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조용필을 아시나요?
영화배우 조용필을 아시나요?
  • 신일하
  • 승인 200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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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의 스크린 도전기 / 신일하

<내년 데뷔 40주년을 맞는 ‘영원한 오빠’ 조용필(57)이 19집 기념 음반을 내고 35층 높이 초대형 무대 공연 프로젝트를 발표, 기네스에 도전하는 전국 투어에 들어간다. 2008년 4월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을 시작으로 전국의 종합운동장, 공설운동장 등 야외에서 18-19회, 체육관을 합치면 총 50여 회 공연 준비에 바쁜 조용필은 “요즘 무대 구상에 쥐가 날 정도다. 40주년 기념 앨범은 기존 히트곡을 모으는 형식이 아니라 40년 된 목소리에다 새로운 연주로 취입 된다”고 밝혔다. “이번 공연 무대는 내 노래 인생 최대 규모다”며 무대장치에 70-80억원을 투입한다는 조용필을 보면서 팬들에게 줄 더 이상의 선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그와 필자는 남다른 인연이 있어서 인지 모른다.>


“어! 이 거 조용필의 스크린 데뷔 사진이잖아?” 조용필과 그의 그룹이 눈 덮인 산등성이를 오르는 모습이었다. 영화 속 조용필의 아내(유지인)가 숨져 관을 들고 산을 오르는 장면이다. 까만 의상을 입은 조용필과 눈 위에서 찍은 색 바랜 스틸들이 발견되어 잊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 영화로 용필이가 스크린 스타로 변신할 수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추억을 되 뇌이며 앨범을 보다 핸드폰을 꺼내 찍었다. 그 때 조용필과의 촬영 기념사진을 마치 애장품이나 되듯 액자로 만들어 서가에 보관중인 주인공은 2006년 영화사 DVC픽처스를 부천에 설립하고 영화 ‘삼청교육대’를 제작 준비 중인 장현호사장이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 사진을 발견하고 “이 사진을 촬영한 산은 어디지?”하고 물었더니 “유명한 산은 아냐”하는 거다. 조용필이 주연한 영화라 설악산 정도의 유명산을 찾아가 촬영했을 거로 기대하고 물었지만 그의 기억으로는 수원 근교의 산이었다는 것이다.

1968년 가수 데뷔한 이래 록, 트로트, 발라드는 물론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켜 ‘조용필 표’ 음악을 만들어낸 국민가수 조용필. 서구 음악이 휩쓸던 우리 가요계에 한국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가 인정되고 지금도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은 거인’ ‘민족혼을 부르는 가수’ ‘80년대의 가왕’ ‘국민 가수’ 등 그의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조용필이 스크린에 도전했다가 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스크린 스타의 꿈을 접고 말았을까? 젊은 시절 남진은 인기 가수이면서 스크린 스타로 최고 인기를 구가한 적이 있는 반면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는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미국 팬들은 그가 출연한 영화에 열광하고 있다.


“조용필이 뭐가 아쉬워 배우가 되려고 했다는 건가?” 모르는 사람들은 이처럼 의아해 할지 모른다. 그 궁금증을 풀려면 27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야 한다. 1980년 3월 초 봄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태창흥업 임원식사장 전화를 받았다. “신형! 차 한 잔 할 시간 있나? 좋은 건수 있는데”하며 긴급 콜(call)을 해 서울 장충동에 있던 영화사로 달려갔다. 임사장은 종교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연출한 감독 출신. 현재 제주영상위원회 위원장인 그는 2006년 사단법인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을 그만 두고 제주에서 4.3극영화 ‘순이 삼촌’ 제작자로 변신하였다. 그때 태창흥업은 외화 흥행 부진으로 경영이 힘들었던 거로 기억된다. 오너인 김태수회장은 임원식감독에게 영화사 운영을 맡겨놓고 있었다.


“커피 대접 가지고 안 될 것 같으니 저녁식사나 하러 가는 게 어때?” 영화 홍보를 위한 부탁이 있어 부른 건 아니었다. 일식집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어려운 부탁 하나 있어. 이건 꼭 들어줘야 하는 일야.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린 거니” 뜸들이지 말고 본론을 설명하라고 하자 “용필이 하고 친하잖아. 신형이 조용필을 연결해 줘야겠어. 좋은 곳에 가서 술을 살 테니”하는 거다. 조용필을 스크린에 데뷔시키는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임사장의 목청이 높아지고 표정은 진지해 졌다. 3년 동안 대마초 가수로 발이 묶였다 ‘창밖의 여자’로 고삐 풀린 말처럼 무섭게 내달아 손쉽게 가요계 정상을 차지한 스타 조용필을 충무로에 입성시키자는 아이디어다. 기발한 사업 발상이었다. 그리고 ‘코리아 엘비스 프레슬리’의 탄생을 태창흥업이 맡아야 할 때에 이르렀다는 거창한 명분에 감동되고 말았다.

“개런티가 천문학적 액수일 텐데”하니 임사장은 “No Problem"하고 해법이 있다는 듯 자신만만해 하였다. 준비된 시나리오도 있다며 시놉시스를 설명해주었다. 지금은 시드 머니를 가지고 영화사가 작품을 기획하고 나면 투자회사로부터 펀드를 받아 제작하고 배급회사에서 극장을 잡아 개봉하는 시스템이지만 당시는 지방흥행사가 투자사 몫을 하던 때라 그들의 입김은 컸다. 임사장은 조용필과 계약만 성사시키면 자금을 밀어줄 스폰서가 많다는 것이다. “흥행사 반응이 어떨지 떠봤지. OOO이 알지? 계약서만 가져오래. 그럼 달라는 대로 밀어준다는 거야” 임사장은 지방흥행사 코를 끼워놓은 것 같았다. 당시는 흥행사들이 주는 약속어음을 받아 충무로에서 깡(할인)하여 영화 제작하던 시절이라 그들이 낚시 밥에 걸려드느냐 아니냐에 영화가 기획되어 만들어졌다.


임원식사장은 감독이기 보다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경영인이었다. 충무로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신상옥감독의 프러덕션에서 영화 수업을 쌓은 감독인데다 산전수전의 남다른 경험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와 친해진 건 1977년 명보극장에서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개봉 때다. 그의 히트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영화로 인연이 되어 90년대 중반까지 서로 직업 관계를 떠나 지내왔다. 신앙심이 깊어 그 당시 연예인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케이블TV 개국 때는 기독교채널의 임원이 되어 선교에 앞장선 종교인이었다.

‘작은 거인’ 조용필의 충무로 입성 프로젝트에 내가 참여(?)하게 된 동기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문화부에 근무하면서 일요신문도 제작하는 연예기자란 신분이었다. 사실 매체의 위력으로 볼 때 종합지와 일간스포츠, 전통 있는 대중주간지 기자들이 source와 가까워 임감독과 친한 영화담당 기자도 있었다. 하지만 나를 불러 은밀한 사업계획을 말해주고 “이 일을 성사시키면 특종은 맡아놓은 당산이네”하였던 건 내가 조용필과 남다른 친분이 있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밝혀도 될 것 같아 그 당시 연예 기자생활하며 경험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털어놓는다.


당시 조용필은 대마초 가수로 낙인 찍혀 연예활동을 할 수 없었던 가수다. 그 족쇄가 연예인들에게 얼마나 혹독하였는지 모른다. 가혹하다고 할 만큼 군사 정권은 마약사범을 중범죄로 취급해 탈선한 연예인에 대해 재생의 길을 베푸는 관용이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찍히면 죽는다’는 영화가 수년전 만들어져 별로 흥행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70년대에는 마약에 연루되어 찍히면 ‘사회매장’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용어나 다름없었다.


이런 낙인이 찍힌 조용필을 지구레코드사(대표 임정수)에 평생 전속시키는 은밀한 작업을 누가 했을 까?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마초 연예인의 해금이 이뤄지고 조용필이 마치 혜성처럼 매스컴에 컴백하자 ‘억!’하고 놀라는 음반업자들이 많았다. 발 묶였을 때 그와 어울리는 것조차 꺼렸던 이들은 마치 로또 복권을 놓이고 만 듯 실망을 하였다. “용필이가 스스로 임따이(당시 방송, 가요계의 고 임정수 사장 별칭)를 찾아 가지 못했을 거야. 누가 중간에 소개해 주었겠지” “술 파트너 OOO PD와 친 하잖아. 전화해 주었다는데--”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조용필과 친한 지구레코드 전속의 파워 매니저가 있어 그가 은인이나 되는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스카우트 역할에 성공했더라면 은근히 자기 공로를 과시하는 모습을 보였을 텐데 그런 제스처를 보인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용필이 힘들 때 내가 함께 간 단골 룸살롱이 강남 OOO에 있잖아--” 온갖 생색을 내면서 스타 제조기나 되듯 떠벌이는 쇼프로 PD와 마주쳤을 때 “세상 살아가는데 저렇게 연기가 필요 한가”하는 회의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작은 거인’의 지구 전속 가교 역을 누가한 것일까?


요즘 TV 방송사들은 심심치 않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를 만들어 보여준다. 정치 뒷얘기의 주인공을 찾아 다큐멘터리 식으로 엮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표현이 필자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살다보면 이 사람이 저 사람 만나 삶의 대화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거지만 시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라고 말한 ‘생각의 지도’ 저자 리차드 니스벳이 떠올랐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동서양 간에 차이가 있는 걸 지적한 그의 이분법적 형식의 서술에 수긍되는 점이 있어서다. 서양인은 사물을 범주로 보지만 동양인은 ‘관계’로 본다는 그의 심리분석에 머리가 끄덕여졌다. 서양인과 달리 동양인은 ‘나’는 누군가의 자식이고 한 나라의 국민이며 조직의 구성원이라 보는 시각을 가졌단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인 인맥도 서양인은 수평적 대등적인 면이 많지만 동양인은 상하관계의 수직적 구조가 보편적이라는 그의 사유는 깊은 성찰에서 나온 게 아닐까. 그러한 관계가 이 글을 풀어가는 코드라고 하고 싶다.


당시 MBC 라디오 인기 프로 ‘싱글벙글쇼’를 연출한 최성근PD는 대학 후배다. 대학 동문이다 보니 필자는 방송출입기자 생활하면서 남다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기자가 필요한 건 연예계에 돌아다니는 정보 수집과 표현이다. PD도 정보에 민감해야 프로그램을 잘 만들 수 있어 우리 둘은 선후배 이면서 공생공존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느 날 생방송중인 라디오 부스에 들어갔더니 “형! 잘 오셨수. 우리 좋은 일 하나 합시다”하고 내 눈치를 살피며 얼굴이 싱글벙글해졌다.


“임따이가 돈방석에 오를 수 있는 건이요. 우리나라에 용필이 만한 가수 없다는 걸 임따이도 알고 있거든. 방송활동만 풀리면 용필이야 말로 우리 가요사를 다시 쓰게 할 스타이니 지구에 전속해 주는 메신저가 되는 게 어때요?” 귀가 번쩍하는 정보다. 그게 가능할지의 판단은 나중에 하고 둘은 의기투합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975년 11월 대마초 흡입 연예인 사건이 터져 배우, 감독, 가수 등 연루된 70여명이 일체의 연예활동이 금지되었다. 한창 활동 중인 스타가 줄줄이 구속되어 형무소로 가는 바람에 연예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도 군사 정권은 이들에 대한 동정이나 구제를 생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대마초 연예인’이란 낙인에다 무기한 방송출연 정지를 당해 크게 실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지쳐 연예계를 떠난 스타도 많다. 그 중 빅 히트한 노래 ‘너’를 부른 가수 이종용이 있다.


당시 명보극장 김정률 상무는 영화 홍보 담당을 맡고 있었다. 태멘이란 출판사 대표를 겸하고 있는 그의 사무실에 찾아오는 연예인이 많아 기자들이 출입처나 되듯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이종용을 자주 만났다. 출옥하였지만 방송활동금지란 절망의 늪에 빠져 허탈해 하던 그는 어느 날 이민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갈 뜻을 내비추었다. ‘낙엽 지던 그 숲속에 하얀 모래밭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주인공 이종용의 풀죽은 모습이 입을 열어 혹 불면 톡 떨어질 깡마른 낙엽 같았다. 가수 윤복희와 친해 마치 혈육이나 되듯 지내던 그는 커피 잔을 든 채 “누님 덕에 살고 있지만 얼마나 지탱할 지 모르겠네요--”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던 그다. 그리고 연락 두절되었던 그는 미국에 둥지를 틀고 종교공부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 해가 지난 뒤 송창식을 만났더니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로 새로운 삶은 찾은 것이다.

연예단체들이 기회 있을 적마다 대마초 연예인을 풀어줄 걸 문공부에 건의를 했으나 78년 2월 부분 해금이 이루어졌다. 생계유지를 명목으로 밤무대 출연을 풀어준 것이다. 그러나 3년 이상 활동 공백에 ‘대마초 연예인’이란 낙인으로 밤업소의 반응은 차가웠고 그들의 컴백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사실 방송활동이 재개된다 해도 정부의 눈치를 무시하고 자신을 밀어줄 PD가 있을지 의심스러워 대마초 연예인들은 자포자기에 빠져들었고 누구 하나 그들을 동정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절치부심 중이던 조용필도 탈출구를 찾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아는 몇몇 PD들은 조용필을 만나 용기를 주면서 격려해 주었다. 그의 재기를 위해 손과 발이 되어 은밀한 작업을 해온 최PD는 인기 프로그램을 맡고 있어 조용필도 부담 없이 만나는 사이였다.

임사장을 최PD가 직접 만나 제의를 할 수 있지만 여러 눈들이 있어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 당시는 흑백TV 시절이라 전파매체인 라디오의 위력은 컸다. 노래를 히트시키려면 라디오의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서 틀어주어야 한다. 특히 산업 일선의 소위 공돌이, 공순이들로 통하는 애청자가 하루 종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청취하기 때문에 라디오 파워는 막강하였다. 그래서 정동의 MBC 근처는 스타들의 집합지인데다 탤런트, 가수와 매니저 등 연예계 종사자들이 들끓는 업소들이 호황을 누려 밤이면 홍등가 이상 흥청 되는 곳이었다. ‘싱글벙글쇼’는 한 낮의 12시 뉴스에 이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인기 라디오 프로라 연출을 맡은 PD는 몸 관리에 신경을 써야했다. 근처 업소에서 레코드회사 업자를 만났다가는 금방 구설수에 올라 입방아에 희생물이 된다. 아무리 비즈니스에 관한 거라 할지라도 가요 프로 PD가 업자와 만난 게 탄로 나면 비리문제로 비화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레코드회사 대표들은 비서나 다름없는 매니저를 두고 은밀하게 PD와 접촉하여 비즈니스를 처리하던 때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최PD는 그 임무를 나에게 맡겼다. 최대한 비밀을 유지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여야 하는 일이다. 나는 조용필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조용필은 영화배우 유장현과 술벗이라 알게 되었다. 유장현의 매니저가 충무로에 있었는데 그 사무실에 놀러 와 소개를 받았다. 조용필과 죽마고우라며 열변을 토하면서 유장현은 가끔 술에 얽힌 비화들을 털어놓기도 했다.


임정수사장을 광화문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신기자 한테 묻겠어. 용필이 (방송활동)풀릴 것 같아? 언제 일지도 모르는 대마초 가수를 전속하라니--” 의외로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회사 전속 가수 PR 기사나 써주는 거에 신경 쓰라는 듯 비웃음을 짓는 듯 해보여 ‘오늘 번지 수 잘 못 알고 찾아온 꼴 되었네’하고 실망이 컸다. 한 모금 입에 넣은 커피가 마치 쌀뜨물 맛이라 나도 모르게 ‘으크--’ 하고 실수할 뻔 하였다. 분명 최PD는 고급 정보라 임사장의 입이 크게 벌어질 거라 했는데 예측이 빗나갔는가.


“(전)영록이를 키워 주신 건 사장님이시죠. 군에 입대했는데도 ‘애심’이 터졌으니. 조용필이 풀리는 날도 머지않아 올 겁니다. 혹시 다른 회사에서 채가면 어쩌실 라고요--” 그때 전영록은 지구레코드사의 간판 가수나 다름없었다. 입대하고 출반한 음반이라 반응이 별로일 거로 보았는데 그의 ‘애심’은 예상 밖으로 히트, 임사장은 청계천 레코드 도매상을 나가면 매일 한 보따리의 수금을 해가는 거로 소문이 파다했다. 칭찬에는 고래도 춤을 춘다고 하는 말처럼 임사장의 남다른 사업 수완을 추켜세웠더니 “신기자도 테크닉이 많이 발전 했구먼”하고 표정이 좀 풀렸다. 북한의 평남 용강 출신이라 사투리의 말투는 특이하다. 지구레코드사를 처음 차린 건 충무로 극장 스카라 앞이었는데 임사장은 전영록의 부친인 영화배우 고 황해씨와 친한 사이였다. 가끔 임사장은 자신이 힘들 때 황해씨가 도와준 일을 회고하며 전영록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키우는 걸 털어놓았다. 냉수를 한 잔 시켜 마시고 난 임사장은 좀 더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거절에서 한 보 물러서는 것이다. 다음날 최PD를 만나 얘기해 주었더니 “형이 기자요? 임따이가 미끼를 그냥 물것 같아요. 아마 나 한테 전화가 올 거요”하면서 가교 역할은 한 거니 기다려 보자고 했다. 임정수 사장을 만났을 때 이 프로젝트가 최PD의 아이디어인 걸 이야기 했다. 그제야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임사장이 고단수인 게 직감되었다. 고수끼리 서로 오간 교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주일이 지났다. 최PD 연락이 와 방송국에 갔더니 임정수사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용필이 만나 얘기해 줬어요. 의향을 물어 보니 나한테 모든 걸 위임하겠다는 약속 받았어 형. 그러니 이젠 서로 조율할 게 남았는데 형의 임무가 크요” 설득이 필요했다고 한 최PD는 조용필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그건 파격적인 전속금이었다. 그런 거액을 들어줄지 의아해 하자 풀어갈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보자고 했다. 임사장에게 메시지 전달하는 일은 내가 그리고 후배는 조용필을 맡아 서로 커뮤니케이션해주고 그 고리를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추진해 나갔다. 1978년의 가을을 후배와 나는 조용필 스카우트 작전에 보낸 것 같다. 조용필과 임사장의 미팅 이전에 풀어야할 일을 조율하느라 여러 날이 필요했다.


임정수사장의 전화가 왔다. 경기도 삼송리(현재는 고양시 오금동)에 있는 지구레코드회사로 오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지구는 RCA. SONY 등 라이센 레코드회사 음질에 뒤지지 않는 음반 출시를 위해 임사장이 국내 최고 레코딩 스튜디오를 갖추어 놓아 가수들은 지구 전속이 되는 걸 부럽게 보았다. 최신 전자 악기에 완벽한 방음 시스템의 녹음실과 스튜디오에는 할리우드 뮤지션들이 음악 작업하는 다채널 믹싱 콘솔과 입체 음향기자재의 첨단 장비들이라 유명 가수나 작곡가 등 아티스트는 지구 라벨의 디스크라면 음질이 국내 최고라는 걸 인정해 주었다. 그러니 신인 가수들은 지구 스튜디오에서 취입하는 게 꿈이나 다름없었다. 재기를 목 타게 기다려온 조용필에게 지구 스튜디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산실이 될 수 있었다.


임사장이 의중을 털어놓았다. “지구레코드와 평생 계약을 해줘야 겠어. 거금을 주는 거니 평생 전속이 아니면 나도 위험 부담이 커 할 수 없다구” 그러면서 '고부담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의 위험부담 투자 사업이라는 것이다. 임사장의 풀 베팅에 놀랐지만 헛기침을 한 후 시치미를 떼고 “그러셔야 겠죠”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서로 비밀을 지키는 보장이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취입하고 노래가 한 창 뜰 무렵 대마초 일제 단속에 걸려 발이 묶여있던 조용필이 그 당시 요구했던 파격적 전속금을 여기서 밝히지 않는다. 단지 어마어마한 거액이라고만 말하고 싶다. 당시 모 일간 신문에 2천만원으로 기사화 되었으나 오보였다. 전속금을 조절하느라 시간을 많이 낭비했는데 이젠 다른 암초에 부닥치고 말았다. 이해관계의 협상이 힘들다고 하지만 겨우 풀었는데 언더테이블의 조율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연예인 평생 전속이란 게 있는 가. 이건 노예계약하자는 게 아닌가. 관례가 없는 계약이라 최PD와 나는 여러 번 고비를 넘어야 했다. 조용필을 설득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아 후배의 고충이 많았다. “형 미쳤어? 난 못해”하고 조용필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최PD는 “너 살구 보아야 하는 게 아냐. 그만한 전속금 내놓을 레코드업자 없는 거 너도 알잖아”하며 달래는 한편 가진 자가 아닌 없는 자들이 겪으며 살아가야하는 슬픔과 비애를 한탄하느라 밤새워 술 마시기도 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그해 가을의 마지막 낙엽이 떨어지려는데 최PD 전화가 왔다. 지구레코드사에 조용필의 전속을 통보해 주라는 메시지였다.

“사장님! 조용필이 마음을 바꾸고 어제 O.K를 했습니다. 아무 때나 계약은 가능한 거죠?” “응 그래! 그것 보라구. 내가 제시한대로 하겠다는 거지?” “사장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알았어. 나도 깊이 생각했던 거라고---”

며칠 후 조용필이 지구레코드사를 찾았다. 평생 전속이란 굴레가 그의 목에 씌워지는 날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타고 어딘지 모르는 땅으로 가는 노예와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최첨단 장비를 갖춘 스튜디오와 녹음 시스템을 구경하면서도 조용필 얼굴에서는 생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사장실에서 조용필은 작성된 계약서를 훑어본 후 서명하였다. 그 자리에 최PD는 없었다. 임사장은 당좌 수표를 꺼내 보인 후 조용필에게 물었다.


“이거(수표) 확인해야지. 그리고 변호사 사무실에 가 공증하는 일이 남았어.” 공증까지 해야 한다니. 조용필이 조금 실망하는 표정이다. 자존심 상해 “공증을 하신다고요? 그만 두겠습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닐까. 사장실에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조용필은 ‘작은 거인’이었다. 좀 머뭇거리더니 “네. 그러시죠”하고 뭔가 체념하는 자세가 되었다.


그 당시 임사장 승용차는 로열살롱. 조용필은 임사장과 함께 뒤에 타고 필자는 운전기사 옆에 앉아 통일로를 빠져나왔다. 서울 신문로의 변호사 사무실로 향하는 승용차에서 임사장과 조용필은 이젠 가족이 되었다는 듯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날 필자는 조용필의 평생 전속 공증하는 계약서에 증인으로 사인하고 엄지로 날인하였다.

이듬해 1979년 10.26사태가 터져 연예인들이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몰라 움츠리고 있는데 의외로 12월 6일 해금이라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전속 후 조용필은 지구 스튜디오에서 아무도 모르게 앨범 작업을 해왔는데 해금으로 그의 새로운 음악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 4월 새로운 창법의 조용필 노래 ‘창밖의 여자’가 출시되고 밀리언셀러의 빅 히트 앨범이 탄생하였다. 훗날 조용필은 그 ‘평생 전속’의 족쇄에서 풀렸다. 어느 해인지 정확하게 모르나 조용필의 매니저 유재학씨가 임정수사장을 설득하여 전속이 풀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작은 거인’ 조용필은 ‘창밖의 여자’로 단숨에 우리 가요계 정상에 올라섰다. ‘한국 대중음악의 제왕’ ‘꺼지지 않는 가요계의 신화’ 등 찬사를 받으며 한국 대중가요계의 큰 획을 그은 ‘진정한 국민가수’ ‘영원한 필이 오빠’ 등 그에게 여러 수식어가 뒤따랐다. 대마초 흡연 가수란 오명을 씻고 그룹 ‘조용필과 그림자’에서 ‘위대한 탄생’으로 변신하면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스타 조용필이 혹시 지구 가족이 되지 않았더라도 가능했을까? 그가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어 어떤 레코드업자와 만났어도 스타덤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는 혼자 탄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연예기자 생활하며 얻은 경험적 지식이다. 어느 날 임사장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하였다. “신기자는 나를 사업가로만 보나? 이젠 음악을 아는 아티스트이기도 해--” 그랬다. 그가 우리 대중음악사에 남을 스타 제조기의 아티스트이었던 걸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용필이 풀려고 내 쌓았던 노하우 바닥날 뻔 했어. 그리고 은밀한 로비에 들어간 게 얼마인지 아는 사람 없을 거야. 내 식구인데 그렇잖아” 그러면서 정치인, 관료를 만날 때마다 대마초 연예인들의 고충이 어느 정도인지 설명하고 해금의 필요성을 강조, 해결했다며 자신의 공로를 은근히 자랑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지구에는 조용필이 스타로 성장할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TBC 라디오에 근무하다 스카우트 되어 지구 스튜디오를 차리는데 공헌한 사람 중에 녹음기사 이태경씨가 있었고 작곡가 이범희, 작사가 박건호 등의 아티스트들이 포진하고 있어 조용필은 ‘물을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앞에서 밝힌 조용필 수식어 중에 빠진 게 있다면 그건 ‘인복 많은 남자’가 아닐까 한다. 조용필 매니저이었던 유재학씨도 ‘작은 거인’사단 맨 파워의 한 사람이다. 그전에 함께 그룹 활동하다 쉬고 있던 그가 사단에 합류, 매니저를 하지 않았더라면 ‘조용필 팬클럽’이 탄생했을지 의문이다. 여의도에 ‘팬클럽’ 사무실을 오픈하고 체계적인 스타 관리를 해줘 조용필은 정말 노래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스타의 그림자처럼 뛰면서 시스템을 갖추고 이색 프로모션 전략을 앞세우며 스타 마케팅사업을 펼쳐나갔다.


태창흥업 임원식 사장의 부탁을 받고 여의도 KBS 별관 뒤에 있던 조용필 팬클럽에 갔다. 그 사무실에 매니저 유재학씨가 있기 때문이다. 조용필의 방송스케줄은 물론이고 쇼 공연과 휴식 등 하루 일과를 관리하는 매니저라 그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매스컴의 인터뷰와 방송 출연 섭외 요청이 많아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살겠구먼”하면서 반갑게 필자를 맞은 그는 뭔가 중요한 일로 방문한 걸 눈치 채고 밀실로 안내를 하였다. “용건이 있는 기요?” 경상도 사투리가 심한 편인 유재학씨 사무실 칭호는 사장이다. “유사장, 용건만 말할게. 용필이 영화 데뷔시킬 작품이 있어. 회사도 튼튼하고 배역이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일거야” “아유! 그 부탁하러 오셨우. 용필이 스케줄 빼기 힘든 건 신형도 알기요”


사실 그랬다. 조용필에겐 ‘시간=돈’이나 다름없었다. 큰 수입원은 밤업소 출연이지만 몇 군데 밖에 안 되었다. 유명 업소에서 거금이 입금된 통장을 들고 와 사정해도 거절하는 입장이니 스크린에 데뷔시키자는 건 커다란 청탁(?)이나 다름없었다. “용필이 스케줄에 지장 없게 촬영 가능하니 이걸(출연문제)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줘”하고 설명하니 유사장은 “입장 난처하게 만드시네. 다른 사람도 아닌 신형이니--”하는 것이다. 내 메시지를 전달해달라는 건 매니저 독단으로 결정내리지 말라는 엄포(?)나 다름없었다. 지구 전속에 가교 역할을 해주고도 내색을 하지 않았던 관계이니 일종의 전관예우 같은 청탁의 카드로 활용하고 싶었다. 한 주가 지난 뒤 다시 사무실을 찾았다. “운을 띄워보았는데 용필이도 남는 장사 아닐 거라는 기라. 며칠 더 생각해 보자고 했거든요” 그건 긍정적으로 검토하자는 답변이다. 스타 이미지를 손상하지 않게 해줄 자신이 있는 영화라는 걸 강조하고 시놉시스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조용필의 반응이 긍정적이라는 데 태창의 임사장은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유재학사장을 우리 회사로 부르는 게 어떨까?” 그러면서 임사장은 타이틀을 조용필의 히트 송 ‘창밖의 여자’로 해도 되는지 물었다. ‘창밖의 여자’가 동아방송 라디오 주제가라 작가 승낙을 받으면 그건 가능했다. 하지만 매니저 유재학 사장이 태창흥업을 방문, 대화가 시작되면서 타이틀이 ‘그 사랑 恨이 되어’로 결정되었다. ‘창밖의 여자’ 보다 영화에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공통된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조용필이 제일 꺼려했던 건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러브신 촬영이었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보장하고 계약서에 조항을 넣어 지킬 거니까요” 임사장은 조용필과 계약이 우선이라 요구 조건을 거의 들어주다시피 했다. 개런티 결정은 쉽지 않았으나 영화사에서 약속어음이 아닌 현금을 주는 조건을 들어주는 바람에 3번 미팅하고 계약이 이뤄졌다. 우리 영화사상 없었던 파격적인 캐런티로 기억된다. 그해 봄의 문턱에 들어서는 날 조용필은 충무로에 입성한 것이다.


그러나 조용필의 스케줄이 자유롭지 못한데다 영화사의 시나리오 준비 작업 등이 쉽지 않았다. 조용필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장면을 계속 수정하느라 시나리오 작업이 수개월 걸렸다. 겨우 탈고하여 촬영에 들어간 건 여름이 지나서다. 태창에서 ‘그 사랑 한이 되어’를 구정에 개봉하기로 약속하고 지방흥행사들의 자금을 끌어당겨 쓰는 바람에 유재학 사장은 피를 말리는 촬영 스케줄을 맞추어야 했다.


‘작은 거인 조용필의 사랑과 고독, 영화 같은 가슴으로 써내려 간 그의 일기장 공개!’ ‘무엇이 그토록 이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가? 화면에 넘치는 감동! 애절한 노래의 절규가 당신의 피부에 불꽃처럼 피어난다!’ 1981년 2월 5일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그 사랑 한이 되어’ 광고 카피다. 이 광고 문안을 만든 김종협씨도 당시 유명 디자이너였다. 임원식사장과 함께 극장 2층에 있는 그의 디자인실을 방문, 포스터를 보면서 대박을 꿈꾸었던 그해 겨울이 가끔 생각난다. 개봉 예약 전화가 쇄도하는데다 개봉 날은 새벽 5시부터 관객이 줄을 짓더니 그 꼬리가 명동 성당 입구까지 이어졌다. 추운 날씨인데도 극장 앞에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자 임원식사장은 기대에 부풀었다. 첫 회 개봉 매진을 기록하자 드디어 터졌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봉 3일이 지나면서 극장 앞은 썰물이 빠져나간 바닷가처럼 한적해 졌다. 조용필 팬클럽의 파워가 막강하기는 했으나 영화가 팬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건 서울만이 아니고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영화 흥행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백만장자 빌 게이츠는 실패는 학습의 기회라고 했다.

“당신이 유쾌하지 않은 소식을 접했을 때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를 위한 필요로 받아들인다면 그 소식 때문에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배울 것이다.”


어느 시인은 ‘인생은 실망의 연속이다’고 하면서 ‘우리들의 일상은/실망할 일로 가득 차 있다/진정한 실패는/실패 그 자체가 아니다/실패를 두려워해서/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실패다’고 하였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변신을 꾀하게 된다’며 시골의사 박경철씨가 얼마 전 방송에 나와 ‘주역’에 나오는 궁즉변(窮則變) 변증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를 역설하는 걸 보았다. 변하지 않으면 멸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조용필은 스크린의 스타로 변하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는 ‘변즉통’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스크린 노크는 학습의 기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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