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유디나, 스탈린이 사랑한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 스탈린이 사랑한 피아니스트
  • 소혁조
  • 승인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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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혁조의 인터미션


[인터뷰365 소혁조기자] 사회주의 체제의 동구와 자본주의 체제의 서구에서는 서로간의체제의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특히 구 소련에서는 자국의 우수한 음악 예술가들을 서방세계에 연주여행을 시키며 세상을 경악시켰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뚱보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선생과 강철타건 에밀 길렐스, 독재적 카리스마 지휘자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머리가 홀라당 다 벗겨진 조로(早老)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20세기 피아니스트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등이 되겠다. 이들은 구 소련 정부의 정책에 따라 서방세계를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방세계의 연주자들과 협연도 많이 했고 서방세계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맘껏 과시하는 정책적 선전용으로 많이 쓰였다.


오이스트라흐, 길렐스, 므라빈스키 등이 서방세계를 활개치고 다니면서 수많은 명연, 명반을 남겨 전설의 위치에 오를 때 철의 장막 저쪽의 건너편에는 이미 살아있는 전설로 등극하여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으나 철의 장막 넘어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조용한 전설의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너무도 유명한 클라라 하스킬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고 러시아 피아니즘의 대모(代母)라 불리우는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어머니뻘 되는 피아니스트이며 바흐와 베토벤의 스페셜리스트였으나 하스킬, 니콜라예바의 유명세엔 훨씬 못 미치는 마리아 유디나(Maria Yudina)가 그 주인공이다.

마리아 유디나는 1899년 러시아 네벨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여타 거장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신동, 천재로 불리우며 22세에 세인트 페테스부르크 음악원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유디나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녀는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예술적 성과를 과시하여 부와 명예를 얻고자 하는 일반적인 행위와는 매우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볼셰비키 혁명 중엔 폭동으로 신음하는 많은 난민들과 부랑자, 병자들을 위해 음악회를 개최하여 외롭고 지친 영혼들을 달래주었으며 이로 인해 훗날 볼세비키 정권에서는 그녀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교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2차대전 중엔 독일군에게 포위된 공포의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모범이 되었다.


20세기 초반의 어지러운 시대상황에서 러시아가 배출한 뛰어난 예술인들은 정치적 망명을 택하여 신변의 자유를 보장받고 자신의 예술을 맘껏 구현하여 부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유디나는 이런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다. 평생동안 자신의 전용 피아노를 갖지도 못했고 항상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대한 예술인은 보장된 비단길을 마다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고난과 역경의 길을 밟게 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 가냘픈 여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이 위대함.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유디나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스탈린과의 관계이다. 유디나는 레닌 이후 정권을 잡은 피의 독재자 스탈린의 예술인들에 대한 억압정책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동료 예술인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유디나의 태도를 독재자 스탈린이 가만 두고 있을 리가 없지만 유디나에겐 극히, 정말 극히 예외적으로 강제수용소에도 보내지 않고 그녀가 지속적인 예술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유디나의 연주를 환장하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디나가 연주하는 모차르트(확실히 모르겠지만 피아노 협주곡 23번일 것이다)의 방송실황을 듣고 있던 스탈린이 그녀의 연주에 너무도 감동하여 당장 녹음 테잎을 구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만큼 스탈린이 유디나를 좋아했고 존경하였기에 유디나에 대해선 최대한 배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


유디나는 스탈린에게 정면으로 개기면서 맞짱도 불사했던 몇 안 되는 용감했던 예술가 중의 하나였으며 이에 음악원 교수직도 짤렸던 적도 있다. 그리고 그만큼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가 남겼던 음반치곤 지나치게 적은 수만을 남기고 있던 것은 그녀에게 연주와 레코딩 활동에 정치적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유디나가 스탈린의 총애를 받았기에 스탈린이 특별히 봐줬다? 그보다는 볼세비키 혁명 당시부터 있었던 유디나의 훌륭한 업적들과 그녀의 대중적인 인기, 위치 등을 모두 고려해봤을 때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더 큰 반발이 있을 것이란 점을 인식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유디나가 남긴 연주들을 살펴보면 바흐와 베토벤을 가장 많이 연주하였던 바흐, 베토벤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꼭 바흐와 베토벤만을 연주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와 협주곡,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와 프로코피에프와 쇼스타코비치, 스트라빈스키 등의 현대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방대한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하여 여성 연주자 중엔 이례적으로 연주세계의 variation이 매우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디나가 남긴 음반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녀가 적은 양의 레코딩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그녀의 음반을 구입해서 듣는 건 어려운 일인데 추천하고 싶은 사이트가 한 곳 있다. www.mariayudina.com 마리아 유디나의 공식 웹사이트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소나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등등 유디나가 남긴 여러 연주들의 음원을 들어볼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이다. 이 곳에서 그녀의 청명한 피아노 소리를 직접 접해보시기 바란다.

유디나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봤는데 상당히 이채롭고 독창적인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특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1악장의 카텐짜는 어느 누구의 연주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녀가 추구했던 예술은 단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음악으로만 구현하는 것이 아니었다. 피아노와 음악은 그녀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다와 같은 넓고 깊은 예술세계를 구현하는 작은 일부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녀의 예술은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을 밑바탕으로 하여 보다 높은 이상향에 닿기 위한 끝없는 자기성찰이었으며 이를 위해 철학, 건축학 등 매우 다양한 방면의 공부를 하였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예술인을 비롯하여 사회운동가, 정치인, 스포츠 선수 등의 유명인사들 중엔 유명하긴 하지만 결코 인간적으로 정감이 가지 않고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은 그들이 유명할 수 있게 해준 뛰어난 재능과 함께 수반되어야 하는 덕목인 인격과 교양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 소련 시절의 전설적인 여류피아니스트인 마리아 유디나는 안빈낙도의 삶 속에서 자신을 당당하게 내 비추며 높고 높은 이상향을 추구했던 고귀한 삶을 살았으니 그녀야말로 진정 존경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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