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27)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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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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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27) 스무고개


[인터뷰365 유지형] “우리가 만난 게 오래 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최근 입니까?”

“최근은 아닙니다.”

“경성에서 만났습니까?”

“경성은 아닙니다.”

“그럼 부산 입니까?”

“부산도 아닙니다.”

“그럼 인천입니까?”

“인천도 아닙니다.”

“그럼 어디지? 아이...남 애간장 태우지 말고 가르쳐 줘봐요?”

“아직 열다섯 고개 남았습니다.”

그 남자를 만나며 스무고개는 시작 되었다. ‘스무고개’란 중국 춘추시대에 춘추잡기라는 놀이의 한 종류이며 또한 일본에서도 ‘20개의 문’ 이라는 이름으로 즐겨 노는 문답식 놀이이다. 오늘도 스무고개를 통해 이 남자와의 만남을 기억해 내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번의 만남이 전생과 현생, 그리고 후생까지 이어진다는데...

어디에선가 분명 낯이 익은 이 남자를 어디서 만났는지 통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디서 이 남자를 만난 걸까? 허긴 어디서 만난 것이 중요할까?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지금 월화는 이 남자의 품안에 안겨 있다. 그것도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그 남자는 월화의 여체를 넓은 가슴 속으로 모두 가려주고 있다.

창문 사이로 세어 들어오는 한줌의 햇살이 유독 월화의 두 눈에 파고들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주말이면 가까운 교외로 나가 밀회를 즐기고 있다. 사업상 바쁜 그의 업무 때문에 멀리 갈수 없기에 경성에서 가까운 곳으로 일 박 이일로 장소를 정해야 했고 오늘도 월화와 정균은 정릉 근처의 한 산장식 여관을 찾았다. 주택가와 떨어져 숲속에 자리 잡은 한적한 이곳 여관은 한 마디로 수상한 남녀가 쉬어 가는 장소가 분명하다.

좀 전에도 육덕 좋은 한 사내가 도착하자 이어 인력거를 탄 기생차림의 여자가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옆방이 남녀의 묘한 소리로 시끄러운 걸 보면 아마 이들이 옆방이 묶은 것이 분명하다. 옆 객실의 소리와 무관 없이 두 사람은 스무고개를 풀기에 여념이 없다. 언제나 다시 만나면 스무고개는 첨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습니까?”

“그건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 만나긴 만 난겁니까?”

“네, 분명 만났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신정균이라고 합니다.”

신정균이라는 이름의 이 남자는 겨우 보통학교를 나온 학력으로 어린 나이에 인쇄소 직공으로 들어가 기술을 배우며 고생을 한 끝에 지금은 조선에서 몇째 안가는 정판사를 경영하는 사업가로 성공하였다.

처음 만나던 날, 정균은 화신백화점 안에 있는 조선최대의 보석상인 보옥당에서 진주 목걸이를 사와 월화의 목에 걸어 주었다. 다음날 월화는 그 목걸이를 조씨에게 주어 보석상에 보내 가격을 알아보았더니 무려 백 원이나 하는 고가품이었다. 이 목걸이를 현금으로 바꿀 경우 얼마나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보석상 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두고 간직하면 가격이 오를 텐데 굳이 파신다면 삽 십 원을 깎아 칠십 원은 받아 줄 수가 있다고 했다.

조씨는 분명 입질이 성공해 월척은 아니라도 대어를 낚은 것은 분명하다고 했지만 월화는 왠지 자신이 매소부라도 된 듯 찜찜하고 기분이 안 좋다. 그냥 만나면 될 텐데 괜한 목적을 만들어 내 자신이 나쁜 여자가 되어야 하는지... 더욱이 이 남자는 늙거나 신체에 결석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남자는 내게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늘 친절하고 부드러웠으며 언제나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그의 각이 진 얼굴의 옆모습은 남자다운 아름다움으로 모자람이 없다. 거기다 재력까지 있으니 더 이상의 금상첨화가 아니던가? 월화가 보기에는 이 남자는 분명 오입쟁이나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 계통에 도가 튼 화류계 남자들은 여자는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자에 접근하는 방식이 서툴기 그지없다. 입맞춤도, 애무도,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까지도... 그는 세련되지 못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몰아간다. 아니, 어찌 보면 나를 존경하여 나의 감정과 육체까지도 배려하려는 온화한 마음의 행동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치와 허영으로 들 뜬 여배우를 좋아하는 남자가 되어 있는지 그게 통 의문이다.

오늘도 정균은 월화의 손가락에 팥알만 한 다이아 반지를 껴 주었다. 그럼에도 월화는 왠지 시들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런 표정에 그는 실망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왜 맘에 안 들어?”

“그런 건 아니지만, 이거 너무 사치인데... 나 그렇게 사치스런 여자 아니에요.”

“스타가 그 정도는 끼고 다녀야 하지 않겠소?”

“이런 거 말고...”

이제 슬슬 월화의 본색이 나온다.

“집을 사달라는 그 말이요?”

“맨 날, 이렇게 남의 눈 피해 교외로나 나다닐 수도 없고, 당신이 집 한 채를 사주면 만나기도 좋고, 행동거지도 자유롭고..”

이건 조씨의 각본이다. 집을 사도 고래 등 같은 집을 그것도 와룡동이나 봉익동 종로 쪽으로 땅 값이 비싼 곳에 집을 사야 되 팔 때 재 값을 받는단다.

혹시 교외로 나갈 경우는 홍제동이나 자문박 정도 그것도 배 밭이나 사과밭이 수백 평은 딸린 집을 사달라는 것이다.

“그건 좀 더 두고 봅시다.”

“흥! 누가 남자 속을 모를 줄 알아요. 그냥 이렇게 여관방이나 전전하며 데리고 놀다가 버리려는 수작인 걸.”

다음은 바로 눈물연기가 시작된다.

“흑흑..”

“울지 마... 그런 게 아니니까”

“아니긴 뭐가? 집 사줄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흑흑.. 엉엉..”

수도꼭지처럼 주룩 주룩 흐르는 월화의 눈물을 보며 정균은 답답하다는 듯 월화를 물끄러미 보더니 무겁게 입을 연다.

“집을 사주면 연극을 관두고 집에 들어 앉아 살 수가 있겠소?”

“.......?”

아니. 이런 복병이 숨겨져 있을 줄은? 집을 사주면 나보고 집에 들어 앉아 살림이나 하란다. 여배우의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내 던지고 가정으로 돌아가라니? 그렇다고 이 사람은 이미 유부남. 내가 정실도 아니지 않는가?

“...............”

월화가 망설이자, 그 남자는 이제 정답을 찾았다는 듯 확실하게 도장을 찍는다.

“당신은 여배우라는 직업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여자요. 그걸 내가 욕심을 내어 당신을 구속하면 안 되지. 언제고 당신이 진심으로 날 사랑하고 나와 살고 싶다면 그때는 내 당신에게 고대왕실 같은 집은 못 사주겠소.”

그렇게 이 남자는 월화의 입을 막는다. 결코 허투루 봐서는 안 될 그런 남자가 분명했다. 이런 사실을 조씨가 듣고는 손을 훼훼 내저으며

“다 널 희롱하고 버리려는 구실이고 거짓말이다. 사내가 통이 커야지. 그깟 집 한 채가 얼마나 한다고, 그래서 지지리 고생해서 자수성가 한 사람들은 모두 그 모양이라니까.”

이런 줄도 모르고 조씨는 오늘도 집을 보려고 장안의 복덕방을 헤매고 다녔다.

더욱이 그녀는 극장가를 떠돌며 포스터나 붙이던 사내 하나를 데려다 감독을 시키네, 시나리오를 쓰네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다.

“어떠냐? 그깟 보석 나부랭이로 네 환심을 사려는 사내는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통 큰 사내를 만나보자꾸나. 너만 작정한다면 백만장자인들 못 만나겠냐.”

이런 조씨의 성화에 월화는 그저

“조금만 두고 보세요. 꼭 그 사람한테 집을 사달라고 할 테니.”

도리어 달래는 경우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 남자가 좋아 진다. 집을 안 사줘도 보석을 안 사줘도 좋다. 매주 주말, 그 사람을 만날 일로 일주일이 설레고 행복하다. 이제 그 사람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과 함께라면 연극이고 영화고 다 버릴 수 있는 내 자신을 느낀다. 그걸 걸 먼저 알아차린 건 고맙게도 그 사람이 먼저였다.

“집을 사주겠소. 그런다고 연극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당신은 여배우니까 무대가 관객들이 당신을 부를 때가지 함께 해야 할 것이요. 그런 당신이 자랑스럽소.”

월화는 정균의 품에 안겨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강이 은빛 물결로 출렁이는 원앙선이라는 연인들을 위한 놀이배 위에서 였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록 정균에게서는 만남의 연락이 없다. 주로 그의 만남은 그가 대절한 인력거나 자동차를 내게 보내면서 이루어 졌다. 열흘 동안 조씨는 입이 함빡 만하게 째져 한 복덕방의 주선으로 수송동에 오십여 칸짜리 새로 신축한 한옥 집을 찜 해 놓았다. 그녀의 속셈으로는 이 집을 샀다가만 팔아도 이문이 이활을 남는 요적의 물건이란다. 그동안 정균이 해준 보석과 패물을 팔면 그 돈이 어연 오백 원은 넘고 그 집도 천원은 넘어 받을 수 있으니 그 돈이면 활동사진 한편 정도는 너끈히 찍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집을 사주겠다는 정균에게서 연락이 없으니 이처럼 답답하고 난감 할 수가 없다. 결국 조씨가 그 사내를 수소문 하고 나섰다.

“그저 남자들이란 속 다르고 겉 다르니, 내 이 인간 내 눈에 띄기만 해봐라.”

입에 거품을 물고 나간 조씨는 저녁이 되어 힘없이 돌아 왔다.

그녀는 수족에 힘에 빠져 털퍼덕 마루에 주저앉으며 한숨 같은 넋두리를 해댄다.

“그 양반 참 복도 지지리도 없지. 글쎄 그 양반이 운영하는 정판사가 며칠 전 화재가 나서 잿더미가 되었더구나. 그 잿더미 속에서 뭐라도 하나 건저 보겠다고 숯덩이 되어 있는 그 양반 꼴을 보니, 세상 참 인생무상이라고.. 공연히 우리가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도 들더라?”

‘그럼, 그렇지. 그 사람이 날 속이고 날 배신하고 희롱하며 떠날 사람은 결코 아니다.’

공연히 나쁜 생각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우선은 안도의 안심은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의 앞날이 걱정이다. 어려서부터 고생 끝에 자수성가로 이만큼 성공을 이루었으니 또 다시 심기일전하다면 다시 성공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 사람 정도면 능히 해낼 사람이다.

월화는 그 동안 장롱 안에 모아 논 보석과 패물을 조씨 몰래 챙겨 화재 현장으로 그 사람을 찾아 갔다.

조씨의 말처럼 불탄 정판사의 자리는 그야말로 잔혹한 폐허의 현장이었다. 그 폐허 속에 망연자실 서 있는 정균을 보자 월화는 뭐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균은 월화를 발견하고 의외라는 듯 다가와 한마디 한다.

“이제 당신한테 집을 사줄 수 없게 생겼소.”

월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검댕이가 된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집은 필요 없어요. 당신만, 당신만 있으면 되요.”

“아니요! 내가 잘못했소.. 하늘이 나를 심판한 거요. 내 주제에 여배우라니 그건 너무 심했지.”

“그럼 나와 헤어지겠다는 거예요?”

“미안하오. 이제 내 처에게 돌아가겠소. 다시 시작하겠소.”

“.........”

월화는 그가 그동안 사 준 패물과 보석이 담긴 보따리를 내 주었다.

“자! 당신 거예요. 이것들이 당신이 재기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그건 내가 당신에게 준건데?”

“잠시 맡아 놨던 것뿐이에요.”

그는 말없이 내가 건넨 보석꾸러미를 들고 서 있다.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볼게요.”

발걸음을 띠려는 월화를 그 남자는 불현듯 가로 막으며

“아직 스무고개가 안 끝났소?”

“알아요! 당신이 누군지.”

“아니... 어떻게?”

“지금 막 생각이 났어요.”

“정말 그걸 알아냈단 말이요?”

“우린 제주도의 한 바닷가에서 만났어요. 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신은 관광객이었지요.”

순간 월화의 귀에 파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날, 서귀포에 있는 바닷가에서 <해의 비곡>의 로케이션 촬영이 있던 날이다. 뜨겁게 달궈진 모래사장 위, 작렬하는 강한 태양의 찬란한 빛 속으로 한 사내가 성큼 성큼 모래를 밝으며 월화에게로 다가왔다.

월화는 파라솔이 쳐진 간이의자에 앉아 분장사에게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그 남자가 파라솔의 그늘 안으로 성큼 들어 왔다. 월화는 깜짝 놀라 이 낮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결코 무뢰하지 않게 월화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행동처럼 말은 어색하게 머뭇거리며 입은 연다.

“저..혹시 월화의 맹서에 나온 이월화 여사님 아니세요?”

“네! 맞는데요.”

“아! 이거 영광입니다. 이렇게 이월화 여사를 직접 만나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여기 사인 한 장 만..”

그는 월화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구 했다. 여배우 이월화의 첫 애호인의 탄생한 순간이다. 월화는 그가 내민 종이의 흰 여백 위에 내 이름 석 자를 멋지게 휘갈겨 써주었다.

환청으로 들려 온 파도소리가 사라지며 월화와 정균은 다시 잿더미가 된 현실 앞에 서 있다.

“당신은 내게 첫 사인을 해 달라는 내 영화의 팬이었어요.”

“그렇소! 그날부터 당신을 사모하게 되었소.”

“그때 내 사인이 적힌 종이를 지금도 가지고 계시나요?”

“물론이요! 난 영원한 당신의 열성 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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