세원

동아일보 기사, 파리특파원, 고려대학교 정보통신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현 카톡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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