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1)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31)
  • 유지형
  • 승인 2009.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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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31) 채전


[인터뷰365 유지형] 월화가 근 보름 만에 집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렸더니 조씨는 그동안 어디 가서 뭘 하다 왔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댄다. 연극공연이 끝나고 바람처럼 사라졌으니 유괴라도 당한 줄 알고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내려고 하던 참이었단다.

월화는 대꾸도 안 하고 대충 옷을 갈아입고 여벌의 옷을 챙겨 나오려는데 조씨가 가로 막으며 따져 묻는다.

“또 어딜 가는 게냐? 이번엔 아예 작정 하고 나가는 것 같은데?”

“며칠 좀 동무네 집에 가서 쉬다 올게요.”

“그 동무라는 작자가 누구냐? 여자냐 남자냐?”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뭔 상관 이예요. 그걸 엄마가 알아서 뭐 하려고요?”

“아이고.. 자식이 원수라더니? 그만큼 말을 했으면 알아들을 만도 하구만. 널 한번이라도 보겠다고 장안의 사내들의 성화 때문에 내가 미칠 지경이다. 기회는 그리 많이 있는 게 아니야.”

“나 이제 그런 남자들 안 만나요?”

“그럼 활동사진은 어쩌고?”

“그까짓 활동사진 안 찍으면 그만이지.”

“아이고.. 저년이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지금까지 키운 지어미 공덕도 모르고... 그저 사내 꽁무니 만 따라 댕기는 불효막심한 년!”

조씨는 저번 정균에게 받은 보석과 패물을 다 돌려 준 것에 대한 불만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차에 월화가 무단 외박까지 하자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다. 악다구니를 쓰는 조씨를 무시하고 월화는 대문을 나섰다. 복동이가 얼른 뒤따라 나오며 쪽지 하나를 내민다. 펼쳐 보니 채전이가 쓴 편지이다. 며칠 전 채전이가 나를 만나러 집에 들렀단다.

채전은 벌써 몇 달 전, 경성으로 올라 와 한 극단에서 연극에 출연 중이었다.

종화를 만나 언니가 보고 싶다고 하자 종화는 월화의 집 주소를 적어 주었나 보다.

‘월화 언니! 오랜만이에요. 저도 서울에 올라 왔어요.

지금은 극단 일월좌에서 연극에 출연 중입니다.

바쁘지 않으시면 광무대 극장에 한번 찾아 와 주세요.

얼마나 언니가 보고 싶은지 몰라요.

꼭 날 보러 와 주실 거죠- 채전 올림.’

채전의 글을 보니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은가 보다. 월화도 너무도 반가워 당장 왕십리에 있는 광무대 극장으로 달려갔다.

여기 저기 극단에서 수십 번 우려먹은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극에 채전은 조역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분장실에는 알만한 얼굴들이 월화를 향해 아는 체를 해온다, 분장실 한구석에서 오두막이 앉아 마른기침을 하고 있던 채전이 월화를 보자 왈칵 울먹인다.

“언니! 와 주었네.”

채전은 약 일 년 간 부산에서 함께 생활하며 정을 많이 주었나 보다.

월화 역시도 얼마나 채전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채전아! 이 무심한 것 편지라도 한통 해주면 어디가 덧나니?”

“그런 언니는 그동안 뭐 했수?”

그래도 해밝게 웃는 채전이다.

관객도 별로 없는 연극 공연이 끝나고 월화는 채전을 데리고 극장 근처 너비아니구이 집으로 데리고 갔다. 왠지 늘 약해 보이는 채전에게 고기라도 한 끼 배불리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채전은 무척이나 수척해 있었다. 마음 역시 병이 든 듯 나약하기만 했다.

그동안, 부산생활에서 채전은 이경손의 응답 없는 짝사랑에 지쳐 있었다.

이때, 그런 그녀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민 것은 박승호라는 남배우이다.

승호는 배우를 지망한 극예술 연구회의 단원이었다. 왠지 배역 운이 없어 단역과 더불어 극단의 허드레 일을 하는 진행요원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도 부산에 남아 종화와 함께 영화작업을 하게 된다. 역시 촬영전반에 제작을 지원하는 스태프의 역할이었다. 그가 그런 귀찮은 역할을 감수하며 붙어 있는 이유는 채전에게 마음이 꽂혀 있기 때문이었다.

채전이 경손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채전에게 모든 마음을 다 바친다. 온통 그녀를 생각하며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한 날이 되었다. 더욱이 그녀를 희롱한 촬영기사 사이또를 본국으로 쫓아버리는 일에 적극 일조하여 채전의 호의를 산다. 하지만 그는 늘 숫기에 없어 말도 못하고 채전의 곁을 빙빙 돌 뿐이다. 그러면서도 채전이 요구하는 것을 말도 하기 전에 갖다 바친다. 채전이 목이 마르다 싶으면 어느새 시원한 냉수를 떠오고 바람이 불어 채전이 추위에 떨 량이면 얼른 상의를 가져와 덮어 준다. 그런데도 그런 호의와 관심에 그녀는 통 반응이 없다. 그러자니 더욱 큰 관심으로 그녀를 주목시킬 필요가 생겼다.

채전이 높은 폭포에 올라가 자살하려고 추락하는 장면을 찍는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소품부가 인체모형의 인형을 가져오자 감독이 제지하며

“인형을 떨어트려서 어디 제대로 효과가 나겠어?”

“사람이 직접 떨어진다는 건 위험합니다.”

조감독 이경손이 말렸으나 감독 왕필렬은 막무가내 사람이 떨어져야 한다고 우겨댄다. 하지만 수십 길 폭포아래도 여배우를 떨어뜨릴 수 없는 일, 결국 대역으로 누군가가 떨어져야 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위험천만한 대역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때 당당히 나선 사람이 있다.

“까짓것 지가 한번 뛰어내려 볼랍니다.”

승호였다. 그는 채전의 의상과 비슷한 옷을 갈아입고 폭포 꼭대기에 섰다.

이제 카메라는 폭포 아래에 설치되어 그가 무사히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승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이 폭포에서 떨어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사랑하다는 말을 수십 번도 더 하고 그는 감독의 사인을 받고 폭포 속으로 뛰어든다. 그 장쾌한 모습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그런 박수도 잠시 그는 폭포 속에 들어가 나오지를 않는다.

폭포 수면위에 붉은 피가 샘솟기 시작했다. 제일로 놀란 건 채전이다.

자신을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여 폭포 속으로 뛰어든 남자에게 사고가 생겼다. 물에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아마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후, 그 남자는 마치 용궁이라도 다녀온 듯 푸우- 긴 숨을 뇌시며 물속에서 떠오른다. 허벅지 다리가 바위 모퉁이에 찢어져 피를 좀 흘렸을 뿐 그는 무사하다. 채전은 그동안 이 남자의 눈길과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건 아니다. 여배우에게 그런 유혹은 수시로 생기고 일어난다. 더욱이 자신에게는 비록 멀고멀지만 사랑의 대상인 이경손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차츰 경손은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지고 이 사내가 자꾸 생각난다. 폭포에서의 추락장면을 계기로 승호도 배우가 되었다. <운영전>에서 안평대군을 모시는 호위무사로 당당히 그 역할을 맡은 것이다. 채전은 이곳 부산생활이 외롭기 그지없다.

그동안 정을 주었던 월화도 경성으로 떠나버리고 우연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우연이가 호의 있게 다가오지만 왠지 그녀와 친해지는 게 월화 언니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촬영이 없는 날, 승호가 채전을 바닷가로 불러내었다. 맛있는 회를 사주겠다는 것이다. 잠시 망설였지만 못 갈 것도 아니었다. 승호는 송도 바닷가의 제법 큰 요릿집으로 채전을 안내 했다. 여관을 겸한 요릿집 이었다.

이곳에서 채전은 영화사로 경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채전인데요. 저, 지금 승호 씨와 송도의 여관방에 와 있어요. 어쩔까요? 저 이 남자랑 잘까요? 말까요?”

채전의 성격에 비해서는 너무도 당돌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전화기 속으로 투박한 경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걸 나한테 묻는담 말이요? 나 바쁘니 전화 끊어요.”

먼저 저쪽에서 전화가 툭 끊겼다. 세상에 이런 무심하고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 남자를 내가 몇 년 동안이나 연모하며 애간장을 태웠다니, 채전은 그런 세월이 너무도 억울하다. 채전은 식탁으로 돌아와 승호가 따라주는 술을 마구 마셨다. 승호가 그런 채전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그렇게 마시면 취해요.”

“놔둬요. 하도 분하고 억울해서 마시는 술이니까.”

“분하고 억울하긴 나도 마찬가지요.”

“왜 승호 씨가 분하고 억울해요?”

“이루지 못할 사랑에 목맨 여자나 그런 여자에 목맨 남자나 다 분하고 억울하긴 마찬가지라오.”

그 말에 채전은 손에 든 술잔을 떨군다. 그러자 채전의 술잔을 쥐었던 손을 덥석 승호가 잡았다.

“이제 서로 억울하고 분 한 일은 그만 끝냅시다.”

채전은 각오한 듯 승호의 얼굴을 또렷이 바라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 비극의 끝은 너무도 빨리 왔다. 그동안 조선키네마 사는 제 3회 작품으로 <암광>이란 영화를 찍게 된다.

감독은 다시 왕필렬이었다. 배우는 <해의 비곡> <운영전>에 이어 안종화, 김우연. 그리고 이채전이었다.

백남이 경성으로 갈 때 응당 따라 나서야 할 우연이지만 우연은 부산에 남았다. <운영전>의 실패로 감독으로써의 퇴락을 예견한 우연의 철저한 계산은 결국 스승에 대한 배신으로 그 결과를 낳는다.

이제, 우연은 여배우로써 자신의 운명의 결정권을 지은 감독 왕필렬에게 매달린다. 그런데 왕필렬은 우연이 아닌 채전에게 끌리고 있었다.

왕필렬은 일본인 치고는 그 사람됨이 꽤 무던한 사람이었으며 승려다운 품위와 문학사로써의 지식과 교양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쩌다 한 잔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고 만 것이다. 채전은 영화사 내에 한 방을 얻어 승호와 동거 중이었다. 마침 승호는 영화사 업무로 나데 사장과 동행하여 지방으로 출장을 간 날이었다. 늦은 밤, 괘종시계 소리에 채전은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 방문 앞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사이텐 상! 사이텐 상!”

문을 뚜드리며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채전은 곧 그가 왕감독 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허지만 자신은 여배우고 그는 하늘 보다 높은 감독이었다.

마땅히 뾰족한 수도 없고 해서 문을 열어 주고 만다.

“웬일이세요? 이 밤중에..”

정중했으나 겁을 먹은 표정이 역역했다.

“당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왕필렬의 말이었다. 채전은 너무도 황당하고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바라볼 뿐이다.

“사랑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왕필렬은 이불을 감고 앉아 있는 채전에게 다가섰다. 그러더니 이불을 재치고 채전에게 달려들었다.

“이러지 마세요.”

채전은 거세게 반항 했으나 역부족 이었다. 왕필렬은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했다. 채전은 온힘을 다해 버티고 있다.

이때, 영화사 식당에 일하는 주방장이 이 앞을 지나다가 안에서 심상치 않은 남녀의 소리가 들려오자

“채전 씨! 웬일이세요? 무슨 일 있습니까?”

방문 앞에 다가와 물었다. 곧 방안은 곧 잠잠해 졌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가서 일 보세요.”

태연한 채전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떨리며 당황한 목소리가 분명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기도 한데? 아무 일도 아니라니? 그녀의 남편 승호는 지방출장 중이고 혼자 있을 여자의 방에서 남자의 소리를 분명 들려왔다?

주방장은 그대로 어둠속에 숨어 지켜보기로 했다. 방안에서는 왕필렬과 채전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 대치한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런 사실이 발각되면 감독님이나 나나 웃음거리가 되버려요.”

채전은 사정한다. 그제야 이성을 찾은 왕필렬도 더 이상의 행동을 자제한다.

“미안하오. 내가 술에 취해서 나도 모르게...”

겸연쩍게 웃으며 왕필렬은 채전의 방을 허둥지둥 나섰다.

‘아니.. 왕감독이?’

주방장도 놀랬다.

“자.. 자네는?”

동시에 주방장과 얼굴이 마주 친 왕감독도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방안에 있던 채전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등줄기에 흐른 땀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래도 안심 할 수 없다는 듯 문을 굳게 잠그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운다.

며칠 후 입 가벼운 주방장에 의해 이 소문은 영화사 내로 퍼져 나가고 결국 승호의 귀에 까지 들려온다.

“고자! 그 작자가 채전의 방에 뛰어 들었다네”

“허... 그럼 고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고좌란 왕 감독의 본명인 다카사의 한자이고 고좌가 고자라는 별명이 된 것이다. 이런 사실에 화가 난 승호는 당장 채전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기도 전해 화부터 내고 만다. 주방장이 목격하지 않았다면 채전 스스로 입을 안 열었을 것이고 입을 안 연 비밀에는 분명 뭔가 의심스런 행동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해! 두 사람 어떤 사이야? 언제부터였어?”

“제발..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채전은 울며 억울함을 토로한다.

승호는 무명배우라는 자격지심이 발동해 더욱 채전을 몰아간다.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채전이 약을 먹고 음독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런 채전 앞에 승호는 울며 두 번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잘못 했다고 통사정을 한다.

그 후에도 승호는 빌미가 될 때마다 채전을 괴롭힌다. 이제 채전에게 있어서 사랑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결국 조선키네마 사는 마지막 작품 <촌의 영웅>을 만들고 적자운영으로 도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 모든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뿔뿔이 헤어진다. 왕필렬은 다시 자신의 절인 남천사로 돌아가 승려가 되었고 나데도 다시 총포상을 운영하는 과거로 돌아간다.

채전은 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승호와는 동행 하고 싶지 않았다. 요행 승호는 나테 총포상의 영업사원으로 발탁되어 부산에 남게 되었다. 채전은 부산을 떠났다. 경성에 도착한지 서너 달 신파극단을 따라다니며 육체도 정신도 모두 피곤하다. 마냥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다고 했다.

“너, 나와 함께 상하이로 가지 않을래?”

“언니! 상하이는 뭐 하러 가려고?”

“상하이는 중국영화의 중심지래. 난 그곳에 가서 다시 영화배우가 될 테야.”

“...........”

“우리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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