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토하며 마지막 작품 만든 나운규
피 토하며 마지막 작품 만든 나운규
  • 김다인
  • 승인 200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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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프로덕션 전성기 이후 내리막길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춘사 나운규의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은 나운규 프로덕션 시절이었다.

조선키네마에서 <아리랑>에 이어 <풍운아> <들쥐> <금붕어> 등의 영화를 만들던 나운규는 단성사주 박승필의 도움으로 독립해 1927년 나운규 프로덕션을 차렸다. 이후 2년 반 동안 5편의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나운규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나운규 프로덕션에서 만들어낸 영화는 <잘있거라><옥녀><사랑을 찾아서><사나이><벙어리 삼룡> 등이며 이 가운데 <사랑을 찾아서>와 <벙어리 삼룡>이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나운규 프로덕션의 창립작품인 <잘있거라>는 빈민촌을 배경으로 한 사회고발 영화로 모든 이들의 기대 속에 단성사에서 개봉됐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어 만든 <옥녀>는 박승필이 제작비를 아끼고 대중적인 내용의 영화를 만들라는 주문에 따른 것으로 옥녀라는 한 여인을 형제가 함께 사랑하다가 결국 형이 동생에게 양보한다는 내용이다. 요즘 TV 드라마의 단골 내용인 것이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너무 과장이라 추잡하다’고 혹평을 하는 등 물의와 비난이 뒤따랐다.




<옥녀>의 개봉 첫날 관객들 사이에서 영화를 본 나운규는 낙망했고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두문불출, 일주일 동안 신마리오를 쓴 것이 <두만강을 찾아서>(<사랑을 찾아서>의 원제)였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 스케일 큰 영화였다.

하지만 이미 두 편을 실패한 박승필이 제작비를 대줄 리는 만무해 나운규는 결국 조선키네마의 요도 사장을 찾아갔다. 요도는 <아리랑> 성공의 쾌감을 맛본 터였기 때문에 3천500원이라는 거액(당시 보통 영화 편당 제작비는 1천원)을 제작비로 내주었다.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떠난 한민족의 생활을 그린 이 영화는 <아리랑>에 버금가는 대작이었다. 주연을 맡은 이금룡은 독립군의 나팔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 찬사를 받았으며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이금룡은 인덕이 있고 지조 있는 성품으로 그가 영화계에 남긴 공로로 ‘금룡상’이 제정되어 3회까지 시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랑을 찾아서>는 개봉되기까지 숱한 고난을 겪었다. 전 14권인 영화는 검열로 6권이 잘려나가 8권만 상영할 수 있었으며 제목도 두 차례나 변경됐다. 원래 <두만강을 찾아서>였는데 제목이 불경하다 하여 <저 강을 건너서>로 개봉했는데 개봉 중간에 재검열을 해서 <사랑을 찾아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같은 검열은 오히려 입소문을 낳아 1928년 개봉 당시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나운규로서는 다시금 <아리랑>의 영광과 명예를 누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나운규에게는 그러한 행운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돈이 생겼어도 흥청망청 써버렸기 때문이다. 이어 나운규는 각본, 주연만 맡고 홍개명이 감독한 <사나이> 역시 신통치 않았다. 이 영화에는 신인 여배우 유신방이 등장하는데, 이 여배우는 기녀 출신으로 나운규의 내연녀이기도 했다.

다음 작품으로 나운규는 자신이 인상깊게 읽은 나도향의 소설 <벙어리 삼룡>을 택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집이 온통 불타는 가운데 삼룡 역을 맡은 나운규는 불타오르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아씨 역의 유신방을 구해오는 것이었다. 나운규는 실제로 집에 불을 질러 촬영하기로 했고 촬영중 몸에 불이 옮겨 붙는 바람에 심한 화상을 입고 한 달 동안 앓아 누워있어야 했다. 이처럼 심혈을 기울인 <벙어리 삼룡>도 별 반응이 없었다.

결국 나운규 프로덕션은 해체의 길을 걸었다. 단원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남은 나운규는 홀연히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1년을 머물고 돌아온 나운규는 재기를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영화계는 1928년 이후 등장한 경향파 영화인들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다 총독부의 검열 강화와 흥행 부진 등으로 무성영화의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 제작되는 영화도 1, 2편에 불과했다.



30년 출연만 한 <아리랑 후편>이 실패하고 이어 감독까지 한 <철인도> 역시 무참하게 깨지자 나운규는 일본인 제작의 영화 <금강한>과 <남편은 경비대로>에 출연했다. 이것이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일본 극우파 폭력배이자 배우인 도야마가 만든 원산만 프로덕션에서 만든 <금강한>에서 나운규는 백만장자 방탕아로 처녀들을 희롱하다 본처에게 살해당하는 역을 연기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운규에게 실망했다. <아리랑>을 만들면서 쌓아올린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이후 만드는 영화마다 실패를 거듭한 나운규를 구원해준 것은 당시 일본에서 연출공부를 하고 돌아온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규환은 자신의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에 나운규의 출연을 청했다. 뱃사공 춘삼 역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나운규는 출연을 승낙했고 이 영화는 무성영화 후기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 작품 <오몽녀>를 만들 때 나운규의 몸은 최악이었다. 집안 내력인 폐병으로 인해 토혈을 하고 의사가 대기중인 상태에서 촬영을 마쳤다. 나운규의 생명을 갉아먹으며 완성된 <오몽녀>는 ‘근래 보기드문 걸작’ ‘조선영화가 새로 나갈 길을 발견한 영화’라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나운규의 시간은 더 흘러가지 못했다. 1937년 8월 8일 주치의와 장기 두던 나운규는 어디선가 음악이 들린다며 음악에 맞춰 지휘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옆으로 쓰러져 그대로 숨졌다. 9일 새벽이었다. 그를 못마땅해하던 영화인들마저 애도하고 아리랑 노래가 구슬프게 울리는 가운데 나운규는 한줌 흙으로 돌아갔다.

38세를 일기로 아깝게 요절한 나운규의 무덤가에서 친구 윤봉춘은 이렇게 고별사를 썼다.

“못다 하고 쓰러진 그의 고혼은 망우리 공동묘지 서쪽 잡초가 우거진 무덤에 다섯자 깊이 상반신만 보이는데 달밝은 밤이면 많은 고혼들 앞에서 아리랑 팬터마임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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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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