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곧 그 사람’ 별난 시나리오 작가들
‘글이 곧 그 사람’ 별난 시나리오 작가들
  • 김갑의
  • 승인 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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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 초록 잉크, 최인호 악필 유명 / 김갑의



[인터뷰365 김갑의] 시나리오의 분석과 검토는 영화사 업무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수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가야 하는 작품의 결정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흥행에서 실패하였을 경우에는 제작자만이 아닌 그 영화를 수급한 전국의 영화배급업자(흥행사)들에게도 연쇄적인 손실을 입히게 되어 그만큼 신용과 신뢰를 잃게 되고 회사 운영에 막심한 타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검토한다는 것은 영화사의 운명을 담보로 한다는 심경으로 임해야 하며 치밀한 분석과 신중한 검토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나리오 작가들 중에는 원고를 메우는 글씨체가 도무지 알아보기 힘든 악필(惡筆)이 있어서 도무지 무슨 글자인지 헤아리다 보면 내용도 헷갈리고 짜증마저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하면 너무 정직하게 글자를 써서 원고를 대하는 맛(?)을 느끼지 못해 속독으로 시나리오 한편을 훌쩍 읽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젊은 작가들이 아예 타이프라이터나 워드 프로세서로 깨끗하게 타이핑을 하여 한권의 책으로 시나리오를 제출하는 경향인데 이것 역시 너무 줄과 줄 사이를 좁혔거나 띄는 차이에 따라 읽는 맛도 달라진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소문난 악필은 작가 최금동씨를 손꼽는다. 이분은 원고의 칸에 넘칠 듯한 큰 글씨를 쓰되 붓글씨의 초서체처럼 획이 끊어지지를 않아 마치 무수한 선들이 원고지 위에서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그 춤추는 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최금동의 작품세계로 빠져들게 되고 ‘끝’자에서 비로소 자신을 되찾게 된다.

TV드라마 <달빛가족>에서 ‘둔보따리’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낸 작가 이희우씨는 원고지보다 16절 백지를 애용하는 특이한 작가이다. 이희우씨의 작품은 16절 백지에 아주 정성을 들인 깨알글씨로 가득 차 있다. 보통 시나리오는 원고지 2백50매 안팍의 분량임에 비해 이희우씨 작품은 이의 1/3정도밖에 안된다. 그러나 쓴 쪽에서 돋보기를 대고 쓰듯 정성들여 깨알글씨를 썼기 때문에 읽는 쪽도 그만한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그의 작품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만다. 이런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면 일단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애마부인>을 쓴 이문웅씨의 글씨는 돼지꼬리가 휘말리듯, 원고지 칸 안에서 원무곡을 추듯 뱅뱅 돌고 있다.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라는 표현이 맞을 만하다. <아스팔트 위의 돈키호테>의 작가 홍종원은 반드시 만년필을 사용하는데 펜촉이 아주 굵은 것이 아니면 쓰질 않는다. 뚱뚱한 체격 때문인지 만년필도 뚱뚱한 것만 사용한다.

<조선왕조5백년> 시리즈로 TV드라마에서도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한 신봉승씨는 시나리오작가로서 명성이 높았다. 지금은 TV드라마 집필 때문에 시나리오에는 거의 손을 못대고 있으나 그가 쓴 시나리오 원고는 아직도 밝은 초록색 만년필 자국들로 가득가득 메워져있다. 신봉승씨는 밝고 쾌활한 성품 때문인지 검은색이나 파란색 잉크 대신 밝은 초록색 잉크를 썼고 몇몇 작가들은 신봉승씨를 흉내 내어 한때 초록색 잉크로 원고지를 메우기도 했다.



<겨울여자> <장군의 아들> 등 많은 성공작품을 각색한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김승옥씨는 정직하게 글을 쓰는 평범한 서체의 작가이지만, 완성된 시나리오를 기다리는데는 ‘애먹이는 작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말처럼 일단 그의 손에서 탈고된 시나리오는 거의 1백%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작가 김승옥은 독촉하면 할수록 독촉하는 쪽이 손해를 보게 되는 작가이다.

인가 소설가이자 시나리오작가이며 영화도 감독한 최인호씨는 악필로 유명하다. 웬만한 사람은 그의 원고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그는 또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제작자나 감독에게는 결코 자신의 작품을 내놓지 않는 고집을 갖고 있다. 최인호씨의 단골은 동창관계인 배창호감독이며 남자주인공에는 안성기씨다.

최근에 <살으리랐다>의 자작 시나리오를 직접 감독한 윤삼육씨(고 윤봉춘씨 자제)는 연필로 쓴다.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그는 연필을 깎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킨다. 연필로 원고를 쓰는 작가로는 문상훈 윤석훈씨 등도 있다. 그러나 문상훈씨는 근래에 와 타이핑에 의한 원고를 제출하는 경향이 있고 윤석훈씨는 <형사> 등의 TV드라마 집필 등에서 만년필이나 볼펜을 쓰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명콤비인 작가 송길한씨는 초기에 셋방살이를 하며 고생할 때 쓰던 앉은뱅이책상을 결코 잊지 않는다. 겸허하고 진지했던 작가로서의 출발시점과 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옛날에도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했다. 곧 글이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흥분하여 글을 써가는가 하면 한자 한자를 정성스럽게 그리듯 쓰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정성들여 쓰다가 나중으로 가면서 차츰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작가들도 많이 있다. 많은 작가들의 원고를 대하면서 ‘서여기인’이란 말이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여 서체가 아니라 타자의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 무엇으로 작가의 성품이나 성격을 유추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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