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냐 휴머니즘이냐, 이강천의 '피아골'
이데올로기냐 휴머니즘이냐, 이강천의 '피아골'
  • 김다인
  • 승인 200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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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법 위반으로 상영금지된 최초의 영화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1990년 정지영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남부군>은 지리산 빨치산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개봉 당시 화제가 됐다.

실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태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한 <남부군>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의 활동, 상황 등을 객관적으로 재현했다. 이데올로기 관점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에서 빨치산을 묘사한 이 영화에서 안성기가 종군기자 출신 빨치산 이태 역할을 맡았고 당시 CF 스타였던 최진실이 이태를 사랑하는 민자 역을 맡아 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영화 <남부군>의 정신적인 뿌리는 35년을 거슬러올라간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이 있기 때문이다.

<피아골>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에 걸려 상영이 금지된 최초의 영화다. 이후 재상영 허가를 받기는 했으나 격렬한 논쟁을 일으켜 사회적 이슈가 됐던 영화다.

이 영화는 남한군이나 경찰 등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지리산 피아골에 갇힌 빨치산 부대원들만 등장하고 있다. 빨치산 하면 무서운 악당으로 뭉뚱그려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빨치산도 각각의 개성과 캐릭터가 있는 인간임을 부각시킨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모험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되는 시점이라 지리산에는 여전히 빨치산 잔당들이 남아있어 영화라는 허구 속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빨치산들이 너무 생생하고 현실적인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피아골>은 1954년 전주에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전북 경찰국 공보과 근무중인 김종환이 아직도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중인 빨치산 얘기를 이강천 감독에 들려주며 아울러 귀순한 빨치산이 지니고 있던 일기 메모첩 등도 보여줬다. 영화 소재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강천은 가제를 ‘빨치산’으로 정하고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고 탈고 후 ‘피아골’로 제목을 바꿨다. 이 시나리오는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활판인쇄를 했다.

인쇄된 시나리오는 당시 검열을 담당하고 있는 공보실에서 사전심의를 받았다. 민감한 내용에다 빨치산끼리 ‘동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그대로 묘사돼있음에도 불구하고 걱정과는 달리 별다른 수정사항 없이 검열을 통과했다. 단지 ‘위대한 우리 영도자 김일성 장군’을 그냥 ‘우리 김일성 장군’으로 고치라는 정도의 수정사항만 제시됐고 촬영시 필요한 북한군이 사용했던 총기류 대여도 쉽게 해줬다.

영화의 시작은 경찰에 쫓겨 허겁지겁 피아골로 숨어드는 빨치산부대의 등장부터다. 별명이 아가리인 부대장이 이끄는 이 빨치산 잔류부대가 산 속에 갇힌 채 생활하면서 인간성과 야만성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남한 출신 인텔리 정치문화책 김철수는 공산주의 이념에 회의를 느끼고, 그를 사랑하는 여대원 애란은 당성이 강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잔혹한 만수는 같은 소대원 소주를 강간하고 죽여버리는 등 극악스러운 성격을 드러낸다. 결국 토벌대의 공격에 부대는 섬멸되고 철수와 애란은 자수를 하러 마을로 내려온다. 그때 아가리부대장이 나타나 철수와 격투가 벌어지고 아가리 칼에 철수가, 애란의 총에 아가리가 각각 쓰러진다. 자신의 품에서 숨을 거둔 철수의 시체를 안고 오열한 뒤 홀로 백사장을 걸어가는 애란의 모습에서 영화는 끝난다.

<피아골>로 한국 영화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이강천 감독은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서 공부한 미술학도 출신으로, 해방 전후 귀국해 16밀리 영화 <끊어진 항로>에서 연기와 미술을 맡았다. 피난사절에는 대구 극장에서 간판 그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감독 데뷔작 <아리랑>은 나운규의 그것과 같은 구조지만 배경이 일본 치하가 아니라 북한 치하라는 것이 다르다. 주인공 영진 일가가 북한 치하에서 반공 운동을 하는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아리랑>은 1954년 개봉돼 호평을 받았고 이강천 감독이 <피아골>을 이어 만들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영화의 캐릭터는 애란 역에 당시 인기가 높던 노경희, 철수 역에 김진규, 그리고 아가리 부대장 역은 이예춘, 만수는 허장강이 연기했다. <아리랑>에서 출연하면서 이강천과 인연을 맺은 허장강은 만수 역을 자청했고 이예춘은 아가리 역 맡기를 망설여 운수점까지 쳐본 후 출연을 결정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고 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된 1954년 늦가을, 촬영팀은 화엄사에 여장을 풀었다.

이미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고물상에서 산 허름한 옷에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르고 진짜 빨치산처럼 지내고 있었다.

촬영팀이 도착한 날, 실제 아가리 대장이 찾아왔다. 귀순 후 경찰에 잔류 빨치산의 은신처 등을 알려주며 협조를 하고 있던 그는 촬영팀이 화엄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진짜 빨치산들이 알고 있다고 경고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이감독은 촬영팀에게 멀리 나가다니지 말 것과 항상 총기를 휴대하라고 명령했다. 당국으로부터 빌린 총기류는 실제 사용 가능한 총이었다. 촬영 중간중간 헌팅을 다닐 때는 그야말로 중무장을 해야 했다. 이감독은 소련제 권총을 휴대했고 김진규는 M1장총을, 허장강은 기관단총을 지니고 다녔다.

한번은 촬영 조수가 파랗게 질려 촬영 근방까지 빨치산이 나타났다는 주민 신고가 접수됐다고 알려오자, 이감독은 여자와 스님들은 모두 대피시키고 남자들에게 실탄 20발식을 나눠주고 실전 배치했다. 이감독은 “이것도 촬영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명심하고 총탄은 보호용 무기인 동시에 관에서 대여한 소품이니 절대 경솔하게 발사하지 말 것”이라는 좀 이상한 주의도 덧붙였다.

촬영팀은 밤새 교대로 보초를 섰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빨리 촬영을 마치고 지리산을 빠져나가야겠다는 각오를 모두의 가슴에 단단하게 한 사건이었다.

지리산의 계곡인 피아골은 30리에 이르는 깊은 계곡이어서 여기 숨어들면 자취를 찾기 어려웠다. 이같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조선 말기 동학난 때도 많은 동학군들이 숨어들었고 6.25전쟁에 패한 북한의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인 곳이다.

제작비가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립무원한 곳에 갇혀 있는 형국이라 출연진들은 서울에서 공수된 쌀과 구례에서 보내오는 김치만으로 끼니를 때웠다. 가끔 촬영이 없는 날이면 산 아래 마을에 내려가 비상금을 털어 닭을 끓여 먹는 것이 유일한 보양식이었다.

하지만 날이 가면서 비상금도 떨어지자 배우들은 마저 받지 않은 개런티를 언제 주는지 이감독에게 물어왔다. 제작자가 제작비 구하러 서울에 갔는데 꿩 구어 먹은 소식이었던 것이다.

알고보니 제작비를 구하러 간 김병기는 돈 마련을 못하자 차마 촬영지에 못 나타나고 구례에 머물고 있었다. 이감독은 배우들 채근에 함께 구례로 갔다. 필요한 돈은 당장 15만원이었는데 김병기는 5만원밖에 구하지 못했다. 연기자들 개런티에다 그동안 늘은 외상빚도 갚아야 하는데, 턱도 없는 액수였다.

당시 개런티는 노경희가 7만원으로 가장 높고 이예춘 등이 5만원이었다. 아직 덜 준 개런티는 노경희는 5만원, 이예춘 등은 3만원이었다. 이감독은 지혜를 짜냈다. 그리고는 우선 이예춘을 불러 남은 개런티 3만원을 선뜻 내줬다. 눈이 번쩍 떠진 이예춘에게 이감독은 이어 돈을 다 가지고 있으면 쓰기밖에 더하겠느냐 용돈만 남기고 촬영 끝날 때까지 맡기라고 했다. 듣고보니 좋은 생각이었다. 이예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배우들도 다 그렇게 ‘발로만 지불’을 하고 나니 5만원 가운데 오히려 1만5천원이 남았다는 얘기다.



해를 넘겨 진행된 촬영 막바지에는 필름이 다 떨어져버렸다. 필름이 떨어진 지 3일이 넘도록 제작자 측은 새 필름을 보내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감독은 자투리로 남은 필름으로 마지막 촬영을 했다. 심혈을 기울였던 라스트 신은 다섯 컷에서 세 컷으로 줄여 촬영했고 그것도 한 컷 찍고 다시 자투리 필름 끼우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장면은 검열에서 문제가 됐다. 화면에 혼자 백사장으로 걸어나오는 애란를 보고 이 여자가 자유를 찾아 내려온 것인지 다시 산으로 가는 것인지가 애매하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망루를 세우고 자유를 상징하는 종이 울리는 것으로 찍어야 했었는데 제작비가 모자라 망루 세울 돈이 없어 그냥 걸어가게 한 것이었다.

검열관의 지적에 재촬영을 할 수도 없어 고민하던 이감독이 묘수를 찾았다. 애란 가슴에 태극기를 디졸브시켜 대한민국으로의 귀순을 확실하게 입증시킨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녹음까지 완성된 이 영화가 1955년 9월23일 개봉되자 이번에는 용공논쟁이 벌어졌다. 작가 최정희 같은 문인이나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휴머니즘 가득한 영화라 칭찬을 했으나 일부 신문 등에서는 빨치산 묘사에 용공성이 있다고 문제제기를 했다.

용공성을 내세운 이들은 빨치산은 극악무도한 무리로 묘사되는 것이 당연한데 가장 악질적인 아가리대장마저도 인간적인 갈등이 묘사되는 등 너무 ‘사실적이고’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것을 비판하며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을 금지시켰다. 반면 일부 평론가들은 바로 이같은 점 때문에 사실적인 반공휴머니즘 영화로 완성됐다며 <피아골>에 의미를 부여했다.

결국 한번 상영금지를 겪은 후 재상영된 <피아골>은 1955년 제정된 제1회 금룡상에서 감독상을 타는 것으로 명예를 얻었다. 영화의 내용과 더불어 출충한 영상미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아직도 잔류 빨치산이 남아있었을 시기에 빨치산들을 인간적으로 해석해 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곁들여, 여기 출연한 배우들도 쉽지는 않았다. 촬영 중간에 일 때문에 광주에 갔던 허장강은 다짜고짜 경찰에 잡혀가 3일 동안 갇혀 있었고 촬영을 마치고 서울역에 내린 김진규도 그 자리에서 시경으로 끌려갔다. 이들의 차림새가 너무 빨치산 같아 실제인 줄 오인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만수에게 강간을 당하고 끝내 죽게 되는 여자대원 소주 역을 맡은 배우 김영희는 더 나쁜 경우다. 1980년대 중반 이감독은 길을 가다가 낯이 익은 60세 가량의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는 반색을 하며 인사를 했다. 알고보니 소주 역을 했던 여배우 김영희였다. 김영희는 <피아골>에서의 강간 장면이 하도 강렬하게 각인되는 바람에 끝내 혼인길이 막혀버렸다고 이감독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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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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