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찾습니다] 장학금 들고 모국찾은 LA의 구두쇠 거부
[당신을 찾습니다] 장학금 들고 모국찾은 LA의 구두쇠 거부
  • 홍경희
  • 승인 2008.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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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 접시닦이 거쳐 백만장자가 된 그의 고국사랑 / 홍경희



[인터뷰365 홍경희] “교장선생님, 이 돈은 비록 큰 액수는 아닙니다만 두더지처럼 번 돈이어서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가난한 후배들을 위해 써달라며 당시 돈으로 3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들고 모교인 충남 공주농고를 찾은 박형만 씨(당시 44세)의 눈에 잠시 이슬이 맺혔다. 가난의 봇짐을 지고 서독(현 독일) 광부로 떠났던 한 청년의 감격적인 금의환향이었다. 박형만 씨는 한동안 노교장과 손을 잡은 채 감회에 젖었다.



그곳 농가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고교시절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나뭇짐을 팔며 고학을 했다. 공주 금강산 뒷마루 터를 오르내리며 가랑잎을 긁어모아 팔던 때를 평생 잊을 수 없었다던 그는 어느덧 LA 한인사회에서 ‘한국계 유태인의 표본’으로 통하며 성공한 실업가가 되어 있었다. 최근의 분위기로 봐서 ‘돈을 번다’는 것이 크게 존경받지 못하지만 당시 광부로, 간호원으로 바다를 건넌 교포들의 고생은 단순히 ‘돈을 벌기위해’라고 할 수 없는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었다.



64년 말, 군 복무를 마치고 서독 ‘에센’광산으로 떠난 박 씨의 하루는 새벽4시부터의 강행군이었다. 지하 1천m 탄광에서 탄가루를 마시는 일과를 끝내고 그는 부업으로 부근의 목장에서 소와 돼지에 먹이를 주는 일까지 해냈다. 그는 서독에 있던 중 홀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음에도 직장여건으로 귀국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기자에게 ‘죽고 싶은 슬픔뿐이었다’고 그 때의 심정을 표현했다. 그렇게 탄가루 묻은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일하던 무렵 간호원으로 서독에 온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하였다.



계약체류 기간을 마친 박 씨와 아내는 피눈물로 모은 돈을 모두 고향으로 송금하고 단돈 5백 달러를 들고 LA로 향한다. 두 사람은 바로 맞벌이에 돌입했다. 박 씨의 첫 번째 직업은 시간당 최저임금이었던 1달러15센트짜리 중국식당 접시닦이였다. 그 무렵 다행히 아내는 병원에 일자리를 구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고생 끝에 부부는 조그마한 주유소를 인수할 수 있었다. 이후 자동차수리공장을 인수하여 사업을 성공시켜 LA 굴지의 종합정비공장 <웨스턴 바디 샵>에 이르게 된 것.



박 씨에게 당시 귀국은 장학금 전달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가난한 농촌청년을 위한 2년제 기술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이미 부지 선정 등 상당히 구체적인 청사진까지 마련한 상태였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돈은 두더지처럼 벌어도 쓸 때는 정승같이 쓰자는 게 우리 부부의 생각입니다” 건강히 계시다면 일흔을 넘기셨을,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가 정겹던 박형만 씨의 소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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