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포환선수 출신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투포환선수 출신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 김다인
  • 승인 2008.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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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고생 끝에 데뷔작 <미망인> 완성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1955년 한국영화사 연표를 찾아보면 ‘한국 최초의 여류감독 박남옥 <미망인>으로 데뷔’라는 짤막한 한 줄이 다른 여러 일들 사이에 적혀 있다.

이 한 줄에 기록되기 위해 박남옥이 겪은 일은, 영화계에 여성 인력이 곳곳에 포진해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1923년 대구 근처 하양 마을에서 부유한 집안의 10남매의 셋째딸로 태어난 박남옥은 선도 안보고 데려간다는 셋째딸의 이미지를 거부한 소녀였다.

공부하는 틈틈이 세계문학전집을 읽었고 영화잡지도 읽었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경북여고 재학시에는 투포환선수로 전조선종합경기대회(현 전국체전)에 출전해 투포환선수로 1939년에서 1941년까지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육상인들이 ‘해방 후에는 백옥자(70, 74년 아시안게임 투포환 금메달리스트,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해방전에는 박남옥’이라 할 정도의 성과였다. 박남옥은 투포환뿐 아니라 단거리와 높이뛰기에도 재능을 보인 만능선수였다.

그런 박남옥이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여배우 김신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닥치는 대로 책을 독파하던 시절 박남옥은 <신영화>라는 일본 영화잡지 속에 최인규 감독이 만든 영화 <국경>의 영화평이 실린 것을 보게 됐다. 글 속에는 최감독을 내조해온 배우이자 부인이었던 김신재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그 글을 본 이후 박남옥은 김신재에게 경외심을 갖게 되어 그의 출연작 스틸을 모조리 스크랩했고 편지까지 수십통 써보냈다.

운동선수로 대성할 기미를 보였던 박남옥은 여고를 마치고 일본 미술학교로 진학하려 했지만 엄격한 가정 탓에 1943년 이화여전 가정과로 진학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박남옥은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일요일만 되면 하루종일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노트에 적었다. 닥치는 대로 외국 영화를 보던 박남옥은 히틀러의 명에 따라 만든 올림픽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과정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는 여성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것으로 올림픽 다큐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것이다. 여감독이 이 장대한 다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안 박남옥은 쇼크를 받았다.

1944년 결혼을 강요하는 집안 분위기에 맞서 이화여전을 중퇴한 박남옥은 대구매일신문사 기자가 됐다. 원래는 가정난을 맡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독일영화에 관한 평을 하나 썼고 그것이 좋은 평가를 받아 이후 한국영화 평도 썼다.

해방이 되자 박남옥은 마음에만 고여 있던 영화에의 꿈을 펼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22세 때였다. 박남옥은 친구의 남편인 윤용규 감독의 주선으로 광희동의 촬영소에 스탭으로 입사했다. 그곳에서 평소 동경하던 김신재, 최인규 감독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예술인촌이라 불리던 돈암동 근처에서 하숙을 하며 박남옥이 촬영소에서 제일 먼저 배우기 시작한 것은 편집이었다.

편집조수 일을 청산하고 비로소 현장에 투입된 것은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로 스크립터 자격이었다. 본격적인 연출수업을 받기 시작한 박남옥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남성들만 북적대는 현장에서 그 노력이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지방 촬영 때는 사람이 많다며 그를 빼고 가기도 했다.

딸이 딴따라 판에 있는 꼴을 더 이상 보지 못한 부모 손에 이끌려 박남옥은 강제로 고향에 끌려가 선을 보게 됐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선보는 일은 중단되고 이를 천우신조로 여긴 박남옥은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했다. 종군촬영반이 된 것이다.

1953년 박남옥은 종군영화를 만들다 만난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해 부산에 살림을 차렸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 책 외판원을 하는 와중에도 영화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 박남옥은 딸을 낳고도 3일 만에 영화를 보러 나갈 정도였다.

드디어 1954년 박남옥은 꿈에도 그리던 감독 데뷔를 하게 됐다. 남편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16밀리 흑백영화 <미망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박남옥과 개인적으로 친한 이민자가 주연을 맡고 이택균이 남자주인공을 맡았으며 주요 스탭들도 대부분 박남옥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언니에게 돈을 꿔 ‘자매프로덕션’을 차려 시작은 했지만 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박남옥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박남옥은 돈 구하러 다니는 일이 영화 찍는 일보다 더 급했다. 게다가 아이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촬영장에 아기를 업고 나와 레디 고를 부르기도 했다. 직접 밥을 해 스탭들을 먹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촬영을 마치고 직접 편집을 끝내자 이번에는 녹음실에서 녹음을 거부했다. 16밀리 영화인데다 여자가 만든 것이라 얕보는 눈치가 역력했다. 전창근 나애심 등의 도움으로 녹음을 끝냈을 때 그의 치마끝은 갈가리 찢어져 있었다. 녹음실 계단을 아이를 업고 수도 없이 오르내린 탓이었다.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극장을 잡을 수 없었다. 35밀리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판에 더군다나 여자감독 영화라고 믿을 수 없다며 냉대가 심했다.

천신만고 끝에 1955년 중앙극장에서 개봉했으나 흥행에서 참패했다. 다만 영화에서 보여준 유려한 몽타주,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할 해변에서의 과감한 애정신 등은 작은 화제가 되었다.

이후 박남옥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월간영화지 <시네마팬>을 창간해 영화에 대한 미련과 울분을 달랬지만 그것도 오래 할 수 없었다. 1957년 이후에는 영화와는 동떨어진, 동아출판사 관리과장을 하며 20여년을 지냈다. 1992년 이후 딸의 유학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남옥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단 한 편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컸으나 시대와 상황이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했다.



박남옥에 대한 재평가는 그가 감독으로 데뷔한 지 20여년이 지난 1997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를 계기로 이뤄졌다.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재조명됐으며 네가필름로만 남아있던 그의 유일한 영화 <미망인>도 복원되어 개막초청작으로 상영됐다.

영화 한 편과 영화사 연표에 한 줄 기록으로 남아있던 박남옥은 이후 ‘박남옥영화상’으로 부활해있다. 이번 제10회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든 임순례 감독이 그 상을 받았다.

박남옥이 만든 데뷔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된 <미망인>은 기존의 여성성, 즉 아내이거나 어머니로서만 가치를 인정받던 여성의 틀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전쟁 중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여자주인공 ‘신’은 남편의 친구로부터 경제적 도움은 받으면서도 그의 은근한 애정공세는 물리친다. 하지만 젊은 남자 ‘택’과 사랑에 빠지자 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살림까지 차린다. 사랑과 모성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사랑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다 택이 전쟁통에 죽은 줄 알았던 애인 진을 다시 만나 신을 떠나자 택에게 칼을 들이댄다.

마지막 부분이 유실되어 결론을 알 수 없으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를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욕망에 충실하게 다룬 점에서 최초 여성감독의 파워를 입증하고 있는 작품이다.

박남옥에 이어 그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홍은원이 10여년의 조감독 생활을 거쳐 1962년 <여판사>로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데뷔를 했다. ‘홍일점 여판사,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광고 카피를 내세워,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판사의 죽음을 영화화한 것이다. 홍은원은 이후에도 영화 몇 편을 계속 감독했다.

세 번째 여성감독은 1965년 <민며느리>로 데뷔한 배우 최은희였다. 이미 남편 신상옥 감독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박남옥, 홍은원과는 백그라운드가 다른 것으로, 스타의 감독 데뷔로 더 화제가 됐다.



여성감독으로서 가장 인정을 받았던 이는 네 번째 여성감독 황혜미였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첫경험>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여성의 섬세한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평과 함께 제7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황혜미는 이후 <슬픈 꽃잎이 질 때> <관계> 등을 감독했으나 70년대 이후에는 영화계에서 발을 뺐다. 이후 10년이 넘도록 영화계에는 여성감독이 등장하지 않다가 1984년 이미례 감독이 <수렁에서 건진 내딸>로 데뷔하면서 여성감독의 맥을 이어놓았다.

우리가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고 감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박남옥 같은 초창기 여성감독들이 겪어낸 ‘최악의 순간’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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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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