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4)
소설-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4)
  • 유지형
  • 승인 200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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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여배우의 꿈 / 유지형




(4) 여배우(들)


[인터뷰365 유지형] 어둡고 음습한 분장실 안은 소녀들의 재잘거림으로 반짝 반짝 빛나고 있다.

그녀들의 영양가 없는 잡담 속에 터져 나오는 순백한 웃음소리는 끝날 줄 모른다.

외모만 빛날 뿐 허영으로 가득 찬 아직은 병아리 배우인 그녀들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갖는 척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상대에 대한 질투와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

서로에 대한 옷차림은 물론 화장법, 머리 모양, 그리고 작은 귀걸이 하나까지도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녀들은 지극히 순진하고 단순해서 합리적인 사고를 갖지 못했다. 자신이 제일 예쁘다는... 자신이 제일 연기를 잘 한다는... 아니면 외국 여배우 누구와 제일 많이 닮았다는... 이런 일방적인 편견과 집착들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그녀들은 모두가 백설 공주이고 잠자는 숲속의 미녀들이다. 단지 아직은 그녀들을 구원할 왕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여기서 왕자란 미증유의 대상이다. 사람 일 수 있고... 돈 일 수도 있으며... 그리고 기회의 시간일 수 도 있다. 언제고 곧 그 대상만 나타난다면 그들 앞에는 화려한 여배우의 미래가 펼쳐 질것이다.

미국 영화 <동도>에 깨어진 얼음을 타고 연인을 찾아가는 릴리안 깃슈가 되고 일본 연극의 대모 가와가미 사다얏코가 되고 극단 <취성좌>의 대표이며 궁녀 출신인 조선 최초 연극 무대의 여배우 마호정이 될 것이다.

사실 이들 소녀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가 되겠다고 가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혹시 그렇지 않다해도 집안에서 극단에 다니는 것을 모른다. 아마 배우가 되려는 사실을 안다면 당장 머리가 깎이거나 막말로 다리몽둥이가 부려질 판이다.

가출한 소녀들은 무보수의 극단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직업전선으로 나서야 한다. 어느 소녀는 우동 집에 종업원으로... 혹은 미쓰코시 백화점이나 조지아 백화점에서 시간당 아르바이트인 마네킹 걸을 하는 소녀도 있다. 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혼마치의 저속한 카페에 여급으로 나가고 있는 아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소녀들의 고생은 오직 유명한 여배우가 되는 것으로 보상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상의 길이 멀고 험하기에 그녀들은 늘 빈속의 허기와 같은 정서에 늘 시달린다. 한 소녀가 분장대 거울을 보며 눈가에 흑연을 그려 대며 투덜거린다.

“내 눈은 이게 뭐야? 가재미눈처럼 짝 째져 가지구.. 도쿄에 가서 쌍까풀 수술이나 받을까?”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소녀 역시 불만스런 목소리로

“난 내 이 납작한 코가 미워 죽겠어. 클레오파트라의 코처럼 높은 코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들의 대화의 내용은 자신들의 외모와 관련된 어떡하면 더 예뻐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전부인 세상 모든 소녀들의 공동 관심사로 모아 진다.

“요즘은 경성의 병원에서도 비형술을 해 코를 높인 다더라. 그런데 수술비가 만만치 않데?”

“수술비가 얼마나 들까?”

“웬만한 집 한 채 값이 넘는 다더라.”

“아이고..차라리 앓으니 죽지.”

“그러니 모르는 게 약이란다. 호호...”

그런 소녀들은 빈 강정 같은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숙은 분장실 구석 거울 앞에 언제부턴가 턱을 바치고 앉아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긴 속 눈썹이 달린 움푹 페인 쌍까풀을 지닌 서양의 여배우 같은 눈은 아니라도 유난히 검고 커다란 눈동자. 그리고 비형술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한 오뚝한 코, 동글지도 가름하지도 않은 하얀 얼굴. 내 미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불만은 없다.

정숙은 만족한 듯 해밝은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유독 흰 이가 상아처럼 빛나고 있다.

정숙은 괜히 눈을 깜빡거려 보고 입술을 씰룩여도 본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장이 맘에 안 든다. 기본이 되는 1호 도란은 너무 진하게 얼굴전체에 발라져 있다. 흰 분으로 얼굴을 칠하고 볼 만 살짝 붉은 도란으로 강조하면 될 텐데 분장을 직접 해준 분장사인 극단의 선배언니는 무섭고 사납기에 어쩔 수가 없다.

눈썹연필로 눈가를 덧칠하고 붉은 연지로 입술을 강조 하면 그런대로 조화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분장사 선배언니는 다른 여배우의 분장에 정신이 없다. 정숙은 마치 도둑질을 하듯 붉은색 루주를 입술에 갖다 댄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더욱 붉고 아름다워졌다.

이때, 분장실 한곳에서 마치 바짝 당긴 활시위가 줄이 끊겨지며 튕겨 나가듯 강한 고음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이..이게 아니잖아요. 얼굴에 떡칠을 하면 어떡해?”

앙칼지게 분장을 해주는 선배를 발딱 밀치고 일어나는 여배우가 있다.

순간, 분장실 안은 마치 성난 너울이 사정없이 밀려와 해안가 바위를 덮치며 제 몸을 산산조각을 내고 다시 고요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그런 정경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요에 도리어 놀라는 것은 다른 여배우들이다. 그녀들은 성질이 고약한 선배 언니의 성깔을 잘 알고 있다. 가뜩이나 연기를 못해 이번에도 배역을 따내지 못한 뚱보 선배언니는 극단에서 사고뭉치로 통한다. 그런 그녀가 극단에서 쫓겨나지 않은 건 그래도 여학교 미술시간에 재능을 보였던 붓놀림으로 분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열악한 극단재정이다 보니 화장품 등 분장도구가 부족하다. 사실 그녀는 그런 악조건 속에도 재 딴에는 분장에 열심이었다. 이렇게라도 모범을 보여 다음 연극에 역할을 따내려는 그녀의 의지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자존심에 찬물을 끼얹는 싸가지 없는 후배 년이 나타났다. 이건 엄연한 상명하복으로 유지되는 선후배 단원의 위계질서를 무너트리는 그야말로 하극상의 반란행위로 간주 된다. 셍긴 것 그대로 반남반녀로 이두박근의 체구에 이 뚱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상대를 노려보며 부르르 몸을 떤다.

“너 지금 뭐라고 씨불였냐?”

뚱녀는 따귀라도 올려 칠 듯 이 신입 여배우를 노려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여배우는 도리어 두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뚱녀를 노려본다. 다른 여배우들이 얼른 다가오며

“유리야! 어서 선배님께 잘못 했습니다 그래. 아니면 너 오늘 무대에 못 올라갈지도 몰라.”

불과 며칠 전에도 인사를 하는 태도가 건방지다며 사정없이 머리를 뜯기고 극단을 떠난 단원도 있었다. 다른 여배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리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더욱 기고만장 뚱녀에게 대든다.

“아니? 이걸 분장이라고 한 거야? 이게 내 배역에 어울리는 분장이라고 생각 하느냐고?”

이젠 대뜸 반말이다. 그녀가 맡은 배역은 인근 동네 여인2로 조역이다. 그것도 무대에 잠시 등장해 대사 몇 마디를 하고 퇴장하는 역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사납고 앙칼진 모습은 식을 줄 몰랐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돌연 뚱녀는 바짝 치켜세웠던 눈초리를 스스르 감추고 만다.

“아! 낸들 분장도구가 이것뿐인걸 어뜩하냐고? 기본 도란도 한 가지 뿐이고... 색 도란도 다 떨어 졌는데..”

방금 전까지 마녀 같던 모습의 그녀가 꼬랑지를 내리며 극단재정 핑계를 댄다. 그 말에 유리는 더욱 기고만장 극단전체를 싸잡아 큰소리를 친다.

“나 참...절름발이 극단 꼴이 어련할까 했더니만 역시네. 이래서 무명극단 앞에는 얼씬 거리지 않는 건데?”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극단을 폄하하는 이런 말은 너무 심하다. 더욱이 절름발이 극단이라니?.. 이 말은 극단 대표이며 연출 감독 선생님이 다리를 심하게 저는 소아마비 환자이기 때문이다. 불구의 다리를 절며 연극예술에 헌신한 공은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 열약한 무명 극단 형편을 어쩌란 말이냐?

도대체 무슨 저의로 저러는지 정숙은 도무지 그녀의 심정을 알 수가 없다.

사실 유리와는 입단동기이다. 그럼에도 한 달간의 연습기간 동안과 대전과 대구, 이곳 부산에 이르는 순회공연 동안 말 한번 부쳐보지 못했다. 왠지 그녀 곁에만 가면 찬바람이 휭 하고 불어 올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 싸움은 유리와 뚱녀와의 싸움이 아니라 극단 전체에 불을 지른 폭이 되어 버렸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분장실 문이 열리며 진행부원이 얼굴을 길게 들어내며 외친다.

“공연 10분전!”

자! 곧 공연이 시작된다. 싸우고 지지고 볶고... 그러면서도 막은 오르고 연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여배우들은 다시 분주하게 거울을 다시 보고 몸에 걸친 의상들과 자신들이 무대로 가지고 나갈 소품들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뚱녀는 다시 유리를 의자에 앉혀 놓고 마치 속죄라도 하듯 말없이 그녀의 덕지덕지 바른 기본 도란을 글리세린으로 지우고 다시 흰 분칠로 정성 컷 메이크업을 해준다. 유리는 이제는 당당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얼굴을 내 맡기고 있다.

정숙과 유리는 여주인공인 메리 역을 하기 위해 최종 배역을 놓고 경합했다. 그런데 연출선생님은 정숙을 최종선발 했다. 왜 정숙이 유리를 비롯한 많은 여배우를 제치고 최종선발 되었는지는 정숙 자신도 잘 알 수가 없다. 정숙의 주역선발에 그녀들은 입을 삐쭉이며 노골적으로 질시의 눈빛을 보냈다.

“흥! 분명 그 어떤 모종의 사바사바(청탁)가 있었을 거야.”

“와이로(상납)를 준 게 틀림없다니까”

정숙은 맹세코 그 절름발이 연출 선생님에게 그 어떤 청탁이나 부탁을 한 적이 없다. 정숙은 그럴 경제적 능력도 없을 뿐더러 도리어 청탁을 할 수 있는 쪽은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유리 그녀일 것이다. 그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유리는 연습장을 오고 갈 때 인력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부를 과시했다.

또한 그녀가 걸친 옷은 내수품이 아닌 수입품이 분명했다. 그러나 정숙은 언제나 연출 선생님을 향한 따뜻한 눈빛을 늘 보내고 있었다. 선생이 어디에 있던 무엇을 하던 돌아보면 그와 눈과 마주칠 수 있도록 정숙의 눈빛은 집요하게 선생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선생이었다. 선생은 그런 여성의 눈빛조차 받아 본 적이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정숙의 눈빛이 적중 한 걸까? 아니면 같은 경쟁상대인 유리의 눈빛이 상대적으로 너무 도도하고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하여튼 선생에게 보낸 정숙의 눈빛 때문에 주역을 따내리라고는 그녀 자신도 믿지 않는다.

정숙은 자신한다. 그것은 유리를 비롯한 그녀들 보다 여배우로써 좋은 용모와 연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행운의 여신은 늘 정숙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모친 조씨는 늘 말했다.

“너에게는 사주에 문성별이 다섯 개나 있단다. 문성별이란 이름과 명예를 떨치는 별 인데 한두 개 만 있어도 유명세를 타는데 너는 그 문성별이 다섯 개 나 있으니 유명한 배우가 꼭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 다섯 개의 문성별이 내게서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믿음은 틀림없을 거라는 확신에 정숙은 스스로 고개를 끄떡였다.

이어 분장실 밖 무대에서는 곧 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예비 징소리가 들려오기 시작 한다. 한 여배우가 분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린다.

“오! 제우스와 세밀레의 아들이시며 연극의 신이신 디오니소스시여! 제가 무대에 오르는 동안 제발 대사를 까먹거나 더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늘의 이 무대가 마지막 무대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제 소녀는 돌아 갈 집도 없는 가엾은 부평초 인생이랍니다―” <계속>



유지형 감독이 쓰는 소설로 읽는 초창기 한국 영화사.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인 이월화(1903-1933)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조선 연극 영화계의 역사와 복고, 낭만의 시대상을 그려 낸다.

출생부터 기구했던 이월화는 극단에서의 혹독한 배우수업을 거쳐 윤백남의 도움으로 조선의 첫 영화 <월하(月下)의 맹서>에 출연, 조선 최초 은막의 여배우가 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이월화의 생애를 통해 초창기 한국 연극 영화사와 그 주역의 인물들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편집자주


등장인물


이월화(본명 이정숙)=이화학당을 나온 연극배우 출신 은막의 여배우. 계모의 손에 자라나 연극과 영화에 투신하고 자신을 키워준 영원한 스승 윤백남을 운명 직전까지 연모한다. 결국 기생으로 전락하고 중국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 가서 신혼생활을 영위하나 일본인 시어머니의 학대로 불행하게 그곳에서 죽는다.


윤백남 / 작가 연출가 영화감독=조선 연극 영화계의 거목. 이 월화를 무명극단에서 발굴해 연극계의 스타로 만들고 조선최초의 활동사진을 찍으며 이월화를 대 배우로 출세시킨다. 선비적 기질과 대쪽 같은 성격으로 월화의 방종을 보고 절연한다.


안종화 / 배우 감독=이월화의 평생 친구. 끝까지 순수함으로 월화를 대한다. 최근 발굴되어 화제가 된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감독이기도 하다.


박승희 / 배우 연출자=극단 토월회의 대표. 미주대사를 역임한 박정양 대감의 장남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극단에서 여배우 이월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만 약혼녀의 등장으로 결국 월화에게 상처만 주게 된다.


박승규 / 극장 단성사 부사장=단성사 사주 박승필의 친동생. 기생인 월화를 만나 동거하나 주위의 반대로 결국 헤어진다.


윤기성 / 연극배우=월화의 연하의 남자. 고아로 자라난 불우한 청년이다. 월화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나 결국 마약밀매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이응수 / 연극배우 여장배우=극단에서 월화를 만나 변태적 관계로 발전한다. 월화에게 많은 도움과 길잡이가 된다.


조씨 / 월화의 계모, 기생출신=고아인 월화를 키워준 은인이다. 월화를 괴롭히기도 자책도 하는 이중적 성격의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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