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죽이 김희갑, 막동이 구봉서…그리운 웃음들
합죽이 김희갑, 막동이 구봉서…그리운 웃음들
  • 김다인
  • 승인 200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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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전성기 누린 코미디스타 5인방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요즘 개그맨들 가운데는 연기자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문천식, 이혁재, 안선영, 박미선 등이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40여년 전, 이들의 대선배 가운데 코미디언으로 출발해 연기자로도 성공한 롤 모델을 찾을 수 있다. 60년대 코미디영화의 주역들, 영화를 통해 사람들 배꼽을 쥐게 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막동이 구봉서, 합죽이 김희갑, 뚱뚱이 양훈, 홀쭉이 양석천 등 5명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비실이 배삼룡, 살살이 서영춘, 그리고 송해 남보원 등도 영화에 출연했으나 이들 5인방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었다.

코미디 스타 5인방은 악극단 출신이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원래는 당시 유행했던 극장 쇼에서 슬랩스틱 코미디를 주로 하다가 인기를 얻자 영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의 넘치는 개성적인 코미디언, 대중들이 보기만 해도 그저 즐거울 수 있는 보드빌리언’이라는 평을 들었던 합죽이 김희갑은 구봉서와 함께 그중 가장 많이 영화에 출연했다.

김희갑은 1923년 함경남도 장진호라는 작은 부락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 장남으로 어려운 줄 모르고 자랐던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누이와 단 둘이 살다가 해방 이듬해 단신 월남했다.

친구 주선으로 반도가극단에 입단해 무대 생활을 하던 김희갑은 1956년 한형모 감독의 <청춘쌍곡선>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이어 60년대 <김희갑의 청춘고백><합죽이의 신혼열차><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염통에 털난 사나이> 등의 합죽이 스타일 코미디 영화에서부터 <박서방>이나 <서울의 지붕밑> 등 서민극에까지 두루 출연했다. 쉬지 않고 다작 출연을 한 가운데서도 <와룡선생 상경기> <팔도강산> 같은 영화는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다.

김희갑의 최고 전성기는 1962년으로, 무려 20편의 영화에 출연해 다작배우 1위에 랭크됐다. 그해의 영화는 김희갑이 나온 영화와 나오지 않은 영화로 구분해도 될 정도다. 당연히 다른 배우들보다 수입 랭킹에서도 우위였다.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관객들을 웃게 한 그였지만 고향에 두고 온 누이에 대한 그리움은 가시지 않았던 듯 60년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내가 왜 희극을 선택했는가이다. 지난 반생이 고독했고 슬펐던 내가 왜 그 반대인 웃음을 택했는지 나도 모를 일이다.”



또 한 사람, 대표적인 희극 배우는 막동이 구봉서였다.

입 양쪽에 커다란 알사탕 두 개를 각각 넣은 듯 불룩한 양볼에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라는 유행어를 널리 퍼트렸고 영화 출연도 스타배우 못지않게 많이 했다. 그가 퍼뜨린 유행어는 1964년 최지희와 공연했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구봉서도 김희갑처럼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었다. 평양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3세 때 양친을 따라 월남했다. 연기자의 연이 시작된 것은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이 이끄는 악극단에 출연하고부터였다. 이후 1956년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하기 전까지 18년 동안 악극단 생활을 했다.

김희갑 보다는 불과 한 살 아래였는데도 김희갑이 영감 역부터 한 것에 비해 구봉서는 청년 역이 시작이었다. <서울의 지붕 밑>만 보더라도 김희갑은 김승호 허장강과 동년배 복덕방 영감이지만 구봉서는 전파상 총각 역을 맡고 있다.

코미디물이 히트하면서 구봉서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1961년 <구봉서의 벼락부자>에서 1970넌 <구봉서의 구혼작전>까지 10년 동안 막동이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구봉서 출연작 가운데 사람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것은 1969년 유현목 감독에 문희와 공연했던 <수학여행>이었다. 여기서 구봉서는 외딴 섬 아이들을 인솔해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는 교사 역을 맡아 구수하고 마음 착한 연기를 했다.

구봉서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는 가족들이 절대 보지 못하게 한 것으로 유명했다. 스스로 “만약 봤을 때는 엄벌 정도가 아니라 일주일 혹은 한달 동안 지긋지긋한 정신적 고문을 가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가정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했던 구봉서는 영화계 ‘애처클럽’ 멤버였다. 일명 ‘공처가구락부’라 불린 이 비공인단체에는 구봉서를 비롯해 황해 곽규석 신영균 박노식 장동휘 등이 ‘등록’돼 있었다.

구봉서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은 1958년 공군 군악대를 제대한 후 박단마그랜드쇼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방송과 무대를 종횡무진 누볐다. 다른 코미디언이 ‘몸개그’를 주로 하는 데 비해 그는 재치있는 언변으로 스탠딩 코미디를 주로 했다.

영화 출연은 일종의 외도였던 셈으로 1959년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이 데뷔작이다. 코미디언 별명을 영화 제목에 넣은 것은 곽규석의 이 영화가 효시라 볼 수 있다. 1963년 김수용 감독의 <후라이보이 무전여행>이 흥행에 성공한 이후 50편에 출연했으나 그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쇼 프로그램 MC였다. 그는 방송 통합 때 없어진 TBC(동양방송) TV에서 텔레비전 쇼의 효시인 ‘쇼쇼쇼’ MC를 맡아 요즘 국민MC로 불리는 유재석 이상으로 인기가 있었다.

뚱뚱이 양훈과 홀쭉이 양석천은 할리우드 코미디언 듀오 로렐과 하디의 한국판이었다. 몸이 큰 양훈과 작고 왜소한 양석천은 무대에 등장하기만 해도 관객들 웃음을 자아내서 쇼무대의 스타로 인기를 모았다.

그 여세를 몰아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남성금지구역><비단이장사 왕서방> 등의 제목만 대도 코미디인 영화에 짝꿍으로 출연했다. 양훈이 넉넉한 동네 가게 아저씨 혹은 심술궂은 정육점 주인 등의 역할을 한 데 비해 양석천은 소심한 소시민 역 전문이었다.

이들 코미디스타 5인방 가운데 몇몇 분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영화를 통해 남겨놓은 큰 웃음은 여전히 이세상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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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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