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김종원과의 대담
영화평론가 김종원과의 대담
  • 유지형
  • 승인 200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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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의 연재를 끝내고 / 유지형



[인터뷰365 유지형] 2월 27일부터 총 45회로 연재된 소설 <조선최초의 여배우 李月華>가 장장 3개월의 연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라는 부제로 조선최초의 은막의 여배우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 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 속에 그 주역들의 인물을 그려 냈다.

조선최초의 영화감독 윤백남을 비롯하여 조선영화의 기린아 나운규까지 그리고 당시의 연극계와 영화계, 문화계의 인물들의 총 200여명이나 등장하여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기록을 역사와 픽션을 가미하여 흥미 있는 한편의 대장정의 스토리를 역어낸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실명소설이고 시대소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소설이라는 의미에서는 이 소설 역시 실제와 픽션의 한계에 대한 문제점들의 논의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그런 점들에 대해서 한국영화의 산증인이시며 영화평론의 대가이신 김종원 선생님과 작가와의 대담을 통해 이 소설의 미진한 점과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작가 유지형 감독과 영화평론가 김종원 선생님이 만난 곳은 연재가 막 끝난 4월 30일 오후 약수동의 한 영화사 사무실이었다.



유지형 /(이하 ‘유’) : 선생님 바쁘신 와중에 이곳까지 오시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늘 한국영화를 위하여 고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열정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도 무척이나 바쁘시지요.


김종원 /(이하 ‘김’) : 나와 함께 1960년대부터 영화평론의 길을 걸으셨던 1세대 평론가들을 비롯하여 당대에 활동하던 많은 동료들이 이제는 거의 작고하고 몇몇 분이 남지 않는 요즘에 주로 나에게 한국영화의 옛이야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럴 때면 아! 나도 늙었구나! 하는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누군가가 해야 할이라는 사명감에 여기 저기 불려가 강의를 하느라 바쁜 나날들을 보냅니다. 오늘도 4시에 강의가 있습니다만.


유 : 정말 대단하시네요. 제가 선생님을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뉴스를 통해 많은 한국영화의 행사에 꼭 빠지지 않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다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이라 생각 합니다.


김 : 작년 김기영 감독님 10주기 행사에서 우리가 서로 만났지요. 유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인터뷰 집을 발간하여 독자에게 증정하는 사인회 행사를 했는데 천국에서 김기영 감독이 보았다면 참으로 좋아 했을 거예요. 유감독은 이런 저런 영화에 대한 글을 열심히 쓰는 영화인으로 아주 보기가 좋았어요.


유 : 영화인은 영화현장을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죄송합니다. 워낙 영화계라는 곳이 민감한 곳이 되어서 젊은 사람들을 선호하다보니 자연적으로 퇴출영화인이 되었네요. 어떻게든 영화현장으로 복귀하려는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김 : 그래도 열심히 영화에 대한 애정으로 영화에 대한 글들을 쓰지 않습니까? 이번 소설도 그런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보는데 아주 수고가 많았어요. 나도 한 회 한회 빠짐없이 소설을 읽어보고 중요한 대목은 복사도 해 놓았습니다.


유 : 소설을 떠나 선생님이 보시기에 모자라는 점이 많지요. 좀 더 자료를 찾고 조언을 들었어야 하는데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미로 제가 너무 고증과 역사에 등한시 한 점이 맘에 걸리네요. 그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김 : 그래요.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이 소설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좋겠네요. 어차피 실명소설이고 초창기 한국영화사의 일면을 기록하는 논픽션의 형식을 띈 소설로 그 행간을 이어주는 부분이 많이 부족한 것 같네요. 먼저 이월화의 출생연도예요. 작가는 1903년이라고 했는데 1905년이 정확합니다. 당시 동아일보와 매일신문의 기록이 그렇고요. 이월화가 죽은 해가 1933년이니까 만 나이로 29세, 우리 나이로 30세에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월화와 절친했던 이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복혜숙 씨는 자신과 동갑인 1904년이라고 증언 했습니다만 박진 씨의 한국연극사에서 말한 1905년이 정확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 합니다.


유 : 이월화의 출생설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 합니다.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느니 모친이 계모라는 등, 어려서 양녀로 어느 집에 들어갔다는 등, 혼란스러운데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 :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어느 시대나 스타에게는 사실이 아닌 진실 같은 이야기들이 늘 화제를 낳고는 합니다. 이월화 역시도 마찬가지인데요. 여러 가지 설이 대두됩니다만 참고로 당시 동아일보 기사 (1925년 8월 25일)입니다.

“그의 본명은 본시 뎡숙(貞淑)으로 창성동 이십구 번지 다 쓸어져가는 오막살이 단칸집에서 편모슬하에 구차한 살림을 하였다가..(중략).. 그는 본래 충청도태생으로 무남독녀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에 서울에서 그 부친을 여의고 그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길리어져..”

이 기사 내용처럼 충청도 예산이 고향이라는 설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성동은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잠시 살던 곳입니다. 후에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립정동의 호화주택에도 살고 이춘래를 만나 수원에도 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 : 소설의 도입부에 이정숙(월화)과 윤백남의 만남부분입니다. 소설은 이 만남을 운명적이고 필연적으로 묘사했습니다만 작가로써 굳이 변명한다면 소설이 갖는 서사구조 때문이겠지요.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해서 다른 의견이 있으신지요.


김 : 이월화가 처음 연극을 한 곳은 극단 ‘여명’이 맞습니다. 부산이라는 지명도 정확하고요. 그러나 1916년부터 1919년 까지 존속했던 김도산이 운영하는 ‘신극좌’에서 연극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극단’에서 ‘영겁의 처’에 오르가 역을 이월화가 맡은 것은 사실입니다. 이때가 본격적인 윤백남과 이월화가 만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 윤백남이 이월화라는 예명을 직접 지어 주었는데 ‘한국신극사연구’를 쓴 이두현 교수는 그녀의 이름이 일본신파배우 ‘수주월화’에서 혹시 따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내세운바 있습니다.


유 : 당시 여배우은 기생이라는 등식과 일치하게 되는데요. 이월화 역시 기생이 됩니다만 왜 당시의 여배우는 기생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김 : 아마 사회적 현상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당시는 능력 있는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어려웠던 시대이니 재능 있는 여자들의 등용문이 기생이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조선의 첫 극장용 극영화인 ‘춘향전’에서도 기생인 김선초가 출연하지 않았나 봅니다. 많은 기생들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요. 석금성, 안연홍, 김난주, 김난옥, 유신방 등 이 기생출신들이거나 후에 기생들을 하게 됩니다. 당시 영화나 연극은 예술로써 대우을 받지 못하던 시대이니 명문가의 집안에서 딸을 내줄 리가 없지요. 작가는 그래도 이월화를 이화학당 출신으로 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정확하지 않아요. 내가 아는 바로는 진명여학교 출신으로 중퇴한 것이 최종학력입니다만 여학교를 다녔다는 것만 해도 당시로는 신여성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유 : 제가 텍스트로 삼은 자료 중에 가장 핵심이 된 것은 이영일 선생님이 쓰신 한국영화인 열전 편에 ‘여배우 이월화’ 부분과 안병섭 선생님의 ‘한국최초의 스타 이월화’ 부분에서 많은 인용을 하였습니다. 이화학당 부분은 윤백남 선생님이 발간한 연예잡지 예원에 ‘시내 모 여자 보통학교 보통과 출신과 이화학당 중도 폐학’이라는 (예원 1023년 5월호) 부분도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매일신보(1924년 3월 18일)자 기사에도 이화학당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화학당 중학과에 입학한 어떤 해 가을 어느날 저녁에 우연히 친구에게 끌리어 연극구경을 처음으로 한 후부터 당순한 처녀의 마음에 연극이란 한곳으로 쏠리게 되어 밥을 굶을 지언정 연극은 아니 구경할 수 없게까지 그곳을 사모하고 동경하였다 한다.”


김 : 이 기사를 보면 기자가 좀 상투적이고 감상적으로 쓴 글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혹시 그렇지 않다면 요즘 말하는 신정아의 학력위조파문 이후 터져 나온 여배우의 허위 학력 기재 정도 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 : 선생님은 조선최초의 영화로 ‘월화의 맹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1917년에 제작된 영화 ‘국경’을 조선최초의 영화에 대한 기점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김 : 또 한 한편의 최초의 조선영화라는 ‘국경’ 역시도 그 제작 시기나 개봉 문제에 대해서 의문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김도산이 만들었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왜냐면 김도산의 사망연대가 1921년인데 그가 죽은 지 3년 후인 1923년에 제작되었으니까 죽은 그가 무덤에서 살아 나와 영화를 만들었다는 억측이 됩니다. 단지 출연자가 김도산의 신극좌의 단원들이 출연하고 ‘김도산 일파 출연’이라는 광고가 실렸으니 김도산이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습니다만 이 영화의 제작은 도요야마 미치루(遠山滿)이라는 일본인이고 단성사 사주 박승필이 제작에 참여 했다는 것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이 각본을 윤백남이 집필했다는 건 이 영화의 극본이 아니고 윤백남의 다른 희곡 ‘국경’입니다.


유 : 도오야마 미치루라면 후에 경성촬영소로 나운규를 불러다 ‘금강한’ ‘남편은 경비대로’를 만든 사람 아닙니까? 이번 작품에서도 이월화와 나운규의 짧은 만남을 그려 보았습니다만


김 : 그 부분은 틀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종화가 나운규를 처음 회령에서 만나고 ‘해의 비곡’의 영화가 만들어 진후 우연히 부산서 상경하는 종로에서 나운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런 나운규를 다시 부산으로 데려가 조선 키네마 사에 연구생으로 입사 시키지요. 그때는 이미 이월화는 윤백남과 결별하여 서울로 올라간 직후입니다. 그런 후 나운규는 윤백남의 영화 ‘운영전’으로 공식 데뷔하게 되지요. 그러니 나운규와 이월화의 만남은 소설적 설정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한 같은 영화인으로 다른 자리나 기회로 만날 수는 있었다고 봅니다.


유 : 이월화의 영화출연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월화의 맹서’에 데뷔하여 ‘해의 비곡’ ‘뿔 빠진황소’ ‘지나가의 비밀’ 등의 소작을 남겼는데요. 이렇게 출연작품수가 적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김 : 당시에 영화제작편수가 많지 않은 관계로 그 정도 작품도 다른 여배우에 비해서는 다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월화는 연극을 주로 한 배우이니 연극무대가 주 수입원이었겠지요. 또한 자료의 부족으로 작품수가 누락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자료를 발굴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 후학의 몫이라고 봅니다.


유 : 아, 작품을 쓰는 도중에 여러 명의 여배우들의 자살설 들이 사회문제로 대두 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배우의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또한 이월화의 죽음도 자살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 적이 있는데요.


김 : 글쎄요. 당시나 지금이나 여배우의 삶이 결코 대중이 생각하는 것처럼 녹록치가 않나 봅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 비해 오늘의 여배우들은 그 개인적 프라이버시나 가치관이 많이 달라져 있으니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갖는 것이 더 하겠지요. 그 시절에는 비련이나 가난 때문에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만 또한 신화나 전설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듯 어느 시대에나 늘 여배우는 신비감에 쌓여 있는 존재처럼 보여야 하는 거고 그렇게 되기를 본인 자신도 바라니까... 그렇다고 죽음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방법은 분명 잘 못된 것이지요.


유 : 여러 가지로 선생님의 고견에 감사합니다. 진즉 이 소설을 집필하기 전 선생님을 뵈었으면 더 좋은 글이 나왔을 텐데... 선생님의 고견을 거울삼아 좀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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