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요” ③
“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요” ③
  • 송명호
  • 승인 200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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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질긴 조사 끝에 밝혀낸 최초의 태극기 / 송명호

[인터뷰365 송명호] 오늘은 대마도 이즈하라항 아리랑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행사의 클라이맥스나 다름없는 401회 조선통신사행렬이 오후 3시에 진행되고 오후 늦게는 우리 한배민속예술단의 진도북춤 공연이 있는 날이다. 이런 긴장 때문에 다른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한방지기 구홍덕 박사와 여수시립국악단 서영훈 악장의 단잠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조심해서 방문을 빠져 나왔다.

아래층 현관을 나오니 후덥지근한 공기와 함께 온통 매미 소리와 까마귀 소리가 귀를 찢는다. 매미 소리야 여름이니 요란하게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아침 새소리에 익숙한 한국 사람으로서는 눈꼽도 떼기 전에 귀를 후비는 까마귀 소리가 낯설고 기분마저 썩 좋지 않아 역시 이국이구나를 실감케 했다.


한국이 비둘기 낙원이라면 일본은 까마귀 천국인 듯했다. 아침 여덟시에 식사하려면 앞으로도 한 시간 반이나 남아서 기라쿠나야도(氣樂宿) 숙소를 나와 골목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館) 기념관 대문을 지나 위쪽으로 슬슬 거슬러 걸어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골목에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 시간이면 우유며 야쿠르트며 신문 배달이며 일터를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한데, 아직도 밤의 적막이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골목길은 손바닥으로 쓱 닦아도 먼지 한점 묻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여 이것 역시 낯설고 오히려 걷기가 거북스러울 지경이었다. 일본을 올 때마다 느낀 점은 먼지가 없고 거리가 깨끗함이었다.


골목 돌담에 작은 담쟁이 넝쿨이며 콩짜개란 줄기가 빼곡하게 자라 있어서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대마도 전체에 해풍이 드나들어서 이런 넝쿨 식물들이 잘 자라는 듯 했다. 골목이 끝나자 엷은 바다 비린내가 풍기는 수로가 나왔다. 이즈하라항으로 이어지는 바닷물 수로이다. 이즈하라항 쪽보다는 깨끗했다. 아마도 이쪽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주택가라서 그런 것 같았다. 수면을 건드리며 줄을 잇는 물 파동은 바닷고기들의 행차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니 물고기와 인간이 마치 동병상련의 운명처럼 보인다. 물고기는 물에만 붙어살고, 인간은 땅에만 붙어사는 꼴이 그러했다. 지금 귀를 찢는 매미와 까마귀는 다리와 날개가 있어서, 땅위를 걷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하지 않은가.

이 수로부터는 길이 넓어져 택시들이 가끔씩 지나간다. 주변은 크게 볼 만한 것이 없어 보여 길거리에 세워진 안내판만 살펴보았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대마도 소방본부가 나오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육상자위대가 나오는 것 같았다.



길 양쪽에는 아리랑축제의 깃발들이 도열하듯 꽂혀 있었다. 다시 되돌아오는 골목길 전봇대에 칭칭 감기듯 세워진 검은고양이 간판이 눈에 들어와 가까이서 보았더니 택배 상호를 알리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강아지보다는 검은 고양이가 더 애완동물인 것 같다.

하늘 색깔이 어두워진다. 얼굴에 웬 물방울 기운이 느껴진다. 발걸음을 서둘러 숙소로 돌아오니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진다. 바람까지 불면서 비가 퍼붓는다. 오후에 커다란 행사를 두고 비가 오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산책을 하는 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세수며 샤워를 다 마친 상태여서, 여유 있게 머리도 감고 몸에 비누질도 했다.

“미나상! 아사 고항! 모닝 고항!”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됐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간드러진 음성이 온 집안을 잔잔하게 울린다.

“오하요 고자이마스.”

일본 여행중 빼 놓을 수 없는 일본식 아침 인사말이다. 아래층의 식탁 방으로 들어온 우리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인 아주머니한테 일본식 인사말을 건넨다.

어제 아침부터 웬 젊은 여자가 주인 아주머니를 돕고 있어서 궁금하여 물어 보았다. 일본어가 여물지 못해 주정훈 여행사 소장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더니, 주인 아주머니의 딸로서 결혼 한 지 4년 8개월 되었고,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은 영어 선생님이라고 했다. 나이는 고작 스물 여덟이라는데 결혼 4년 8개월 만에 아이 넷을 낳았다는 말에 모두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그 나이에 아이 넷을 낳은 일은 놀라운 일도 아닌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더 이상하기만 했다. 나도 형제가 9남매 아닌가. 한때 한국의 경제가 어렵다보니 인구 억제 정책으로 한 부부 두 자녀를 권장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녀 출산을 적극 장려하고 있어도, 그게 쉽지 않아 오히려 국가의 고민이 되고 있는 것이 한국 실정이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비는 그쳤다.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다소 서늘해졌다. 식사를 마친 예술단원들은 오후에 있을 행사 준비로 의상을 다듬거나 각자의 악기를 손질하였다. 나는 태극기 깃대를 손질하기로 했다. 어제 예술단원들이 연습을 하던 해수욕장에서 주운 낡은 대나무로 만든 깃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만들기로 하고, 주정훈 소장에게 깃대로 쓸 만한 재료를 구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더니 숙소 주인에게 한번 여쭤볼테니 다른 볼 일이 있으면 그 일부터 먼저 하라고 한다. 주정훈 소장의 친절한 배려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숙소 건너편의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이나 구경하기로 했다. 관람은 자유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에 토스이를 소개한 안내판이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토스이는 1860년에 대마도에서 태어난 아버지를 따라 부산 왜관에서 잠시 생활한 바 있었고, 16세 때 영문학을 배웠다. 1882년 무렵에는 서울에 있었는데 마침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이런 현지 사건을 맨 먼저 보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도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를 했다. 그 후 아사히신문에 시대물과 현대 소설을 자주 발표하여 독자들을 매료시키게 되었다. 이런 인기로 여자 소설지망가 20세 이치요는 토스이를 만나게 되고, 그 후 25년 동안을 흠모하다가 죽었는데, 이런 사실들은 그녀가 생전에 꼬박꼬박 적었던 일기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가슴 뭉클한 비련의 로맨스였던 것 같았다. 마루 안으로 들어서니 왼쪽의 조그만 유품 방에 나카라이의 사진과 이치요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층은 토스이가 썼던 소설과 그의 문학적 업적을 소개한 각종 서적들이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토스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주정훈 소장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조금 전에 부탁했던 태극기 깃대를 잘 만들어 놨다고 한다. 숙소 주인이 주정훈 소장의 부탁을 받고, 이웃집에 가서 곧고 초록빛 진한 대나무를 얻어와 적당한 길이로 톱질을 해서 태극기 위치대로 단단히 묶어 놓았노라고 경위를 자세히 말해 준다. 아니다 다를까 아주 멋진 태극기 깃대였다. 오후에 행사 때 이렇게 멋진 태극기 깃대를 들고 우리 예술단 선두에서 길잡이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 태극기를 달으라고 하면 대나무 꼭대기에다 노끈으로 묶어서 대문 밖에 세워 두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광복 이후 국기에 관한 규정을 보면 그 무렵 마땅히 게양대 재질이 없어서 대나무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몇 차례 외국 여행을 다닐 때마다 태극기 몇 장씩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교포들에게 또는 호텔에 선물하곤 했었다. 내가 태극기를 선물하게 되면 우리 교포들은 혈육을 만난 것보다도 반가워하면서 사실 태극기를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하나같이 털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여행객들의 발길이 많은 외국 호텔과 음식점에서는 태극기 한 장 걸어 놓기를 바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애국정신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국내에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외국에 온 한국 사람들이라면 문득 발견한 태극기만 보아도 눈물까지 글썽이곤 한다.



내가 태극기 마니아의 길을 걷게 된 때가 1978년의 일이니까 30년째이다. 그 무렵 나는 동사무소에 근무를 했었다. 동사무소는 동네 중간쯤에 이층 목조 건물이었고, 현관 바로 앞에 국기 게양대가 있었는데, 이곳은 항상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루는 아이들이 목청을 높여 떠들고 있어서 싸운 줄 알고 나가 봤더니, 어떤 아이가 다짜고짜로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수신사 박영효가 만들었다고 하니까, 다른 아이가 나서면서 그 증거가 있느냐고 반문을 한다. 아마도 아이들은 태극기를 최초로 누가 만들었을까를 놓고 갑론을박한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중대한 실수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박영효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만들었을까? 박영효가 만들었다면 그 태극기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봐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자극 때문에 태극기 연구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도서관과 고서점이 즐비한 청계천을 뒤집듯 드나들면서 최초의 태극기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티끌만한 흔적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핑계로 태극문양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발품을 벌어서 꼭 가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었다. 그런 덕분에 회암사 터의 계단 태극문양이며, 궁궐의 정전과 침전이며, 종묘, 왕릉의 정자각 동쪽 어깨 돌에도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태극문양들은 먼 훗날 태극기가 만들질 때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나의 지독한 끈질김은 결국 1997년 8월에 이르러서야 도쿄 도립중앙도서관에서 1882년 박영효 수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태극기를 가져와 고베 니시무라야 숙소 옥상에 게양했다는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의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임금이 태극문양에 4괘를 넣고 색깔은 청색과 홍색으로 하되 4괘의 의미는 방향이라고 했다. 고종 임금이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자 중국은 마건충이라는 신하를 보내 당시 조선왕국은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으니 중국의 왕기인 용기를 본받아 그리되 색깔만 청색으로 쓰도록 간섭을 하였으나, 고종 임금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태극기를 그려서 국기로 사용하게 되었노라는 경위까지 설명되어 있었다. 그러니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고종 임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태극기가 만들어진지 115년 만에 그 진실이 밝혀지자 KBS는 8월 14일 밤 9시 뉴스에 특종으로, 동아일보와 한국일보는 그 다음날 특종으로 보도를 하게 되었고, 그 밖에 언론들도 다투어 최초의 태극기 자료 발굴 기사를 싣게 되자, 이날부터 나는 일약 태극기박사로 호칭을 받았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으로 태극기의 의미가 남다르다. 작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추진한 국가상징물 문화재등록사업에 내가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옛태극기 15점을 근대문화재로 지정한 것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서 새로 만든 깃대를 보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태극기의 추억을 더듬는 동안 주정훈 소장이 숙소의 일행들을 모아 우리 방으로 온다. 오늘 일정을 다시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오후 3시 조선통신사행렬과 6시 반에 있을 북춤놀이가 빠듯하니, 금석관 호텔에서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2시에는 의상과 악기를 챙겨 숙소를 나서서 쯔쯔 숙소에 묵고 있는 예술단과 합류하여, 행렬 출발지 이씨왕가 유적지로 가야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행동을 맞추어 달라고 당부한다.
<계속>


■ 태극기선양운동중앙회 상임고문 송명호(시인)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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