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28)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28)
  • 유지형
  • 승인 2009.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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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28) 아리랑


[인터뷰365 유지형]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서울 장안에 이 낮선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길 가도 아리랑이요, 저길 가도 아리랑이다. 상투 끝이 허연 노인네도 아리랑이요. 코딱지 어린아이도 아리랑이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 익숙하기만 한, 이 곡조의 노래는 순식간에 전 장안에 울려 퍼지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아리랑이 시작 된 것이며 과연 아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 아리랑은 바로 활동사진 <아리랑>의 주제곡으로 조선영화의 풍운아로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친 춘사 나운규의 각본, 감독, 주연의 영화였다.

나운규는 이 <아리랑> 영화 한편으로 금수강산을 눈물로 적시고 온 민족을 감동시킨 장본인 이었다. 또한, 영화사적 측면으로 볼 때 당연히 <아리랑>으로부터 우리의 영화가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아리랑>은 우리 민족영화의 여명을 밝히는 봉화의 횃불 같은 것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밤하늘에는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

오늘도 창성동 월화의 집 담장 밖에서는 꼬맹이들이 부르는 아리랑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월화는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인데도 이불 속에 파 묻혀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난생 처음 듣는 아리랑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아리랑이라니? 분명 처음 듣는 곡조가 분명 했다. 아리랑이라면 진도 아리랑이나 밀양 아리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처음 듣는 아리랑은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게 월화의 귓전에 쏙 들어온다. 금방 따라 부를 것 같다.

그러나 월화의 지금 심정은 노래를 따라 부를 여력도 기력도 없다.

그냥 탈진한 채 비몽사몽의 꿈도 아니요, 잠도 아닌 사방이 높게 가로 막힌 검은 벽속에 스스로를 강금 당한 채 악몽 같은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월화는 정균과 헤어진 후 벌써 며칠 째 이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망연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월화는 삐꺼덕 대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시 이불을 뒤집어쓴다. 분주히 집안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은 분명 조씨다. 조씨는 부엌으로 가 독에서 냉수 한 그릇을 벌컥 벌컥 떠 마시더니 복동이를 불러 약탕관을 닦아 놓고 풍로에 불을 지피라고 이른다. 아마 황주부네 한약방에 들려 한약을 지어 온 모양이다.

조씨는 마당에 서서 아무 상관없는 복동이에게 언성을 높이나, 그건 방안에 있는 월화가 들으라는 소리가 분명하다.

“그저 늙은 년은 고뿔에 걸려도 작향정기탕 한제를 돈이 아까워 못 대려 먹는데 젊디젊은 년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백약이 무효이니, 이게 다 의지박약에서 오는 증세가 아니고 뭐람 말이냐?”

바로 월화의 방 앞에서 목청을 높인다. 방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씨의 목청은 더욱 커진다.

“요즘 장안에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저 들려오는 창가소리가 궁금하지도 않더란 말이냐? 바로 저 노래 가락이 <아리랑>이라는 활동사진에서 나오는 노래라는데 그래도 명색 이 활동사진 배우인 네년이 모른 척 귀를 막고 있으면 어쩌란 말이냐?”

이게 뭔 소리 인가? 저 꼬맹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활동사진에서 나온 소리라고? 그제야 월화는 이불을 들치고 상반신을 일으켜 방문 미닫이를 연다.

조씨는 ‘활동사진 어쩌고 하니까 반응이 오는구나’ 하며 월화를 향해 다시 일장 연설을 하는데

“활동사진 <아리랑>이 극장에서 터졌다는구나! 얼마나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리는지 극장이 무너질 지경이라더라. 감독 선생이 나운규라는 회령 사람인데 그 사람이 활동사진을 박은 실력이 과히 조자룡이 칼 휘두르듯 한 다더구나.”

나운규라는 이름에 월화는 고개를 갸웃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다.

“나운규? 회령 사람 나운규? 아! 그 사람?”

그제야 생각난 듯 월화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도 잘 아는 사람이냐?”

조씨는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묻는다.

“잘 알지는 못해도 한번 만난 적은 있어요.”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다면 잘 아는 거지 뭘 그러냐? 당장 그 나운규라는 감독 선생을 찾아가봐라. 이번에도 신일선이란 어린 여배우를 대 스타로 만들었다던데 너야 타고난 배우인데 재기하는 것쯤이야 둘이 맘만 맞는다면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니?”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역시 몇 마장 건너 뛰어 생각하는 건 조씨 따라갈 사람이 없다.

월화가 춘사 나운규를 만난 것은 부산 키네마 시절이다. <해의 비곡>의 전국 개봉도 끝나고 하루는 종화나 만나 냉면이나 사 달랠까 하고 채전과 함께 새로 이사한 영화사 사옥으로 갔더니 누군가 첨 본 사람이 사옥 현관 문 앞에서 빗자루로 청소를 하고 있다.

키가 작고 안짱다리에 얼굴은 작고 거무티티 하고 그야 말로 괴상하게 생긴 용모의 사내였다. 그 사내는 영화사를 들어서는 월화를 단번에 알아보고 허리를 구십 도로 꺾으며 손을 휘저으며

“월화 여왕님! 어인 행차이지비?”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로 하는 농담을 서슴없이 보내 왔다.

채전은 사내의 그 괴기한 용모에 너무도 놀라 비명을 지를 듯 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 사내의 두 눈빛은 번득이는 광채로 마치 온 세상을 불태울 듯 이글거리고 있다. 저 형형한 몰골과 누추한 입성의 사내는 과연 누굴까? 라는 호기심에 월화는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사내는 한발 더 다가와 입을 연다.

“진시왕도 죽었담둥?”

“진시왕이 죽다니?”

월화는 이 낮선 사내의 알아듣지 못할 암구호 같은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하며 뒤에 서 있는 채전을 돌아본다. 채전은 그저 무서운 듯 고개를 저을 뿐이다.

이때, 종화가 다가오며

“이 친구 또 장난이로군.”

싱글 싱글 웃으며 그 사내를 소개를 한다.

“내 친구인데 회령서 온 촌놈이야. 곧 조선의 영화계는 내 손안에 있다고 큰소리는 치지만 글쎄 그건 두고 볼일이고.”

그러자 그는 히쭉 웃어 보이며.

“두고 보기요. 내래 일 년 안에 조선영화를 휘어잡는 대 스타가 되겠슴둥.”

자심감에 가득 차 허세를 부린다. 도대체 저 짧은 신장과 용모에 가지고 어떻게 조선영화계를 휘어잡겠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때, 누군가 사옥 앞에서 그를 부른다.

“이봐 나군! 가서 담배 한 갑만 사와.”

“네이...”

마치 종노비 처럼 달려가 굽실굽실 허리를 굽히며

“낙타로 사올까? 아님 피젼으로 사옴둥?”

“낙타로 사오고 잔돈은 자네가 갖게.”

“하하.. 잔돈까지 주신다니 황공무지이지비.”

돈을 받아 들고는 바쁘게 사라진다. 그게 월화가 기억하는 나운규의 전부다.

후에 들려오는 소문에는 나운규는 월화가 부산을 떠난 후 백남 선생의 <운영전>에서 가마를 매는 교군 역할의 단역을 맡았단다.

카메라가 계속 나운규의 뒷모습만 찍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뒤 만 찍는 활동사진 난 안 찍겠슴둥.”

매고 있던 가마를 집어 던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 가마가 빈 가마였기 망정이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허리께나 다쳤을 거라는 후문도 들려 왔다. 그리고는 촬영장을 사라져 경성으로 간다며 가 버렸단다.

그런 나운규가 일 년 후, 이제 한편의 활동사진 <아리랑>을 갖고 나타나 월화 앞에서 큰소리를 치며 “내 일 년 안에 조선 영화를 휘어잡는 대스타가 되겠소” 라는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못난 얼굴이지만 잘 좀 봐둘걸.

도대체 그가 만든 <아리랑>이란 영화가 어떤 영화이기에 저리 야단이란 말인가? 월화는 호기심에 몰래 늦은 시간 단성사 극장을 찾아 들어갔다.

극장 안은 주로 남자관객들로 만원을 이뤘지만 3분의 1로 구분된 부인석에도 여인네들로 가득 차 있다. 주로 여학생들, 그리고 박하분 냄새가 진동하는 기생들, 그리고 여염집 부녀자들과 노부인들도 보였다.

월화는 그녀들 틈에 끼어 앉았다. 다행히 그녀들이 월화의 얼굴을 몰라본다.

불이 꺼진 어두운 극장 안에 한줄기 빛이 쏟아지고 ‘개와 고양이’ 라는 자막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며 미친 영진의 모습이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맞아! 틀림없는 저 얼굴이야.”

나운규는 미친 모습으로 산천을 이리 저리 뛰어 다닌다.

그가 악질 마름 오기호의 뺨을 때리고 덩실 덩실 춤을 추며 동네를 누비다 이번엔 순사의 뺨을 때리며 하는 대사는 바로 “진시왕도 죽었다지?” 라는 대사였다.

이 대사가 나오자 극장 안에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 찬 관객들은 “암! 진시왕만 죽나? 일본왕도 죽고 그 악독한 조선 총독인들 안 죽고 베길까?”

결국 그 말은 일본도 망하고 만다는 의미 있는 대사를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 갖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영진의 여동생 영희로 나오는 16세의 소녀 신일선의 처녀 출연이 신선하게 다가 왔다. 그녀는 용모나 기예(연기)는 영화배우로써 충분한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월화는 그런 그녀가 부럽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라는 회한의 감정만이 떠오른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고 동리사람 모두가 풍년놀이에 흥겨워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무려 수백 명이 넘는 인원이 춤을 추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때, 혼자 집을 지키는 영희를 호시탐탐 노리던 오기호가 겁탈을 하려하고 그것도 모르는 미친 영진이 꽹과리를 치며 희희낙락 할 땐 관객들은 너무도 초조하고 안타까워 마구 발을 굴리며

“영진아! 너 뭐하냐? 빨리 집으로 가서 네 동생을 구하지 않고?”

모두 스크린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영진이 집으로 달려 갈 때는 연신 환호가 터져 나오고 오기호를 낫으로 찔러 죽일 땐 통쾌한 박수가 극장을 떠나 갈듯 쏟아 졌다.

마지막 정신이 돌아온 영진은 그제야 자신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걸 알게 된다. 경관은 영진의 파리한 손목을 묶는다.

“너는 살인자니 가자.”

“아니? 제가 사람을 죽였단 말입니까?”

“오빠! 이제 정신이 드셨구려. 흑흑..”

“아버지! 이 불효자식을 용서 하십시오.”

“영진아! 이 아비는 아무 할 말이 없다.”

“내 친구 현구! 내 여동생과 우리 가족을 부탁하네.”

“그런 걱정이랑 말게나.”

“여러분! 나는 한동안 죽었던 몸으로 이제야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울지 마시고 웃음으로 나를 보내 주십시오. 여러분 내가 불렸다는 아리랑을 다 함께 부르며 나를 보내 주십시오.”

동리사람들은 모두 울며 아리랑을 부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영진은 흐느껴 우는 동리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화면 속에도 아리랑이요. 극장안의 모든 관객들도 따라 울며 아리랑을 부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히하고

동냥의 쪽박이 웬 말인가.”


과연,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슬픔이 그대로 들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민족의 수난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식을 맥맥히 심어 주면서 일본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출한 예술적 성과로 대 성공이었고, 오락적 요소로도 대단한 한편의 활동사진으로 온 국민의 마음에 민족혼의 불을 붙인 극적구성을 연출한 나운규의 영화정신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영화는 끝났지만 관객들은 일어설 줄 모른다. 두 눈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서럽게 운다. 아직도 아리랑을 부르며 울며 흐느끼는 사람도 있다.

월화도 눈물을 훔치며 감동에 젖어 극장을 빠져 나왔다. 극장 앞은 어둠속에 마지막 상영을 끝내고 나온 인파들로 가득하다. 월화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길을 건너 피맛골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누군가 낮 익은 사내가 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극장 간판을 바라보고 서 있다.

월화는 그 사내를 보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으나 분명 몇 년 전, 부산 키네마 사옥 앞에 빗자루를 들고 서있던 그 사람이었으며 방금 극장 화면 속에 미쳐 날 뛴 주인공 영진이며, 또한 일 년 만에 조선 영화계를 휘어잡은 대 스타 나운규였다. 그는 어둠속에 숨어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던 중이었다. 돌연, 그 사내가 이번에도 월화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허리를 구십 도로 꺾고 손을 휘저으며

“월화 여왕님! 어인 행차이지비?”

처음 만났던 날의 인사를 똑 같이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월화는 그의 영화 속 대사가 떠오른다.

“진시왕도 죽었담둥?”

뭔가 쇠망치로 월화의 가슴을 쾅! 내려치는 것 같다. 그 대사는 바로 “이월화도 죽었다지?”로 바뀌어 들려온다. 그런 나운규의 반가움에도 불구하고 월화는 급히 몸을 돌려 어둠의 피맛골 골목사이로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지형 감독이 쓰는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인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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