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는 장윤정이 아닌 주현미의 노래였다?
<어머나>는 장윤정이 아닌 주현미의 노래였다?
  • 석광인
  • 승인 200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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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 여왕이 된 약사 / 석광인


[인터뷰365 석광인]
주현미(46)는 지난 1984년 혜성처럼 등장해 10여년간 국내 트로트 가요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던 가수였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신세대 여가수 장윤정을 능가하는 인기였다. 주현미를 잘 모르는 젊은 팬들에겐 ‘1980년대의 장윤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빠를 정도로 요즘에는 활동이 뜸한 편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장윤정이 있다면 1960년대에는 이미자가 있었고 1980년대에는 주현미가 있었다 할 정도로 주현미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를 대표할만한 걸출한 스타였다. 주현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스타였지만 다른 가수들과는 아주 다른 특이한 데뷔 과정을 거쳐 스타덤에 올랐다. 가요 메들리의 대히트를 거쳐 스타가 되는 변칙적인 데뷔 과정을 밟았기 때문이다. 1984년 2월 중앙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한 주현미는 그해 4월 서울 필동에서 한울약국이라는 약국을 개업해 운영하는 약사였다. 그녀는 약국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가수 데뷔를 위해 여러 음반회사들에 자신의 음반 취입을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회사가 별로 없었다.


한의사이자 중국인이었던 아버지 주금부씨와 한국인 어머니 정옥선씨 사이의 2남2녀중 장녀로 태어난 주현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MBC TV 주최의 ‘이미자 모창대회’에 나가 1등상을 탄 경력이 있다. 이후 ‘꿈꾸는 백마강’의 가수 겸 작곡가 이인권씨에게 사사를 받아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취입을 해 자신의 음반을 내본 경험도 있었다. 또 대학시절에는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그룹 <인삼뿌리 2기>의 멤버로 MBC 강변가요제에 출전,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가창력을 인정받은 셈이었지만 나이와 외모를 따지는 음반사들의 관행 때문인지 주현미에게 관심을 보이는 음반회사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약국까지 개업한 주현미로서도 가수 데뷔를 서둘 이유가 별로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1984년 가을 주현미의 가창력을 인정하는 음반회사가 나타났다. 바로 오아시스레코드사였다. 이 회사의 문예부 직원이었던 작곡가 박성훈씨가 그녀를 회사로 와보라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은 약사가 되어 나타난 주현미를 단번에 알아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중학생 때 음반을 내준 회사의 사장님이었기 때문이다. 손 사장은 주현미가 어릴 때부터 “너는 4분의 1만 중국인이고 4분의 3은 한국인”이라고 농담 삼아 말씀하던 분이었다. 부계는 중국계였지만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사실까지 꿰고 있었으니 그녀의 남다른 가창력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전속계약을 하고 데뷔 앨범의 준비에 들어갔다.

얼마 후 오아시스레코드사의 문예부장이었던 작곡가 박성규씨의 연락이 왔다. 선배 여가수 조미미씨의 메들리음반 취입이 있는데 경험삼아 참관해달라는 전갈이었다. 박성규씨는 나훈아의 히트곡 ‘해변의 여인’과 ‘애정이 꽃피는 시절’ 등을 만든 작곡가였다. 박성규씨를 따라 천호동에 있는 작곡가 김준규씨의 녹음실에 간 주현미는 선배가수 조미미씨가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되어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박성규씨가 전화를 하니 약속한 취입료를 가져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박성규씨가 수금이 되질 않아 돈이 없으니 먼저 취입을 하면 빠른 시일 내 지불할 것이라고 그녀를 설득했지만 조미미씨는 돈이 마련되면 노래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박성규씨는 꿩 대신 닭이라고 조미미씨의 취입을 위해 가져간 반주 테입을 틀어놓고 주현미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스튜디오는 이미 대관해놓은 상태였으니 연습 삼아 주현미의 취입을 시작했다.


주현미는 가수 겸 작곡가 한복남씨의 히트곡 ‘엽전 열 닷냥’을 비롯해 ‘짝사랑’, ‘한많은 대동강’, ‘전선야곡’,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21개의 가요계 명곡들을 단숨에 불러제쳤다. 평소 즐겨 부르던 노래들인데다 박성규씨와 콘솔을 잡고 있던 김준규씨는 연신 노래를 잘한다며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NG도 별로 나지 않고 흠잡을 데 없었으니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녹음이 끝났다. 그러나 박성규씨로서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조미미씨의 취입이 무산됐으니 ‘무능한 문예부장’이라는 손진석 사장의 불같은 질책을 들을 걸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김준규씨는 술이나 한잔 하고 가라며 소주를 꺼내 함께 마시며 박성규씨를 위로했다. 소주를 마시며 나타나지 않은 조미미씨를 원망하는 박성규씨에게 김준규씨가 갑자기 묘한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손 사장에게 갚을 외상값도 있고 신세도 많이 졌으니 취입료를 받지 않고 자신이 취입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은하의 ‘님마중’ 등을 작곡한 김준규씨는 원래 가수 출신이었다. 한국 최초의 민방이었던 부산MBC의 전속가수 출신이었던 것. 그는 부업으로 레코드가게를 운영하느라 오아시스레코드사로부터 많은 양의 음반들을 가져다 판매하고 있었는데 결제할 외상값이 많이 밀린 상태였다. 박성규씨로선 그 같은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방금 주현미가 취입을 끝낸 반주음악 테입을 다시 틀어놓고 김준규씨의 녹음이 시작됐다. 저음에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인 김준규씨의 녹음도 일사천리로 끝났다. 다음날 박성규씨는 주현미와 김준규씨의 메들리 테입을 들고 출근을 했다. 조미미씨의 취입이 무산됐다는 보고에 손진석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대신 주현미와 김준규씨의 취입을 해왔다니 그나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박성규씨는 급한 업무를 처리하기 무섭게 편집실에 틀어박혀 주현미와 김준규씨의 테입을 모니터하던 중 묘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듀엣으로 노래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 그는 두 사람이 취입한 마스터 테입을 복사해 복사본에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녹음 테입의 세밀한 가위 편집에 남다른 솜씨를 지니고 있던 박성규씨의 편집은 반나절 이상 계속됐다. 한 소절은 주현미가 노래하고 다음 소절은 김준규씨가 받아 노래하는 형식으로 가위로 두 테입을 잘라 다시 붙이는 작업을 한 것이다. 편집실을 둘러보던 손진석 사장은 박성규씨가 가위 편집을 한 테입을 들어보더니 좋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선 난리법석이 일어났다. 김준규씨와 주현미가 함께 노래한 메들리 테입의 제목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 직원들에게 아이디어 공모를 하기 무섭게 LP와 카세트 테입의 생산준비에 들어간 것.


1984년 12월 어느날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선 세 종류의 메들리 음반이 나왔다. ‘김준규와 주현미의 쌍쌍파티’, ‘김준규의 리듬파티’, ‘주현미의 리듬파티’의 3종이 바로 그것. ‘쌍쌍파티’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인 것이었다. 출고하기 무섭게 불티나게 팔렸고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재 주문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음반시장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난 것은 무엇보다 음반의 수록곡 덕택이었다. 당시 메들리음반 시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복남씨 작곡의 곡들이 대거 수록됐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레코드사는 몇해 전 한복남씨의 유가족들로부터 그의 음반 판권은 물론 저작권까지 구입해놓고 다른 음반사들이 메들리 음반을 취입하거나 리메이크를 하지 못하도록 몇 년동안 관리를 하다가 처음으로 조미미씨에게 메들리를 취입하도록 은밀하게 준비를 했던 것. 그러나 아무리 좋은 레퍼터리라고 하더라도 한계는 있는 법. 박성규씨가 편집해 붙여놓은 주현미의 신선한 음색과 김준규씨의 허스키 보이스가 이루는 절묘한 앙상블이 아니었다면 그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쌍쌍파티 열풍’은 1985년이 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청계천뿐만 아니라 전국의 도매상들이 트럭을 몰고 와 서로 많은 양의 음반을 확보하려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쌍쌍파티’는 물론 ‘주현미의 리듬파티’와 ‘김준규의 리듬파티’ 역시 불티나게 팔렸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이 3종의 음반으로 만족하고 있을 회사가 아니었다. ‘쌍쌍파티’의 후속 시리즈의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쌍쌍파티’의 2집, 3집, 4집, 5집을 연달아 제작해 출반한 것. ‘쌍쌍파티’ 시리즈와 함께 두 사람의 ‘리듬파티’ 시리즈가 함께 출반돼 3장의 베스트셀러가 삽시간에 15종으로 늘어났다.


오아시스레코드사는 당시 이 음반들의 정확한 판매량을 밝히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집계할 틈도 없이 많은 종류가 한꺼번에 발매돼 오랫동안 폭발적으로 팔려 정확한 판매량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쌍쌍파티 시리즈’의 판매량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2천만장 이상 팔렸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특히 ‘쌍쌍파티 1집’의 경우 하도 많이 들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아 새로 구입하는 팬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요즘에도 간혹 택시를 타면 문제의 테입을 틀고 다니는 기사가 있을 정도로 울트라 슈퍼 베스트셀러였다.


‘쌍쌍파티’와 ‘리듬파티’ 시리즈의 폭발적인 반응과 계속되는 이 시리즈의 녹음 때문에 주현미의 데뷔 앨범 ‘비 내리는 영동교’는 1985년 4월에야 출반됐다. 김준규와 주현미의 ‘쌍쌍파티’ 시리즈는 모두 12집까지 출반됐다. 이 음반 시리즈의 1집에서 5집까지는 최근에도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꼽히고 있다. 주현미는 ‘쌍쌍파티’ 시리즈와 ‘비 내리는 영동교’가 히트하며 하루 아침에 가요계의 신데렐라가 되었지만 자신의 한울약국을 계속 경영하다가 학교 후배에게 넘길 때까지 자신이 스타가 된 현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이후 주현미는 승승장구해 최고의 트로트 여가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된다고 누가 말했던가. 선배 여가수 조미미씨의 거절로 ‘쌍쌍파티’의 주인이 되었던 그녀 자신이 조건을 걸며 취입을 거절하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슈퍼스타의 등장을 돕는 계기가 되었으니….


‘어머나’를 만든 작곡가 윤명선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원래 이 곡을 일본에서 활동중인 계은숙을 위해 만들었지만 거절을 당했고 이어서 주현미에게 제공했으나 노래의 제목을 바꿔주면 부르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는 바람에 취입이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 노래는 몇 사람을 거쳐 신인 장윤정에게 넘어갔고 장윤정은 이 노래 단 한곡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니 세상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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