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24)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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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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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여배우의 길 / 유지형




(24) 카츄사


[인터뷰365 유지형] “카츄사 내 사랑 이별하기 서러워

몰아치는 저 눈보라

신의 기도가 (라라) 종소리처럼 들려오네요.


카츄사 내 사랑 이별하기 서러워

눈물의 눈보라 속을

나는 저 멀리 (라라) 시베리아로 떠나갑니다.”


온통 무대는 백야를 상징하는 흰 색의 설원이다. 땅도 나무도 구름도...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설원 위로 눈이 내린다. 무대 뒤의 흰 배경에 원근법으로 그린 뾰족하게 첨탑이 솟은 교회당이 멀리 보이고, 무대 천정위에서는 언제부턴가 눈을 대신한 흰 종잇조각이 무수히 떨어지고 있다. 마치 무대는 온통 설국의 세상을 그려 논 한 폭의 그림 속에 역시 그림의 일부 같은 한 여자가 종이 눈을 맞으며 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카츄사 카츄사 이별하기 서러워

언제까지 당신만을

영원히 (라라) 사랑하다고 전해 주세요.


이 무대 위에 여자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에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의 여주인공 카츄사이며 그 역을 맡은 여배우는 이월화이다.

슬픈 그녀의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무대 오른쪽에서 한 남자가 등장한다.

노란 금발 가발을 쓰고 금단추가 주렁주렁 달린 녹두색 더블 코트를 입은 네프류도프로 분한 이응수이다. 그는 무대 중앙으로 다가와 카츄사 앞에 서양식 인사를 하고는 한발로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를 간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시작한다.

“카츄사! 떠나지 마시오.”

“오! 네프류도프 공작님! 이곳이 어디라고 절 따라 오셨나요?”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버렸소. 공작이라는 명예도, 고등 배심원이라는 지위도, 그리고 약혼녀와도 파혼을 하고 따라 온 거요.”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셨나요?”

“이제 난 카츄사!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뭐라고요? 결혼이라고요? 어쩌자고 그런 결심을 하셨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에게 용서 받는 길이고,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아니에요. 당신은 용서를 구할 만큼 죄를 짓지 않으셨어요. 혹시 죄를 졌다 해도 그런 벌써 오래전 지난 일인걸요.”

“이제라도 나를 용서하고 나의 사랑을 받아 주시오.”

“이젠 모든 게 끝났어요. 나는 나의 길을 가고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야해요.”

“진정 저 추운 시베리아로 떠나야 한단 말이요?”

“네! 저는 떠납니다.”

“오! 카츄사!”

“안녕!”

“안녕히..”

네프류도프는 손을 내밀어 카츄사와 악수를 하고 그 손에 고개 숙여 입맞춤 하고는 아쉬운 듯 그녀를 올려보더니 몸을 돌려 대각선의 동선을 향하며 무대를 퇴장한다. 이제 무대 위에 홀로 남은 카츄사는 더욱 쏟아지는 종이 눈을 맞으며 객석을 향해 바라보며 마지막 대사를 한다.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 얻게 되리라.

그렇다! 이제 하나의 일은 끝났다. 이제 또 다른 일이 시작된다. 안녕.. 안녕!”

종소리가 크게 들려오며 무대 막 뒤에서는 여성 코러스가 ‘카츄사의 노래’를 허밍하며 더욱 목소리를 높인다. 언제 부턴가 객석의 관객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이제 카츄사는 관객을 향해 한발을 뒤로 하고 양손을 교차하여 사뿐히 허공으로 올리고 다시 내리며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안녕... 안녕!”

온통 극장 안은 감동의 환호로 넘치고 있다. 요란한 박수소리가 쏟아진다. 그리고 천정으로부터 무대의 막이 서서히 내려와 닫치고 있다.

월화는 이제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 왔다. 영욕과 상실의 가시밭길 같은 고통스러운 날들을 뒤로 하고 안개가 자욱이 깔린 영롱한 무지개다리를 건너 그녀의 고향인 연극무대로 돌아 왔다.

무대는 예전 변하지 않은 모습 그대로 인 채 그녀를 반겨 주었다. 막 뒤에서 풍기는 쾌쾌한 곰팡이 냄새도, 무대 허공 위로 부유하는 미세한 먼지도 그녀에게는 모두 반갑다. 더욱이 관객의 박수와 갈채는 그녀의 어깨에 다시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녀는 이제 다시 찬사 받는 여배우로 그 하얀 깃털의 날개를 달고 또 다시 하늘로 더 높이 비상하기 시작했다. 다시는 추락하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렇게 박수 소리가 요란한 채 막이 내린 무대 위를 떠나지 않고 오래도록 서있었다.

두 달 전, 월화는 부산에서 돌아 온 후, 내리 들어 누어 앓았다. 그녀는 새벽 기차에 내려 전차를 갈아타고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 창성동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들어서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 섞여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골목길을 꺾어 마치 서너 시간 전에 외출을 하고 돌아 온 것처럼 다 찌그러진 집 대문을 두드렸다.

작은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복동이가 대문을 열어주자 왜 빨리 문을 안 여느냐고 눈총을 주고는 핸드백과 트렁크를 건네고 대청으로 올라선다.

딸의 기척을 느끼자 안방에서 화투로 심심풀이 오관을 띠고 있던 조씨는 댓바람에 서두르듯 방문을 연다. 허나,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방안으로 향하는 월화의 뒷모습을 이게 꿈인가, 생시 인가?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월화는 자신의 방인 건넌방의 방문을 활짝 연다. 방은 언제나 그렇듯 깨끗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월화는 방안에 들어서자 침구도 피지 않고 방바닥에 마른 짚단 쓰러지듯 쓰러져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고열에 식은땀을 흘리며 앓기 시작했다.

조씨는 죽은 딸이 살아 돌아 온 것 같은 심정으로 인삼탕을 달여 먹이고 지극정성으로 월화를 보살핀다.

조씨는 부산에서 일 년 간 이나 소식을 끊고 살다 온 월화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더욱이 백남 감독의 영화에서 배역을 얻지 못해 쫓기 듯 경성으로 올라 온 그 원인에 대해 자초지종을 묻고 싶지만 월화가 저렇게 입을 굳게 닫고 있으니 더욱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나 조씨는 눈치 하나는 바싹한 여자이다. 월화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 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세인들은 모든 걸 알고 있다. 그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는 이런 내용으로 두 여배우의 최초의 배역 다툼을 다루고 있다.

‘조선 키네마사 제2회 작품으로 윤백남 각색 <운영전>을 박기로 되었었는데 이때에 여배우 이월화와 김우연 두 사람의 ‘스타’ 다툼이 일어 났습니다. 총감독자인 윤백남은 김우연으로 하여금 ‘운영의 역’을 맡게 하겠다고 하자 이월화는 실제 연기나 경력으로 보아 자기가 나은 것은 누구나 다 알 터인데, 자기에게 운영을 맡기지 않는다니 이건 전혀 전속계약에 어긋난다 하여 반대를 해 보았으나 통하지 않자 분연히 사퇴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스타다툼으로 조선에 서는 첫 다툼이었습니다.’

그렇게 사흘을 앓고 월화는 일어났다. 더운물을 데운 후 부엌에 들어가 목욕을 했다. 그 사이 조씨는 며칠간 사골을 넣어 푹 고은 사골탕을 덥혀 밥상을 차려 놓았다.

목욕을 끝낸 월화는 사골탕 국물에 밥 한 그릇을 말아 국물도 남기기 않고 다 먹었다. 그런 월화를 조씨는 측은지심으로 바라본다.

“엄마! 미안 해.”

그동안 의절한 것이 미안 한 건지 아니면 나흘 간 앓아누운 것이 미안 한 건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조씨의 대답은 겨우 “미친년!” 하며 입을 삐죽일 뿐이었다.

다음날 월화는 조씨가 황주부네 가서 진맥이나 받아 보자는 성화를 거절하고 곱게 화장을 하고 일 년 동안이나 옷장에 모셔 두었던 연두색의 양장을 차려 입고 외출을 했다.

그녀가 간 곳은 우미관 극장 앞이었다. 오늘도 극장 앞은 둥둥- 북이 울리고 악사들의 연주가 들려온다. 극장 앞에는 피에로 복장의 광대들이 전단을 돌리고 울긋불긋 반짝이 양복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변사는 나팔관을 들고 외쳐 댄다.

“자, 자! 어서들 오십시오. 활동사진! 활동사진의 본 고장 구라파에서 온 신기하고 재미있는 활동사진이 방금 봉절 했습니다. 개화된 생명도시 속에 절승한 광경이 펼쳐지며 그 속에 넘치는 사나이들의 숨 막히는 활극과 청춘남녀의 애절한 정분이 가득 박힌 활동사진을 구경하지 않으시면 평생 후회 하실 것 입니다! 자, 자! 어른은 30전! 아이는 15전! 곧 입장표가 매진되오니 어서 서두르십시오.”

대사의 내용은 예전 그대로 이었다. 단지 미주 영화가 구라파 영화로, 혹은 이태리 영화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변사는 많이 늙어 있었다.

“변사 아저씨. 안녕!”

월화는 다가가 그 예전 어릴 적 소녀처럼 인사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젠 대스타가 된 꼬마 아가씨가 아니던가.”

변사는 월화를 알아보았다.

“아저씨는 예전 그대로이시네요.”

“그대로긴... 이젠 숨이 차서 오래 못한다.”

변사는 메가폰을 조수에게 넘기더니 월화를 극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입구에는 기도를 보는 덩치 큰 청년이 중학생 복장의 아이 하나를 무릎을 꿇어 놓고 기압을 주는 게 아마 극장을 쌔벼 들어가려는 아이를 잡아 놓은 모양이다. 변사는 자랑스럽게 청년에게 말한다.

“너도 잘 알지? 이월화 여사라고 활동사진 출연하는..”

“어? 아.., 네.”

청년은 월화를 보더니 얼굴이 붉어져 말만 더듬을 뿐이다.

“야! 너 매점에 가서 시원한 레모네이드 두 잔만 가져와!”

“아.. 네, 네..”

변사는 월화를 매표실 옆 작은 사무실로 안내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실이라기보다 포스터를 쌓아 놓은 창고이다. 그래도 헌 가구나마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누추하지만 앉아.”

말을 놓지만 그래도 변사의 태도는 정중하다. 두 사람은 탁자 앞에 마주 앉는다.

“어머! 저 포스터는 <시들은 꽃송이>에 릴리언 깃슈! 여긴 <파리의 여인>의 매리 빅 포드 아니에요?”

월화는 벽에 누렇게 변해 붙어 있는 외화 포스터를 가리킨다.

“벌써 몇 년 전 영화지. 저때만 해도 내 전성기 였는데?”

문이 열리며 레모네이드가 왔다. 배달한 사람은 좀 전에 벌을 서던 중학생 소년이다. 아마 청년은 자기가 가져오기 멋쩍은지 대신 심부름을 시킨 모양이다.

“이놈아! 맨날 극장에 쌔벼 들어 올 궁리만 하지 말고 공부를 해라.”

소년이 얄개처럼 씩 웃는다.

“오늘은 이왕 들어 왔으니 구경하고 내일 부턴 오지 마.”

“넷! 고맙습니다.”

소년은 신이나 문을 닫고 나간다. 두 사람은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마신다.

“이제 이 변사라는 직업도 곧 없어질 것 같아.”

“어머! 변사란 활동사진이 존속하는 한 영원 한 거 아니에요?”

“지금 미주에서는 발성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이야.”

“발성영화?”

“영화가 말을 하는 거지. 말만 하나 노래도 하고, 음악도 연주하고, 자동차 소리, 개 짖는 소리, 방귀뀌는 소리까지 다 들리는 거지.”

제 딴에는 농이라도 하고 말하나 그 어떤 비감한 표정으로 탁자위에 놓여 있는 영화잡지를 펼쳐 보여 준다. 그 지면에는 ‘미주 성림 영화촌 유성영화를 위한 실험 활발’이란 기사와 함께 그에 관한 정보들이 적혀 있다.

“앞으로 영화는 과학의 힘으로 장족의 발전을 할 거야. 그에 따라 영화에 종사 하는 사람들도 달라질 거고 말이야. 그땐 변사라는 직업은 한낫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겠지.”

이 변사의 이름은 서상호이다. 그는 활동사진의 시작과 함께 우미관 극장의 우상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영광스런 몸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언처럼 불과 2년 후, 1927년 할리우드는 <재즈싱거>라는 토키영화가 만들고 지고, 이 소리가 살아있는 영화는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5년 후, 조선에서도 발성 영화 <춘향전>이 조선의 영화기술의 형제인 이필우, 이명우에 의해 만들어 진다. 이제 차츰 극장에서는 무성영화가 완전히 사라져간다. 그런 극장 매표소 앞에 서서 구걸을 하며

“저 왕년의 변사 서상호 입죠. 한 푼 적선합쇼.”

이렇게 초라한 말년을 보내게 될 줄은 지금의 이 늙은 변사는 자신의 운명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월화는 변사와 헤어져 극장을 나왔다. 변사의 불안한 미래는 월화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선다. 활동사진 속에서 자신의 입으로 말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축복일까? 과연, 앞으로 영화는 찍을 수가 있을까? 아니면 연극무대라도 서야 할 텐데, 불과 일 년간의 부산생활이 이렇게 경성에서 낯설 줄 몰랐다.

그런 골똘함에 거리를 걷다가 전봇대에 붙어 있는 광고 포스터를 발견 했다. 광고지는 정구공을 선전하는 광고 였고 ‘건강한 체력과 힘! 생활의 여유! 빅토릭 정구 공’이라는 글씨와 함께 낮이 익은 미남이 흰 운동복에 라켓을 멋지게 휘두르는 포즈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 사진속의 미남은 이응수 이었다.

민중극단 시절, 중국 요릿집으로 데려가 탕수육으로 허기를 달래주던 그 여형배우 이응수가 파머머리의 가발을 벗어 던지고 충만한 근육질의 사내의 모습으로 광고지 속에 살아 있다. 사실 이응수는 미남에 건장한 체격으로 10종 경기에도 출전할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그가 여배우 없는 무대 위에서 비록 여자 역할을 하였고 그 여형배우의 매력에 빠져 잠시 여장남자로 살았지만 이제 여배우들의 등장으로 그는 다시 건강한 남자로 돌아 온 것이다.

월화는 전단지 아래에 정구공 회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근처 전화기가 있는 카페로 들어가 전화를 걸어 이응수의 연락처를 묻는다.

여러 직원을 거쳐 담당자가 나왔다.

“저, 이응수씨와는 어떤 관계로 연락처를 묻는 겁니까?”

대뜸 이응수와 어떤 관계냐고 물어 왔다.

“같은 극단에서 연극을 하던 사이인데 제가 지방을 다녀와서 연락이 끊겼네요?”

“실례지만 성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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