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춘향은 진짜 기생, 이민은 ‘엘리트 몽룡’
1대 춘향은 진짜 기생, 이민은 ‘엘리트 몽룡’
  • 김다인
  • 승인 200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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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영화화된 ‘춘향전’에 얽힌 이야기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국내에서 영화화된 고전 소재 가운데 마르고 닳도록 만들어진 것이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인 <춘향전>이다.

최근에 드라마로 만들어진 것까지 다 합하고 방자와 향단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방계’까지 치면 몇 편인지 세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

<춘향전>은 작자 미상의 민간설화다. 원래는 광대패가 불렀다는 설이 있는데 어쨌든 조선 영조, 정조 때 판소리 12마당을 근거로 세월이 흐르며 각색되고 윤색돼온 우리의 고전이다.

<춘향전>에는 청춘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골격으로 변학도로 대변되는 권력의 횡포, 춘향의 절개, 거기에 암행어사 출도를 외치는 반전과 해피엔딩으로 우리 구미에 딱 맞는 요소들이 모두 갖춰져 있다.

한채영이 담을 뛰어넘는 신세대 춘향을 연기한 드라마 <쾌걸 춘향>에서 임권택 감독이 조승우를 이몽룡으로 만든 <춘향뎐>까지, 무궁무진한 이 역사의 시작은 1922년 극단 토월회의 공연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복혜숙이 춘향 역을, ‘사의 찬미’의 윤심덕이 춘향 모 월매 역을 맡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춘향전>이 영화로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23년으로 뜻밖에도 감독은 일본인이었다. 춘향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조선인 돈을 끌어모을 수 있겠다고 재빠르게 판단한 것이다. 예상이 적중해 흥행에 성공한 이 <춘향전>에서 몽룡 역을 맡은 이는 당시 변사로 활동 중인 김조성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춘향 역. 원전에 충실(?)해 현역 기생 한룡을 기용했다. ‘리얼 캐스팅’이었던 것이다. 다른 연기는 몰라도 몽룡과 술잔을 나누며 사랑하는 연기는 실전처럼 해냈을 한룡의 <춘향전>이 성공하자 장안 기생들이 너도나도 영화에 입문, 이때 영화계에 들어온 기생 수가 이십여명이라는 회고도 있다.

영화사에 있어 <춘향전>은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만들어지는 예가 많은데,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도 <춘향전>이었다. 1935년 이명우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춘향전>은 무성영화 시대가 가고 발성영화 시대를 여는 시작이 됐다. 물론 들리는 부분보다 들리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던 미완의 발성영화였지만, 그것만도 너무나 신기해서 극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목소리가 나오는 춘향 연기를 한 배우는 문예봉, 16세 때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했고 초창기 한국영화의 빛나는 여배우로 활동을 했던 이다. (하지만 1952년 남편과 함께 월북, 이후 북한의 인민배우로 활동했다. 김정일로부터 생일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고 1999년 타계했다. 탤런트 양택조의 이모이기도 하다.) 이도령 역을 맡은 한일송이라는 배우에 대한 자료는 남은 것이 없고 영화음악을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홍난파가 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다른 영화에 비해 두 배나 비싼 입장료 1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했다.



초창기에 가장 완성도가 높은 <춘향전>은 1955년 이규환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한국영화사에서 이 <춘향전>이 지니는 의미는 적지 않다.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줬고 한국영화의 중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기 때문이다. 또 ‘춘향불패’의 전설도 만들었다. 전쟁이 막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설날에 맞춰 개봉한 이 영화에는 무려 9만8천여명이 몰려들었다. 경이적인 스코어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배우는 이 도령 역을 맡은 이민이다.

신성일보다 앞선 1세대 미남배우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이민은 요즘 말로 ‘길거리 캐스팅’으로 배우가 됐다. 경성제국대학교(현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 길을 가다가 강춘 감독 눈에 띄어 16밀리 무성영화 <연화>로 1950년에 데뷔했다. 나이 28세의 늦데뷔였다. 이후 호기심에 영화 2편 정도에 출연하면서 학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춘향전>에 출연한 ‘엘리트 몽룡’ 이민의 모습은 뭇여성들 마음을 설레게 했고 이 파장은 1957년 화제작 <자유부인>에서 최고점에 이르렀다. 무려 1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에서 이민은 자유부인의 마음을 흔들고 여성관객들 혼을 빼앗았다.

<춘향전>으로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던 이민은 그로부터 19년 후인 1976년 장미희 이덕화 주연의 <성춘향전>에 다시 출연했다. 이때는 몽룡의 아버지 이진사 역을 맡았으니 세월의 흐름을 몽룡 집안과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도령 역은 정해졌지만 문제는 춘향 역이었다. 기성배우 가운데 적역이 없다고 판단한 이규환 감독은 신인을 기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에 서있다가 괜찮다 싶으면 가로막고 말을 걸어도 봤으나 열이면 열 다 도망가 버렸다. 이화여전 앞에 진을 치고 ‘엘리트 춘향’을 뽑으려 3백명이 넘는 여학생들을 일일이 보던 일도 허사였다. 마음에 드는 학생이 있어도 학칙상 ‘교외 출연 엄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규환 감독은 그나마 신선한 얼굴인 무용가 출신 배우 김삼화를 추천했다. 하지만 제작자 이철혁은 요지부동, 자신의 아내인 배우 조미령을 밀었다. 할수없이 카메라 테스트 결과 더 예쁘게 나온 쪽을 쓰자고 합의를 봤다.

카메라 테스트 결과는 조미령의 승리. 김삼화가 찐빵처럼 부은 얼굴로 찍혔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없는 설에 의하면 조미령이 카메라와 조명 감독들에게 특별히 부탁해 김삼화는 정면에서 찍고 자신은 예쁘게 나오도록 각도를 잡아 찍었다고도 한다. 그만큼 춘향 역을 따내려 애섰다는, 그런 얘기일 것이다.

소담한 몸집에 조신한 몸가짐으로 전형적인 한국 여인상을 주로 연기하던 조미령은 50~60년대 인기 스타 중 한 사람이었다. 80년대 초반까지 연기를 하다가 하와이로 이민을 가면서 은퇴를 했다. (요즘 TV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조미령과는 동명이인이다.)

이 영화에 방자와 향단 역을 맡은 전택이 노경희는 부부 배우였다. 특히 노경희는 키가 커서 키 작은 조미령과 거의 20센티미터 차이가 나 투샷이 잡힐 때는 치마 속으로 다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한국영화사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춘향 몽룡 커플과 향단 방자 커플이 탄생됐다. 춘향과 몽룡은 가장 한국적인 여배우와과 가장 잘생긴 남배우가 맡았고 향단과 방자는 연기력이 뛰어나고 호흡이 잘 맞는 중량급 조연배우들이 맡는 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수십년 동안 셀 수 없이 만들어진 춘향과 몽룡의 러브스토리는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을 교과서 삼아 변주되고 변형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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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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