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할리우드 키드’ 이규환 감독
개화기의 ‘할리우드 키드’ 이규환 감독
  • 김다인
  • 승인 200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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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오로지 영화,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가수 겸 배우인 비(정지훈)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고 가수 보아는 미국 음악시장에 본격 진출을 선언했다. 엔터테인먼트업계에서는 미국시장을 정복하지 못하면 전세계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너도나도 미국 영화, 음악계 진출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 한국영화 초창기에도 할리우드를 꿈꾸던 영화감독이 있었다. 이규환 감독이다.

한국영화에서 이규환 감독이 가지는 무게감은 그의 꿈만큼이나 크다. 그의 영화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는 향토적인 리얼리즘 영화의 출발이라 평가되고 있다.

경북 대구에서 태어난 이규환(1904-1982)은 어릴 때 서울로 올라와 우미관을 드나들며 찰리 채플린의 작품을 보면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 이규환의 계획은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능한 아버지를 둔 탓에 어머니의 삯바느질과 남의 집 허드렛일로 겨우 학교를 마칠 수 있던 외아들 입장에서 그 꿈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여기저기 직장을 다니던 이규환은 도저히 적응을 하지 못하고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읍소를 한다. 어머니가 마침내 허락을 하자 이규환은 어머니에게 ‘남아가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난즉 소망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노라’라고 써준 후 길을 떠났다. 23세 때였다.

큰물에서 큰 물고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가고자 했던 그는 우선 중국 상하이로 갔다. 하지만 가난한 집 아들이 상하이에서 우선 해야 할 일은 먹고 잘 돈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는 친구 소개로 알게 된 한 권투선수의 팔 자리 안마를 해주거나 속옷 등을 빨아주며 겨우 연명했다. 비참하고 무기력한 하루하루는 그의 미국행 꿈을 갉아먹었다.

다행히 독일 유학 길에 상하이에 들른 강정원이라는 젊은이가 그를 딱하게 여겨 얼마간의 여비를 줬다. 하지만 미국까지 가기는 턱도 없는 돈이었다. 이규환은 그러나 귀국하는 대신 그 돈을 여비로 일본으로 갔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일본에 도착한 이규환은 무작정 당시 유명 영화사인 신흥영화사 촬영소 정문 앞에 매일 출근(?)을 했다. 한 달 동안 하루종일 영화사 문에 서있는 그를 딱하게 여긴 수위가 그를 기획부장에게 소개를 해줬고, 이규환은 미조구치 감독 등이 활동하던 영화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3년 동안 영화사에서 일을 했지만 원하던 감독 수업이 아니라 막노동 수준이었다. 이규환은 일본에 있는 동안 완성한 시나리오를 들고 귀국을 했다. 27세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그에게는 비빌 언덕이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불황이어서 연간 제작되는 영화편수도 현저하게 줄어있었다. 좌절한 이규환은 대구로 내려가 시간을 보내다가 뜻밖의 기사회생 기회를 잡게 된다. 대구 만경관에서 상영중인 나운규의 영화 <개화당이문>을 보러 갔다가 상하이서 만났던 강정원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영화는 강정원의 부친이 제작비를 댄 것으로, 강정원은 이규환의 시나리오를 보고는 부친을 설득해 영화 제작비를 대게 했다.

드디어 제작자를 만난 이규환은 영화계의 큰 별 나운규를 찾아갔다. <임자없는 나룻배>의 주인공인 뱃사공 춘삼 역을 부탁하러 간 것이다. 며칠 후 나운규가 이규환을 찾아왔다. 그것도 머리를 박박 밀고. 놀란 이규환에게 나운규는 “이 정도로 밀어놔야 촬영 때 보기좋게 자랄 것”이라고 말했다. 출연을 승낙한 것이다.

1932년작 <임자없는 나룻배>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농촌에 철로가 깔리면서 생존권을 빼앗긴 뱃사공 춘삼, 그의 딸에게 마수를 뻗치는 일인 기사 등을 통해 일본의 압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에 나운규를 캐스팅함으로써 절반의 성공을 거둔 이규환은 춘삼 부인 역에 김연실, 딸 역에 문예봉을 각각 기용해 영화를 완성했으나 검열에 걸려 300피트가 잘려 나갔다. 특히 춘삼이 일본인 기사를 도끼로 죽이고 달려오는 기차에 정면으로 부딪혀 죽는 마지막 장면은 일본에 대한 명백한 항거라 하여 잘렸다.

1차 검열을 한 후 검열당국은 개봉일에 2차 검열을 했는데 이는 동아일보에 당시 학예부장이던 주요섭이 쓴 평 때문이었다. 주요섭은 이 영화에 대해 농촌의 서정이 잘 나타났음과 더불어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해 준 영화’라고 극찬했다. 이 평으로 인해 동아일보는 그날로 판매금지 당했고 일인 검열관은 재검열하러 극장으로 달려갔다. 이규환은 잘린 필름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관객들을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죽은 춘삼의 빈 나룻배가 강물에 하염없이 떠있는 장면에 “이리하여 정처없는 나룻배는 흘러흘러 떠나가는 것이었다”라고 변사가 마지막 해설을 하면 관객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다. <아리랑> 이후의 민족적인 환호였다.



데뷔작으로 일약 유명해졌지만 이규환의 생활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규환은 동가식서가숙 하면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그가 머무는 곳에는 어디든 벽에 ‘영화’라고 한자로 쓴 두 글자를 붙여놓을 정도였다.

이규환은 오로지 영화만을 생각하며 일평생을 지냈지만 길이 아닐 때는 과감하게 영화를 포기하기도 했다.

1941년 2차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국내의 모든 영화사를 통폐합해 어용영화사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만들었다. 대표와 중역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은 전영화인들의 이력서 놓고 경력 소행 등을 따진 뒤 합격된 사람들에게만 소위 ‘기능증명서’를 발급했다. 이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영화 제작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많은 영화인들이 이 영화사에 가입했지만 이를 끝내 거부한 영화인들도 있었다. 이규환 윤봉춘 이구영 홍개명 전창근 등이었다. 그중 이규환은 요주의 인물이었으므로 표면상으로는 가입통지서조차 보내지 않았으나 그 영향력 때문에 뒤로 등록을 회유했다. 이규환이 이를 거절하자 일본 체류 시절 알았던 일본 영화인들까지 동원했다.

하지만 이규환은 차라리 영화를 놓았다.

이규환은 만주로 떠나 토목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며 지냈다. 1944년 귀국했으나 부랑자라 하여 다시 강제노동판에 끌려갔다. 하루 강냉이 몇 줌으로 연명하며 비행장을 닦는 중노동을 1년반 동안 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감독이라는 것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해방이 되고 1주일 만에 서울로 돌아온 이규환은 라디오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화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춘향전> 등을 비롯해 은퇴작이 된 1976년작 <남사당>까지 총 23편을 만들었다. 특히 <춘향전>은 광복 후 최초로 만든 고전물로 이후 숱하게 만들어진 <춘향전>의 표본이 됐다.

‘할리우드 키드’의 꿈은 비록 이루지 못했지만, 이규환은 일제 치하에서도 서정적이고 향토색 짙은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으로 한국영화사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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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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