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모던걸’로 이름 날린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장안의 모던걸’로 이름 날린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 김다인
  • 승인 200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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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변사 모셔가려 극장 앞 인력거 쇄도 / 김다인



[인터뷰365 김다인] 한국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극영화는 <월하의 맹서>다. 1923년 만들어진 이 영화는 조선총독부의 저축 장려 계몽영화였으나 한국인 감독과 배우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한국영화는 이로부터 무성영화시대의 막이 오른 것으로 본다.

35mm필름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23년 4월 9일 경성호텔에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1백여 명을 초청하여 시사회를 가졌으나 극장에서 개봉되지는 않고 각 지방의 공공기관에서 상영되었다.

<월하의 맹서>의 각본을 쓰고 감독한 윤백남(1888~1954)은 동경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로 한일합방 이후 신극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해방 후 1953년에는 서라벌예술전문대학(현 중앙대학교에 통합) 초대 학장을 지낸 바 있다.

<월하의 맹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1904~1933)가 등장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는 여자들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천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여자 역도 예쁘장한 남자배우들이 여장을 하고 대신 했다.

이월화는 이 영화에서 주색잡기에 정신을 못차리는 약혼자 영득(권일청 분)을 계몽해 저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약혼녀 정순 역을 맡았다.

갓스물의 나이에 아름다운 용모로 <월하의 맹서>에 등장한 이월화는 뭇남성들을 매혹시켰으며 ‘장안의 모던 걸’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죽은 줄도 모르는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월화와 함께 극단 토월회 멤버였던 고 복혜숙 여사의 생전 회고록에서도 이원화의 확실한 나이와 출생 등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1933년 동아일보 7월 19일자에는 ‘이제 이월화의 이름 3자를 해부해 보자. 이월화의 성은 김도 아니고 이도 아니고 최도 아니고 박도 아니다. 이는 그가 이세상에 나오면서 자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그의 어머니도 누구인지를 모르고 자라났다.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유모였으며 그 유모되는 이가 그뒤 다시 어느 여자에게 수양딸로 주었기 때문에 영영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라났다…’고 적혀 있다.

몇몇 떠도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월화는 서울 창신동 늙은 기생집 앞에 강보로 싸여진 채 버려졌으며 이를 발견한 늙은 기생이 노후를 의탁할 생각에 들여다 키웠다. 이정숙이라는 이름으로 자라난 그는 열 살 때부터 기생이 됐다. 우미관에서 즐겨 보던 활동사진에 빠진 이정숙은 기생을 그만두고 민중극단에 들어갔다가 이어 토월회의 멤버가 됐다. 여기서 월화라는 예명을 얻었다.

이월화는 <월하의 맹서>의 유명세를 업고 조선키네마 창립작품 <해의 비곡> 출연했다. 이 영화에는 이월화에 이어 두 번째 여배우로 발굴된 신인 이채전이 출연했다. 이월화는 자신의 인기가 이채전에게 밀리자 화가 나서 윤백남의 <운영전> 출연제의를 거절했다. 이 영화에는 역시 신인 여배우 김우연이 출연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월화는 영화 데뷔 이후 남자들과의 스캔들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인기도 로맨스도 시들해지자 일본으로 중국으로 떠돌았다. 1933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상하이에서 음독자살했다는 설과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는 설이 있다. 확인된 바는 없으나 어쨌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듯하다. 당시 이월화의 나이 29세였다.


<월하의 맹서> 이후 본격적인 극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동반 인기를 얻었던 직업은 변사였다. 움직임만 있을 뿐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영화 화면을 보며 구성진 목소리로 대사는 물론 음향효과까지 해내 관객들을 웃고 울리던 이들이다. 극장 간판에 써붙인 변사의 이름을 보고 입장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당시 변사들은 영화 흥행에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변사들의 전성기는 유성영화가 출현한 1935년쯤까지 계속됐다.

안종화의 <한국영화측면비사>에 따르면 최초의 변사는 활동사진에 미친 청년 우정식으로 알려져 있다. 광무대 암실에서 필름 내용을 줄줄 꿰는 그를 본 단성사 사주 박승필이 변사로 데뷔를 시켰다. 하지만 언변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별로 없고 목소리도 찢어지는 듯해서 관객들의 호응이 좋지 않아 물러났다.

무성영화시대 이름 날린 변사로는 김덕경 서상호 김영환 최종대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인기 변사의 월급은 70~80원으로 당시 일류 배우가 30~40원, 고급 관리가 40~50원 받던 것에 비하면 고소득자였다. 지방 극장에 갈 때면 거마비는 물론 하루 5원식 추가에 갖은 향응도 베풀어졌다. 일류 변사 치고 기생첩을 거느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중에서 가장 화끈하게 즐기다 스러진 이는 서상호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쩌렁쩌렁한 목청에 유머 위트 넘치는 언변으로 인기를 모았던 그는 우미관의 스타로 월급이 400원이 넘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그를 데려가기 위해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메울 정도였다.

주색에 빠져 지내던 서상호는 점점 변사 일을 게을리하더니 종내는 아편에 중독되어 아예 변사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지인들에게 몇푼씩 구걸해가며 아편을 피우던 그는 49세에 자신이 데뷔한 우미관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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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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