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클라이번, 롤러코스트를 탄 미국 피아니스트의 자존심
반 클라이번, 롤러코스트를 탄 미국 피아니스트의 자존심
  • 소혁조
  • 승인 200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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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혁조의 인터미션


반 클라이번은 냉전시대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문화상품으로 전 미국을 열광케 했던 사나이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그의인생은 화려했지만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고 그의 업적은 전설적인 거장들, 호로비츠, 리히터, 길렐스, 루빈스타인 등과는 감히 견줄 수도 없을 정도이다.


반 클라이번이란 피아니스트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이 이룩한 예술적 성과에 비해 과대 포장되었고 그 과대포장 때문에 좌절을 겪어야 했던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이번은 젊은 나이에 단 한 번의 벼락출세로 전 국민적 영웅으로 급부상하였으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정치적 의도에 의한언론의 과대포장으로 끝없는 나락을 맛보아야만 했다. 미국 피아니스트의 자존심으로 추앙받으며 냉전시대의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각광받았으나 이후의 그의 인생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클라이번은 이념의 갈등에 의한 동서 진영의 대립이란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그만큼 각광받을만한 이유도, 또한 급락을 맛볼 이유도 없었으나 그가 살아야 했던 치열했던 시절이 그를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정치이념의 차이에 따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서방과 동방의 체제로 급속히 개편되었다. 동방세계를 대표하는 소련과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미국 간에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끝없는 알력다툼과 서로의 체제를 과시하는 선동과 선전정책을 많이 펼쳤는데 정치, 국방뿐만 아니라 과학, 문화 예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크게는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작게는 예술세계에서의 콩쿨 입상까지도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 소개하는 반 클라이번은 바로 이런 체제의 경쟁 속에서 화려하게 비상하였고 추락을 맛보아야 했던 피아니스트이다.


1958년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가 개최되었다. 전 세계의 내노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소련에서는 물론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출전시켰다.


차이코프스키란 이름이 주는 러시아 음악과 세계 음악에서의 상징성, 그 이름을 내세운 최고의 역사적인 피아노 콩쿨의 상징성, 그 상징성을 대표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물론 정통 러시아 피아니즘을 계승한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여야 했고 이 대회는 당연히 러시아 피아니스트가1등을 차지하는 그들만의 집안 잔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3세의 텍사스 출신의 청년인 반 클라이번은 이 역사적인 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었고 이는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개최국 소련에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었고 미국에선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며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전국적인 잔치 분위기를 만들었다.

당시 이 대회는 지극히 정치적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소련 대표는 출전 당시부터 이미 1위를 예약해 놓았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으나 클라이번은 소련 대표를 월등하게 앞서는 점수를 받아 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라서 당시 주최측과 심사위원들은 새벽 2시에 크렘린 궁에 전화를 걸어 후르시초프의 재가를 받은 후에야 1위를 발표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쾌거에 세계 음악계는 하나같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콩쿠르 당시 심사위원장은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사람은 리히터, 길렐스 등의 정통 러시아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명인들이었으니 클라이번의 연주가 얼마나 대단했었기에 그들을 완전히 매료시킬 수 있었을까 가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미국은 소련과 사회 모든 분야에서 팽팽하게 대립하며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었으나 유독문화예술에서만큼은 쉽지 않았다. 당시 소련에서는 최고의 인민 예술가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에밀 길렐스 등을 서방세계에 진출시키며 문화예술계를 경악케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전쟁의 난리를 피해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각국에서 망명한 사람들이었고 문화예술은 오랜 역사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역사가 짧은 미국으로선 이 부분이 큰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 바로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순수 미국인 피아니스트인 클라이번이 러시아에서 개최하고 러시아 예술인들이 심사위원인, 그것도 제1회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야 말았으니 미국으로선 소련에게 알게 모르게 위축되었던 그간의 열등감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쾌거였다.


클라이번의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의미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일본 동경에서 개최하는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이 일본과 결승에서 만나 일본 심판진들이 보는 앞에서 히딩크 스코어로 승리했다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국가적 경사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시 콩쿠르 대회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위촉된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는 클라이버에게 10점 만점의 점수에서 100점을 줬다고 한다. 널리 알려진 리히터의 괴짜 행각을 볼 수 있는 대목이며 리히터는 이후 한 번도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에서 귀국한 23세의 청년 클라이번은 바로 국민적 영웅으로 급부상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타임誌의 표지 모델로 실렸고 온 국민들의 환호성과 꽃다발 속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며 전 미국 최고의 슈퍼스타로 등극했다.


이후 클라이번은 승승장구,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가 가는 곳마다 언제나 수많은 기자들이 동행하며 화제가 되었고 그의 연주회는 어머어마한 인산인해가 북적거렸다.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을 방불케 할 정도의 엄청난 소녀팬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수많은 꽃다발이 우수수 떨어지는 등 그의 공연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고 그가 발표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음반은 클래식 음반으로는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역사상 유래 없는 사건이 되었다.


잠깐 클라이버의 성공에 대해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깔린 과다한 언론 플레이에 의한 한 젊은 예술가의 신격화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당시 미국의 문화상품에 대한 갈증이 어느 정도였는지, 소련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은 또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주는 하나의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2년엔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까지 생겼다. 바로 반 클라이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인데 불과 28세의 이 청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행위치곤 지나치게 오버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치 땅값이 뛰어 졸부가 된 일자 무식쟁이가 서점의 책을 몽땅 사들여 서재를 채우는 듯 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어쨌든 이 콩쿠르는 차이코프스키 콩쿨과 함께 세계 피아노 콩쿠르를 대표하는 권위 있는 대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끝없을 것 같았던 비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민적 영웅으로 급부상한 그는 주위의 끊임없는 부담 속에서 괴로워해야 했고 엄청난 강박관념 속에 파묻혀 살아야 했다. 깊은 슬럼프 속에서 신음했고 한동안 연주와 레코딩 활동을 일절 할 수 없었다. 60세가 넘어서야 겨우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고 예술적 활동보다는 정치적 활동을 주로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지난 2004년에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서 러시아-미국 문화 교류에 대한 공헌을 인정하는 '친선'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클라이번의 인생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뜻하지 않은 시대적 상황에 맞부디치며 정치적 의도에 의한 희생양으로 살았던 불행한 것인지에 대해선 단정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은 칼날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예술의 영역에 정치적 의도가 지나치게 개입하게 되면 그 순수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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