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호의 마지막 말 “억울하다”
김승호의 마지막 말 “억울하다”
  • 김다인
  • 승인 200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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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그만둔 아버지 역할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은 명작인 오손 웰즈의 <시민 케인>을 보면 유명한 신문발행인 찰스 포스터 케인이 죽으며 “로즈 버드”라는 한마디를 남긴다. 글자대로 풀면 ‘장미꽃봉오리’라는 뜻이지만, 그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기자는 케인의 주변을 샅샅이 취재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공한 케인의 감춰진 삶을 알게 되고 ‘로즈 버드’는 그가 유년시절 즐겨 탔던 썰매 이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50년대 우리들의 아버지를 연기했던 김승호는 너무 빨리 아버지 노릇을 그만뒀다. 1968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안종화가 쓴 <한국영화측면비사>에 따르면 “억울하다”였다. 무엇이 억울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김승호가 출연했던 영화들은 크게 사극, 홈코미디 그리고 서민사회극으로 나눌 수 있다. 그중 그의 연기가 가장 빛을 발했던 것은 서민사회극 쪽, 조긍하 감독의 1959년작 <곰>으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그의 서민연기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대표작은 1956년작 <마부>. 이 작품에서 김승호는 말 한 필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는 가장 역할을 리얼하게 해냈다. 홀아비 마부 김승호, 고시공부 하는 아들 신영균, 남몰래 마부를 보살펴주는 과부 황정순의 트리오는 50년대 가족멜로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서울 풍경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데서 의미가 깊다.

김승호는 실제도로 구두쇠로 유명한데 딱 맞는 역이 <마포 사는 황부자>였다. 새우젓 장사로 시작해 돈을 모은 황부자는 먹을 것 입을 것에 돈을 쓰지 않는 노랭이 영감이다. 잠시 도금봉의 눈길에 홀려 실수를 하지만 학교를 세워주는 등 좋은 일을 하고 눈을 감는다. 그가 “새우젓!”하고 외치는 소리는 여운이 길다.

그런가하면 <로맨스 빠빠> <로맨스 그레이> 등에서는 다정다감한 50대 신사 역을 잘해냈다.



1959년작 <로맨스 빠빠>에서 김승호가 연기한 아버지는 50년대 당시 아버지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90년대 IMF를 맞은 아버지들 모습이기도 하다.

2남3녀를 둔 박봉의 샐러리맨. 자식들은 다 컸지만 아직 돈 들어갈 데는 많다. 그런데 어느날 실업자가 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명퇴’를 당한 것이다. 차마 가족들에게 말을 못하고 아침이면 꼬박꼬박 나가 자리잡는 곳은 파고다공원 벤치. 유일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맏아들이 매일 500원씩 차비를 쥐어준다. 월급날이 되어 난감해진 아버지는 시계를 끌러 판다. 결국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준다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이후 1960년 <박서방>으로 63년 <로맨스그레이>로 이어진 그의 아버지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한국적이며 또 아시아적인 아버지 모습으로 각인됐다.

영화 속에 나오는 아버지 모습과 실제 김승호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의 아들이며 역시 연기자인 김희라는 “아버지는 첫째 가정 위주의 가장이었고 가정 속에 담겨진 애정을 그대로 영화에 옮겨 놓았다. 연기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시발한다고 늘 말하셨다”고 추억한 바 있다.

촬영현장에서 김승호는 생김새대로 무사태평하기 이를데없어 제작부장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인기 최고의 배우답게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중이어서 한 영화 촬영이 끝나면 다음 영화 촬영지로 모셔가기 위해 제작부장이 지프차를 대기중인데도 태연스럽게 잠을 자곤 했다.

그런가하면 대주불사여서 한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하룻밤을 지새워야 직성이 풀렸다. 김소동 감독의 영화 <돈>에 출연했을 때는 함께 출연했던 배우 최남현과 더불어 소품으로 준비해놓은 술을 다 마시고 큰 대자로 뻗어 그날 촬영을 못하게 했다.

한 영화평론가는 60년대 영화계의 감초연기자라 불릴 김승호 최남현 주선태 김칠성 등의 네 배우에 대해 이런 회고를 한 바 있다.

‘…이 네 사람이 불고기집에 들어간다면 30인분은 깨끗이 해치우고 냉면 곱배기 두 그릇씩은 해치운다. 그리고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나와서는 이번에는 고기만두를 열댓개쯤 먹는다. 이쯤되면 술 마실 기운이 난다. 이들은 바에 걸터앉아 술잔을 홀짝일 타입이 아니다. 방석 깔아놓은 집에 턱 버티고 앉아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계속 마셔야만 직성이 풀린다. 여성을 다룰 때도 ‘당신을 사랑하오’ 따위의 문자는 그들 사전에서 찾아볼 수가 없는 행동파들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공처가에 속하는 사람들이 마로 이들이라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알 만한 일이다.’

아버지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김승호는 60년대 중반 청춘물이 범람하기 시작하면서 주연 자리를 신성일에게 내주고 자신은 조연으로 역할을 한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 된 조문진 감독의 <포옹>에서도 그는 신성일을 좋아하는 윤정희의 아버지인 은행장으로 출연했다.

그러는 한편 영화제작에도 열심이던 김승호가 1967년 10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가 된 <포옹>의 촬영이 끝난 다음날이었다. 남의 돈을 빌려 영화 제작을 하다가 결국 이자를 감당치 못해 2천만원의 부도수표를 남발해 구속된 것이다. 이것은 영화계 일대 사건이었다.

김승호는 그 당시 새로 나온 담배 신탄진의 값도 깎아서 사려 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공인된 구두쇠였다. 음식점에 가서도 기분좋게 한턱 쓰는 일은 김승호 사전에는 없는 일이어서 각자 돈을 나눠 내는 더치페이 스타일이었다. 이처럼 허튼 돈을 쓰지 않는 까닭에 알부자로 소문나 있던 터였다.



그런데다가 김승호 제작 영화들이 도산을 할 정도로 흥행 실패작은 아니었다.

1967년 첫 제작영화 <돌무지>는 반공영화로 단성사에서 상영돼 관객 9만명을 동원했다. 게다가 우수반공영화로 선정돼 시가 5백만원에 해당하는 외화 수입쿼터(당시는 외화 수입이 자유롭지 못해 당국에서 허가를 내주는 수입사만 외화 수입을 할 수 있었다)까지 확보한 상태였다.

두 번째 제작영화 <육체의 길>은 1959년 조긍하 감독 김지미 김승호 주연의 작품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역시 같은 라인업에 제작을 김승호가 했다. 이 영화 역시 8만명이 들었다. 세 번째 제작 영화 <머슴 칠복이>도 6만4천명 관객이 들었다. 당시는 관객 5만명이면 들인 제작비는 건지고 6만명이 넘으면 이익이 남는다는 것이 정설로 돼있었다.

이러니 그의 부도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당시 구구한 억측들이 난무했지만 어느것 하나 정설로 확인된 것은 없다.

김승호는 구속 한달여 만에 출감했지만 이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석방된 후 곧 고혈압으로 쓰러져 입원한 김승호는 이미 이전의 혈기왕성함을 잃었다. 그리고 1년쯤 뒤인 1968년 12월1일 다시 쓰러졌다. 세수하다 갑자기 쓰러진 그는 병원으로 옮기던 택시 안에서 숨졌다. 만으로 50세, 한창 일할 나이였다. 제대로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지 불과 1년 후였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억울하다”였다. 알 수 없는 화두처럼 던져진 이 한마디는 김승호가 떠난 후에도 갖가지 속뜻풀이로 한동안 영화계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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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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