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음악의 선구자 신병하 ①
한국 영화음악의 선구자 신병하 ①
  • 김다인
  • 승인 200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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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세원 영화 <연분홍치마>가 데뷔작 / 김다인



‘그때 그 인터뷰’는 80, 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화계 사람들을 필자가 1993년에 인터뷰해 쓴 것입니다. 그 다섯 번째로 80년대 한국 영화의 음악을 도맡아 작곡했던 신병하씨와의 인터뷰를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인터뷰365 김다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엔니오 모리코네를 알 것이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만든 <황야의 무법자>에서 그 유명한 ‘방랑의 휘파람’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프리카>를 관통하던 서정미 넘치는 멜로디와 더불어 그를 기억할 것이다.

80년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대표하는 존 월리엄스는 어떤가. <스타워즈>에서 광활한 우주공간을 별무리처럼 수놓던, 또 <조스>에서 식인상어와 싸우는 인간들과 어우러지던 웅장한 심포니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영화음악에는 신병하씨가 있다. <하얀전쟁> <개벽> <남부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씨받이> 등 영화에서 음악을 맡았던 이다. 영화음악에 대한 관심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90년대 영화가에 등장하는 작곡가들이 대부분 대중가요 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데 견주어 신병하씨는 80년대부터 애오라지 영화음악만을 계속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영화에 ‘영화음악’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불과 10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에 필요한 것은 ‘음악’이 아니라 ‘주제가’로 축소되어 있었고 주제가를 제외한 나머지 음악은 배경음악 수준으로 인식되어 왔다.


“영화음악을 하기 전 오랫동안을 미8군에서 밴드마스터로 활약했어요. 영화계와 연을 맺게 된 것은 1979년 현진영화사 작품인 <갑자기 불꽃처럼> 편곡을 맡은 것이 처음이죠. 이때는 경음악평론가 이해성씨 곡을 편곡하는 데 그쳤지만 다음해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음악가의 길을 나서게 됐는데, 코미디언 서세원의 영화 데뷔작인 <연분홍치마>가 제 영화음악 데뷔작입니다.”



그때만 해도 형편없던 인식이 요즘 점차 나아지고 있어 영화음악을 계속한 보람을 느낀다. 그냥 보기에 말수 적고 내성적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신병하씨의 유년은 화려하고 능동적이었다. 학교에서 알아주는 사회자였고, 알아주는 만화가였던 그가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 또한 평범한 동기에서는 아니었다.

신병하씨는 어릴 때 만화가를 꿈꾸었다. 같은 또래들을 열광시킬 만큼 재주 있는 솜씨였다. 그러나 철없이 만화 솜씨를 뽐내고만 있기에 그는 너무 궁핍했고, 그 궁핍을 이겨 나갈 방법을 찾는 조숙함도 있었다. 손위 누이와 여동생만 있는 외아들, 경제력이 전혀 없는 아버지를 둔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만화를 그려 팔면 돈을 벌겠다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신동헌 화백의 화실이었다. 지금은 그 동생인 신동우화백이 더 유명하지만 그 때는 신동헌 화백의 만화는 알아주는 일류였다.


“가보니, 생각했던 것과 딴판이었어요. 선 그리는 사람 따로, 채색하는 사람 따로 밑에 도제노릇을 하는 사람만 해도 많았어요. 만화가가로 돈을 벌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고 그 길로 만화 그리기를 집어치웠죠.”


중학 때의 일이다. 만화가 아니면 ‘무대 체질’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궁리가 섰다. 지금처럼 방송이 자리를 잡기 전이어서 영화 상영관에서도 막간 쇼를 했기 때문에 군소 쇼단이 많았다.

신병하씨는 쇼에 출연하면 돈을 벌겠다 싶어 고등학교 시절에 밴드를 하나 조직했다. 그는 모범생 서클과 문제아 서클에 동시 가입하고 있었는데, 양쪽 서클원 몇 명과 작당하여 일을 꾸몄다. 학교 사환을 꼬여서 서클원들 등록금 고지서에 항목 하나를 추가하여 등사한 것이다.

밴드 조직 자금을 모으려고 벌인 이 일을 학부모들이 알게 되어 물거품이 되었다. 정학 처분을 받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기어코 일을 저지른 것은 졸업한 뒤였다.


“삼일관에서 재즈 페스티벌을 열었는데 조영남, 박인수 등이 그때 출연했어요. 2회까지 열렀는데, 악기를 다루는 밴드만 번번이 스카우트되어가고 보컬과 사회를 맡은 저는 아무도 찾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썩은 기타’로 맹연습해 베이스 파트를 맡고 밴드를 조직, 파주 일대 기지촌으로 무조건 나섰죠.”


먹여주고 재워주면 어디서건 연주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차츰차츰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 미8군에서 스카우트 손길을 내밀었고, 그의 음악인생 뿌리는 내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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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인

영화평론가. 인쇄매체의 전성기이던 8,90년대에 영화전문지 스크린과 프리미어 편집장을 지냈으며, 굿데이신문 엔터테인먼트부장, 사회부장, LA특파원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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