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3)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3)
  • 유지형
  • 승인 2009.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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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33) 치파오


[인터뷰365 유지형] 상하이의 여름은 무더웠다. 그 여름, 무더위를 이기며 월화는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이제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때가 되니 누구에게든 거침없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웬만한 소설책 정도도 줄줄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어를 배우는 데는 <동문서원>에 다니는 이춘래란 중국인 학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미 두 사람은 <상해대빈관>의 초특급 호텔을 나와 홍구 공원 근처의 <상해빈관>이라는 작은 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같은 상호에 ‘대’ 자 하나가 빠졌을 뿐인데 시설이나 룸서비스는 엄청난 차이가 나고 가격 역시 그랬다.

이춘래는 월화가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청년이었는데 그 청년은 치파오를 입었음에도 그녀를 단번에 알아 봤다.

“혹시 조선 분이신 이월화 여사 아니세요?”

월화는 이런 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우선 반가웠고, 그도 중국옷을 입었으나 정확한 조선어로 물었다는 것이 또한, 반가웠다.

“맞는데... 누구세요?”

“아! 난 혹시 비슷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내 눈이 정확 했군요. 저는 이춘래라고 합니다. 이곳 동문서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조선말을 잘 하세요?”

“조선말 뿐 많이 아니라 일본어도 잘 한답니다.”

“어머! 재주도 많으셔라.”

“제주가 많은 게 아니고 뒤범벅으로 뒤섞여서 그렇지요. 나의 아버지는 중국인 이고 어머니는 일본사람, 그리고 전 어린 시절을 조선에서 살았답니다. 그러니 삼개 국어에 능통 할 수밖에요.”

그는 늦깎이 학생이라고 했다. 나이는 월화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기성 보다는 한 살이 많았다. 기성은 겨우 한 살 차이인데도 춘래를 깍듯하게 “따거! 따거!” 하며 형이라 부른다. 그건 솔직히 진심이 아니라 춘래를 이용하기 위한 기성의 위장술이다. 춘래도 그런 걸 모르는 건 아니듯 하나 기성을 오래 전 안 사이처럼 잘 대해준다.

이런 우연한 만남으로 그는 나의 중국어 가정교사가 되었다. 매일 서원이 끝나는 오후가 되면 호텔방으로 찾아와 ‘런쓰 나 헌 까오 싱... 만나서 반갑습니다.’ 등의 기초적인 인사말부터 친절하고 상세하게 가르쳐 준다.

처음엔 기성도 함께 중국어를 배웠으나 기성은 기초부터 시작하는 느림보 수업에 실증을 느끼고 현장에서 배우는 어학이 더 빠르다며 매일 어디론가 외출을 했다. 그가 가는 곳과 만난 사람은 역시 인종은 다르고 말이 다르지만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이었다. 결국 그들과 혼숙하며 대마초를 피다 중국공안에 채포 되었다.

“그깟 대마초 좀 피었기로 서니 뭐 구금까지 하고 그런단 말이요?”

기성은 서투른 중국어로 공안원에게 따진다. 그러나 상하이에는 대마초가 향정신성 마약으로 분류되어 법적 재제가 가능했다.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이 동양의 진주 상하이를 서구열강들에게 빼앗겼다. 그런 역사적 고통이 상하이에는 남아 있다. 그런 반면, 또한 상하이는 아편의 병폐가 사회악으로 번져 있는 곳 이었다. 더욱이 정치적으로는 장제스가 쿠데타를 꿈꾸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상하이의 공산주의자들은 불평 불만자와 민심소란자들을 대규모로 구금 체포, 탄압하는 그런 민감한 시류에 편승한 특별조치법에 기성이 걸려든 것이다. 경찰이 기성의 신상을 조사하다 월화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공안원들이 호텔의 객실을 샅샅이 뒤졌으나 다행히 대마초는 나오지 않았다. 기성이 꾹 입을 다물어 준 덕분에 월화는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제 감옥을 가지 않으면 조선으로 추방될 위기에 몰린 기성이다. 월화는 춘래와 함께 공안서로 기성의 면회를 갔다. 기성은 감옥에도, 조선에도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누님! 내가 이곳 유치장에서 간수하나를 구워 삶았소. 돈을 쓰면 나갈 수 있다는데 그 돈이 만만치 않은 액수요.”

월화는 이렇게 뻔뻔스러운 녀석은 정말 처음이다. 그런데도 그가 밉지 않다.

“물론 돈이 아깝긴 하지만 이제 누님이 중국어만 능통하게 되면 주연 여배우는 따 놓 당상일 테고, 나도 이제 대마초 같은 건 안 피고 촬영보 말단으로라도 들어가 열심히 촬영기술이라도 배우리다.”

그래, 우리는 그런 꿈을 갖고 이곳 상하이에 왔다. 꼭 그렇게 될 것이고 꼭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성을 빼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절약해서 아껴 쓰고 남은 돈과 꿍쳐둔 보석을 모두 판 덕에 기성은 유치장을 나 올 수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상해빈관>에서도 쫓겨나 그보다 더 싼 황푸강 주변의 값싼 여인숙으로 옮겨야 했다. 거리가 먼 이곳 까지 춘래는 찾아와 중국어를 가르쳐 준 덕분에 월화의 중국어 실력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만큼 춘래가 성심껏 중국어를 교수했다. 월화는 그런 보답과 은혜에 감사하려 했으나 춘래는 수줍음을 많이 타는 순진한 청년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춘래를 만난 덕분에 이제 능숙하게 중국어를 구사하게 된 월화와 기성과 다시 명성전편공사의 제 3제작부장인 왕 부장을 찾아 갔다.

“안녕하세요. 이제 완전한 샤오제(소저)가 된 제 모습이 예쁘지 않은가요?”

이젠 농담까지 하는 월화이다. 그런 월화의 중국어 실력에 놀란 왕부장은 만족한 듯

“좋소! 이번엔 무협영화를 촬영 중인데 한번 출연해 봅시다.”

흔쾌한 결정이 내려졌다. 영화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중국의 고전문학인 <금병매>의 무송담을 각색한 시리즈물 이었다. 월화가 맡은 역은 무송을 유혹하는 백발유혼의 조역이다. 우선 조역이라도 출연해 자신을 부각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월화는 생각하고 기성과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촬영할 장소는 상하이 중심가에서 떨어진 창화로 근처에 있는 대형 스튜디오에서 있었다. 사람들을 이곳을 <명성 창화 제1 촬영소>라고 불렀다.

촬영소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모여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해 항구에서 많은 사람들을 본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다. 이 사람들은 엑스트라를 지망한 사람들로 엄청난 경쟁을 뚫고 통과해야 출연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가난하기에 절실하고 안타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정복을 입은 수위가 출입구로 들어서는 월화와 기성을 제지하며 묻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오늘 촬영에 출연할 여배우입니다. 나는 그녀의 매니저 요.”

수위는 월화를 처음 본다는 듯 출입자 명단을 집어 들더니

“이름이 뭐요?”

“레이..료...와!”

기성은 중국식 발음으로 월화의 이름을 대자 꼼꼼히 명단을 확인한 수위는

“제 4 촬영소요. 곧장 가다가 물탱크 있는 곳에서 오른 쪽으로 도시오.”

두 사람이 제 4 촬영소에 도착하니 안내 된 곳은 개인 분장실이다. 먼저 제작부원이 들어와 오늘 찍은 촬영대본의 월화 분량의 대사가 프린트 된 양면지를 던져 주고 나가며 빨리 대사를 외우란다. 그는 빠르게 나가며 벽에 달린 부저가 울리며 빨간불이 켜지면 촬영 준비가 된 것이니 스튜디오로 나오라는 지시를 한다.

이어, 의상 담당이 들어와 대충 눈대중으로 여러 치수의 옷 중에 하나를 던져 주고 나가자 다음엔 미용사가 들어와 머리를 빠르게 만져 주고 나가고 그 다음엔 분장사가 들어와 월화의 얼굴에 대충 눈썹을 그리고 분첩을 뚜들기더니 역시 급하게 나간다. 모두 바쁘게 마치 중국집에 불난 모양 그대로이다.

오늘은 수십 명이 출연하는 몹 씬이다 보니 이렇게 바쁘단다. 월화는 의상을 챙겨 입고 감정을 실어 대사를 외워 본다.

“네 이놈 무송아! 너를 잡아 무간지옥으로 데려가야겠다. 호호”

오늘의 대사는 몇 자 안 되는 간단한 것이었다. 그 사이 기성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오지랖에 촬영소 구경을 나간 것이 분명 했다. 월화는 대사를 수십 번도 더 외웠다. 그런데도 부저는 울릴 생각을 안 한다. 목도 마르고 도대체 기성이 이 녀석은 어딜 간거지?

그러는 사이 붕- 하고 부저가 울리며 빨간 등에 불이 깜빡였다. ‘아! 드디어 촬영이다!’

이제 상하이에서 첫 카메라 앞에 서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온 것이다.

월화는 분장실을 나셨다. 어두운 복도가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다.

‘어디로 가야하지?’

저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월화는 그곳으로 가본다. 그곳은 미술장치를 만드는 곳이었다. 다시 되돌아와 보니 다시 분장실 앞의 복도이다. 이번엔 반대로 가본다. 그곳도 소품을 만드는 장소였다. 월화는 이마에 총총히 땀이 베이며 긴장한다.

‘도대체 이 녀석은 어디로 간 거야?”

이곳저곳을 헤매다 지나가는 남자에게 묻는다.

“제가 촬영장을 못 찾아서 그러는데?”

그 남자는 대뜸 손가락으로 다시 한곳을 가르치고는 바쁘게 가버린다. 그 곳으로 가보니 분명 휘황한 조명이 밝혀져 있고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아! 이제야 찾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사극이 아닌 현대극을 찍고 있는 현장이다. 이런 난감할 때가 어디 있담? 월화는 되돌아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맨다. 결국 도착한 곳은 다시 분장실 앞이었다. 월화는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에 다시 분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성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텅 빈 분장실 의자에 털퍼덕 주저앉아 땀을 닦아 낸다. 거울을 보니 분장은 더욱 엉망이 되었고 눈꼬리를 치켜 올린 눈썹도 다 지워 졌다. 월화는 다시 눈썹연필을 집어 들어 눈 화장을 시작하려는데 벌컥 분장실 문이 열리며 기성이 허겁지겁 들어선다.

“누님 어떡케 된 거요?”

“어떻게 되다니... 뭐가?”

기성의 뒤에는 제작부원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월화를 향해 마구 떠들어 댄다.

“아니? 벨이 울린지 삼십분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 눈썹 화장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조선의 여배우는 다들 이렇소?”

월화를 노려보며 마구 화를 내더니 나가 버린다. 월화는 변명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넌 도대체 어디가 있었던 거냐?”조용히 기성을 꾸짖었다.

“자! 빨리 촬영장으로 가봅시다. 내가 어떻게 수습을 해 볼 테니..”

자신 있게 서두르는 기성을 따라 분장실을 나섰다. 기성이 앞서고 그 뒤를 따라가자 금방 촬영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런데 아뿔싸 이미 백발유혼 역은 다른 여배우로 바뀌어져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난감하고 당황스럽게 서 있는 월화 앞에 왕부장이 나타났다.

“영화촬영에 있어서 시간은 바로 돈이요. 이곳 상하이에선 그런 정신 상태로는 배우가 될 수 없소.”

아무 말도 못하는 서 있는 월화를 대신해 기성이 나선다.

“그게 아니고 이곳 촬영소가 처음이라 장소를 잘못 찾아 갔답니다.”

“우리 중국 사람들한테는 변명은 소용없소. 우린 결과를 보고 얘기 합니다.”

그의 말에 기성이 발끈 했다.

“그렇담 촬영장에 처음 온 사람에게 장소를 잘 가르쳐 줬어야죠”

“다른 사람들은 잘도 찾아오더구먼. 하여튼 난 바쁘니 다음에 봅시다.”

왕 부장은 그렇게 바쁜 듯 촬영장 속으로 사라졌다. 당연한 변명과 간절한 호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월화는 너무도 분해 핑 눈물이 고였다. 어둠의 저편 휘황한 조명의 불빛 속에서는 월화의 배역을 대신 한 여배우가 연기를 펼치며 카메라 앞을 누비고 있다.

“네 이놈 무송아! 너를 잡아 무간지옥으로 데려 가야겠다. 호호”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는 장면이다. 월화는 휘청 돌아섰다. 얼마나 기다린 영화촬영인가?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밤을 새워 문장을 외우고 또 외웠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도 못 서보고 이게 무슨 낭패람 말인가?

“누님 미안하오. 나만 분장실에 같이 있었어도..”

월화는 정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기성은 계속 입을 조잘 된다.

“허지만 두고 보자고요! 어디 상하이에 영화사가 여기뿐이 아니잖소.”

그렇게 말하는 기성을 향해 월화는 힘껏 따귀를 사정없이 올려쳤다.

“닥쳐! 너 따위가 무슨 매니저야. 당장 내 앞에서 꺼져버려!”

안경이 떨어져 나가고, 금방 기성의 뺨이 붉게 부어올랐다. 그런데도 기성은 아프지도 않은 듯 월화를 걱정스럽게 바라만 볼 뿐이다.


유지형 감독이 쓰는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인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을 그려 낸다.

출생부터 기구했던 이월화는 극단에서의 혹독한 배우수업을 거쳐 윤백남의 도움으로 조선의 첫 영화 <월하(月下)의 맹서>에 출연,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가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이월화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 한국 연극 영화사와 그 주역의 인물들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편집자주


등장인물


이월화(본명 이정숙)=이화학당을 나온 연극배우 출신 은막의 여배우. 계모의 손에 자라나 연극과 영화에 투신하고 자신을 키워준 영원한 스승 윤백남을 운명 직전까지 연모한다. 결국 기생으로 전락하고 중국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 가서 신혼생활을 영위하나 일본인 시어머니의 학대로 불행하게 그곳에서 죽는다.


윤백남 / 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조선 연극 영화계의 거목. 이 월화를 무명극단에서 발굴해 연극계의 스타로 만들고 조선최초의 활동사진을 찍으며 이월화를 대 배우로 출세시킨다. 선비적 기질과 대쪽 같은 성격으로 월화의 방종을 보고 절연한다.


안종화 / 배우 감독=이월화의 평생 친구. 끝까지 순수함으로 월화를 대한다. 최근 발굴되어 화제가 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감독이기도 하다.


박승희 / 배우 연출자=극단 토월회의 대표. 미주대사를 역임한 박정양 대감의 장남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극단에서 여배우 이월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만 약혼녀의 등장으로 결국 월화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박승규 / 극장 단성사 부사장=단성사 사주 박승필의 친동생. 기생인 월화를 만나 동거하나 주위의 반대로 결국 헤어진다.


윤기성 / 연극배우=월화의 연하의 남자. 고아로 자라난 불우한 청년이다. 월화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나 결국 마약밀매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이응수 / 연극배우 여장배우=극단에서 월화를 만나 변태적 관계로 발전한다. 월화에게 많은 도움과 길잡이가 된다.


조씨 / 월화의 계모, 기생출신=고아인 월화를 키워준 은인이다. 월화를 괴롭히기도 자책도 하는 이중적 성격의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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